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축구 영화다. 임유철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누구에게나 찬란한>(11월6일 개봉)은 국내 최초 지역아동센터 유소년 축구팀 희망FC의 도전을 다룬 이야기다. K리그 인천유나이티드 축구팀을 그렸던 전작 <비상>(2006)이 그랬듯이 어려운 환경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촬영 도중 다큐멘터리의 원래 주인공이었던 희망FC 박철우 감독이 사임하고, 김태근 감독이 새로 부임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임유철 감독이 6년 동안 끝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시사 때 희망FC 아이들이 참석해 영화를 봤다.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나.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도 굉장히 좋아했다. 박철우 감독이 팀에서 나간 뒤 김태근 감독이 오기까지 3개월 정도 걸렸다. 그동안 실질적으로 연습이 불가능했다. 부모님들 모두 나를 원망했다. ‘영화 때문에 박철우 감독을 자른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영화를 공개한 뒤에는 모든 오해가 풀렸다.
-원래 제목이 <축구감독 박철우>였다고. 영화를 기획한 계기가 궁금하다.
=기획을 한 시점이 2009년이다. 트위터가 막 강세를 보일 때다. 예를 들어 트위터에서 모인 사람들 1천명이 10만원씩 내면 1억원이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창작물을 만들어 사회문제를 널리 알리고 10배의 수익을 올리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취지에서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중 박철우 감독을 만났다.
-희망FC도 박철우 감독을 통해 알게 됐나.
=박철우 감독은 경남 고성에 있는 사회복지시설 보리수동산에서 동고성FC를 만들어 8년 동안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친 적 있다. 희망FC는 영화를 만들면서 새로 창단한 축구팀이다. 처음엔 갔던 길을 한번 더 가는 것이니 쉬운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고생할 줄 몰랐다. (웃음)
-처음 만났을 때 박철우 감독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박철우 감독은 만화가 이현세의 선 굵은 캐릭터를 떠올리게 한다. 잘못된 것에는 욱하고 맞서서 싸우는 스타일이다. 예상외로 박철우 감독은 축구선수 출신이 아니라 농부이자 사회복지사다. 손수 못질을 해가며 보리수동산을 세운 사람들 중 한명이다. 정당 활동가들이 지역 아이들을 위해 만든 축구팀에 보리수동산 아이들까지 불러모은 사람도 그다. 활동가들이 떠난 뒤 아이들이 축구를 계속하고 싶어 하자 박철우 감독이 축구지도자 자격증을 땄다.
-영화의 전반부, 사람 좋던 박철우 감독이 엄격한 스타일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꽤 공을 들인다.
=박철우 감독이 키운 아이들 중에 고등학교 엘리트 축구팀으로 스카우트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1학년 때 선발 선수였다가 2학년 올라가면서 후보 선수로 밀렸다. 축구팀 후원회장의 아들이 같은 포지션을 맡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후원회장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시합장에 가는 버스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감독에게 따졌다가 심하게 맞고 돌아온 아이가 보리수동산에 있는 축구용품을 전부 불태워버렸다. 이런 일들을 겪은 뒤 박철우 감독은 더욱 엄해질 수밖에 없었다.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아이들이 극복해야 할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희망FC의 목표가 단지 ‘좋은 아이를 길러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것 같다.
-촬영 도중, 박철우 감독이 당장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이유로 사임하겠다고 결정한다. 오랫동안 그를 카메라에 담아왔던 제작진 입장에선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4년5개월 동안 찍었던 주인공이 사라진 셈이다. 그럼에도 박철우 감독의 엄격한 훈련 방식에 반대했던 이유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는 것이 영화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이 틀어지면 촬영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사실 처음 발견한 희망을 지켜내지 못한 건 어른들의 책임 아닌가. 어른들의 시행착오로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스탭들의 도움으로 촬영을 이어가며 박철우 감독의 후임으로 합류한 김태근 감독과 축구단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다.
-현재 박철우 감독과의 사이는 어떤가.
=박철우 감독은 영화를 아직 안 봤다. 얼마 전 시사회에 초대했는데 영화가 다 끝난 뒤 편하게 얼굴이나 보자고 하더라. 박철우 감독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다. 관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박철우 감독을 악역으로만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새로 온 김태근 감독은 어땠나. 실력과 상관없이 모든 선수를 배려하는 그의 훈련방식을 보니 첼시의 모리뉴 감독이 떠오르더라. 독설가 이미지와 달리 자신의 선수는 끔찍이 아끼는 그 모리뉴 말이다.
=김태근 감독의 장점은 잘하는 아이와 뒤처져 있는 아이 모두 챙긴다는 것이다. 못하는 아이는 끌어올리고, 실력 있는 아이는 자만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식이다. 우수한 선수 한명에게만 몰두하면 나머지 선수들은 어쩔 건가. 이 질문은 박철우 감독과 마찰을 빚었던 지점이기도 하다. 한명을 위해 나머지가 희생되는 시스템이 지금 엘리트 축구의 가장 큰 문제점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경쟁의 폐해는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자신밖에 모르던 오합지졸 아이들이 김태근 감독의 지도 아래 하나의 팀으로 뭉치게 된다. 그 과정이 감동적이었는데,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나.
=이야기는 김태근 감독이 결론을 어떻게 만들어줄 것인지에 달려 있었다. 걱정이 없진 않았다. 박철우 감독과 대화를 해보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김태근 감독은 달랐다. 강한 주장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마냥 좋은 사람이라 축구가 그냥 놀이에 그치면 어쩌나 싶었다. 물론 아이들이 짊어진 가난의 굴레를 조명하는 것까지는 미리 염두에 뒀다. 솔직히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김태근 감독이 훨씬 더 큰 감동을 준 거다. 예를 들어 김태근 감독이 오자마자 붙잡고 있던 아이가 병훈이다. 병훈이는 우리가 포기한 아이였다. 축구 경기에서 포지션을 무시하고,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등 사건 사고를 많이 일으켰다. 그런 병훈이가 김태근 감독으로 인해 변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입장에서 아이들의 변화를 극적으로 담기엔 병훈이 같은 캐릭터가 좋지 않나.
=변화가 나타났으니 망정이지 나는 불가능하다고 봤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왕따였을 정도니까. 처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단체로 햄버거집에 갔을 때 김태근 감독이 병훈이에게 햄버거 주문을 맡겼다. 그러자 아이들이 바로 병훈이에게 가서 허락을 받더라. ‘병훈아, 나 이거 먹어도 돼?’ 김태근 감독이 일부러 아이를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위치에 넣어준 거다. 그게 시작이었다. 선생님이 ‘왕따하지 마라’, ‘애들이 따돌리면 나에게 말해라’ 이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서로를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상황이 벌어질 동안 하필이면 카메라가 없었다. 화가 나서 계속 툴툴댔다. “카메라 어디 갔어?” (웃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아이들 입에서 “감독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묘한 감동을 받았다. 그런 말은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도 쉽게 나올 수 없는 말이지 않나.
=아이들이 생각보다 더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병훈이가 김태근 감독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단지 축구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이들 대다수가 가진 상처는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병훈에게는 거의 모든 커뮤니티를 통틀어 자신을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김태근 감독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아이들에게 축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경로일지도 모른다.
-희망FC의 마지막 경기는 전작 <비상>의 후반부, 전통의 명가 울산 현대를 상대하는 시민구단 인천유나이티드의 투혼과 흡사했다. 그런 경기 내용을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약간의 기대는 하고 있었다. 영화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서 ‘그 사람이 얼마나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에너지는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처박고 고꾸라지거나 둘 중 하나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강도가 세야 드라마가 나온다. 결승전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최고조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나도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팀이 강팀이었는데도 아이들이 밀리지 않고 활약을 보여주지 않았나. 정말 감동받았다. 다만 심판이 지나친 편파 판정을 해서 화가 나기는 했다. 얼마나 열이 받았으면 카메라에 대고 막 소리를 질렀다. ‘야, 심판 얼굴 찍어!’ 나중에 편집할 때 그 목소리를 지우느라 힘들었다. (웃음)
-마지막 경기에 카메라가 얼마나 투입됐나.
=열다섯대가 넘는다. <비상>보다는 적다. <비상>에서는 중계 그림도 있었는데, 일반 다큐멘터리팀이 중계 그림까지 만들려면 비용이 엄청나다. 그나마 축구 장면을 많이 찍어봤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촬영 분량이 많았다고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자기 전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 촬영 원본을 보는 데만 6개월 걸렸다.
-편집할 때 넣지 못해 아쉬웠던 장면은 없나.
=김태근 감독의 훈련들. 두명이 손잡고 뛰어서 도망가는 한명을 붙잡는 훈련이 있었다. 선수마다 나이가 다르니 달리기 실력이 제각각이다. 그래서 두명이 손잡고 뛰면 한명을 못 잡는다. 마음이 안 맞으니까. 그 한명을 붙잡으면 두명이 세명이 되고, 또 도망가는 선수를 붙잡으면 세명이 네명으로 된다. 이게 공간을 몰아서 압박을 하는 훈련이다. 재미있었는데 편집해놓고 나니 훈련과정이 지루해 빼야 했다.
-전작 <비상>의 인천유나이티드도 그렇고, 희망FC도 그렇고 어려운 환경에서 축구를 하는 약체 팀에 끌리나 보다. KBS 방송다큐멘터리 <공간과 압박>의 주인공 올림픽 축구대표팀이나 K리그의 강팀의 전술이나 비결을 파헤치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나.
=국가대표 축구팀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태극마크가 가진 무게감과 더불어 ‘국가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라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축구 마니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포츠 경기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표본이다. 스포츠를 통해 흘리는 땀이 사회적 가치를 투영할 때 다큐멘터리로서의 의미 또한 배가 되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면 다뤄볼 생각이 있다.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났을 때 이 작품을 끝으로 스포츠 다큐멘터리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생각은 아직 유효한가.
=그 선언을 하고 나서 별 반응이 없다. 찍든지 말든지. (웃음) 지인과 관계자들로부터 ‘야, 화났냐?’, ‘삐치지 마, 임마’, ‘술 한잔 살까?’ 이런 연락만 오더라. (웃음)
-다음 작품은 뭔가.
=독립 PD들과 함께하던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는 의견 차이 때문에 그만뒀다. 요즘에는 민주언론시민연합 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기레기’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보인 언론의 태도와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먼저 완성한 다음에 <누구에게나 찬란한>을 개봉했더라면 기자들이 기사를 안 써줬을 것 같다. (웃음)
-당분간 <누구에게나 찬란한> 개봉 때문에 정신없을 것 같다.
=영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보다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는 것이 우선이다. 많은 정책입안자들이 영화를 보고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준다면 좋겠다. 일반 관객에게는 내가 이 작품을 찍으며 느꼈던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면 한다. 이 영화는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속한 커뮤니티의 여러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아이만 소중하다고 여기는 부모들에게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이야기로 들렸으면 좋겠다.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 또 축구 영화지만, 임유철 감독은 스스로 스포츠 마니아가 아니라고 말한다. 축구 영화를 연달아 찍은 이유도 아이들이 노력해 흘린 땀이 사회에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다큐멘터리 소재로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지금 그는 다른 데 꽂혔다. 인터뷰가 끝나고, 밤 10시 <누구에게나 찬란한> 무대인사를 마친 뒤, 아직 지면을 통해 공개할 수 없는 다음 작업을 취재하러 갔다. <비상>과 <누구에게나 찬란한>이 그랬듯이 그가 오랜 시간 취재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건 언론계 선배이기도 한 소설가 김훈 작가가 한 얘기인데, 소재가 뭐든지 간에 다큐멘터리는 팩트를 기반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팩트가 아닌 감독의 주장이 개입되는 순간 작품은 한순간에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