“잡티 가리는 게 싫다. 사람 같지 않아 보여서.” 설경구만큼 얼굴 꾸미는 데 인색한 배우가 또 있을까. 분장도 5분이면 끝이고 거울도 웬만해선 안 본다. 오죽하면 <실미도> <소원> 때는 맨 얼굴로 촬영했을까. 그러고 보면 설경구는 인위적으로 무엇을 덧대 이미지를 만들기보다는 극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가 아예 그 인물이 돼버리는 식으로 연기에 색을 입혀왔다. 그런 그가 이번엔 장장 5시간이나 분장을 했다. 그것도 새벽 1시부터 얼굴에 본드와 파우더를 겹겹이 칠하는 특수분장이었다. “밤을 새워가며 분장하고 촬영을 했더니 나중에는 (어지러워) 땅이 올라오더라. 분장 때문에 두드러기는 나지, 밥은 맘대로 못 먹지. 나중엔 약까지 오르더라.” ‘불편한 일은 안 하면 된다’(<씨네21> 921호)던 설경구를 끝내 거울 앞으로 이끈 건 <나의 독재자>의 김성근이었다.
김성근, 그는 누구인가. 극단 허드렛일 전담에 맡는 역할마다 지나가는 행인이 전부인 “물러터진” 무명배우가 아닌가. 그런 성근에게 인생 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1972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가상회담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김일성 대역 배우로 성근이 최종 낙점된 것이다. 그러나 단꿈도 잠시. 이 엄청난 연극의 배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있고 그들은 고문과 겁박으로 성근을 김일성화한다. 못하겠다고 도망가면 그만일 텐데 성근은 기어코 김일성 역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이유는 단 하나. 아들 태식 앞에 당당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땐 묵직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예민하고 민감한 얘기이지 않겠냐는 주변의 우려도 있었다. 근데 다시 보니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이야기로 가볍게 읽히더라.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 얘기다. 나도 아버지랑 안 친하다. 마음은 있어도 표현은 잘 안 한다. 그런 면을 관객도 충분히 공감할 것 같았다.”
부자의 정이 뭐길래 성근이 그토록 김일성에 몰두하는 걸까. “애 엄마는 죽었지, 아버지라는 사람은 연극한답시고 밖으로 돌지. 성근의 눈에 아들은 그저 예쁜 게 아니라 불쌍했을 거다. 게다가 아들 앞에서 (연기를 못해) 개망신당하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보였으니. 성근도 처음에는 김일성 역이라고 해서 당황했겠지만 ‘이거 아니면 안 돼, 이걸로 꼭 (아들에게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줄 거야’라며 끝까지 매달린 것 같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성근은 점점 종잡을 수 없어진다. 김성근은 김성근이었다가, 김일성을 연기하는 김성근이었다가, 김성근은 까맣게 잊고 자신이 곧 김일성이라고 외치는 망상 상태에까지 이른다. 설경구는 이 오락가락하는 인물을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가 연기하는 건 김일성이 아니라 김일성을 연기하는 김성근”이라며 중심을 잡아나갔다. 그러니 김일성의 연설 동영상을 보며 따라해보거나 사투리 지도를 받는 건 설경구에게는 아주 기초적인 작업에 불과했다. “본 촬영 땐 혼자 해결했다. 김성근인데 실제 김일성과 좀 다르면 어떤가. 배우에게는 100% 완성이라는 건 없는 것 같다. 100%를 향해서 바보처럼 달려갈 뿐이지.” 대신 설경구는 스스로에게, 이해준 감독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성근이 김일성 역에서 못 빠져나오는 거야, 안 빠져나오는 거야? 이 사람 계속 자기 연극 속에서 사는 거지? 사실 지금도 이 질문의 답은 모르겠다. 근데 굳이 알아야 할까. 몰라도 될 것 같다. (웃음)”
어쩌면 김성근은 평생 하나의 역할로 하나의 연극을 완성하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성근은 되게 고독한 사람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딴섬 같은 존재고. 그래도 난 김성근이 배우로서 성공한 것 같다. 집요하게 매달렸던 역할을 결국은 해내잖나. 좋은 연극이 됐건 나쁜 연극이 됐건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아들한테 보여줬으니까.” 문득 한길만 보며 내달린 집념의 사나이 김성근이 설경구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아시스> 때 종두가 되기 위해 실생활에서도 종두의 허름한 복장을 하고 지냈고 지인의 결혼식장에도 그 차림 그대로 갔다는 설경구의 지난 일화를 들춰봐도 그렇고 역할에 따라 수십 킬로그램씩 몸무게를 늘리고(<역도산> <나의 독재자>) 그만큼 빼기 위해 매일 줄넘기 수천개씩을 한다는 것만 들어도 그렇다. 인터뷰날도 다르지 않았다. 차기작 <서부전선>의 전쟁 신을 찍고 전날 밤 서울로 왔다는 그는 “아이고, 귀에 석탄 가루가 아직도 있네”라며 휴지로 쓱쓱 닦아내더니 이내 사진촬영에 집중한다. 이런 설경구라면 알다가도 모를 김성근의 속내를 이해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