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나서 깊은 감동에 빠졌다가 곧바로 두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보이후드>는 남자아이가 성에 눈뜨는 과정을 철저하게 배제했는가?’ 그리고 ‘어째서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메이슨 주변에서는 한명도 죽는 사람이 없는가?’ 두 가지 의문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섹스란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죽음과 아주 가깝게 붙어 있는, 죽음의 반대말이라 생각한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섹스’와 ‘죽음’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빼버린 이유가 짐작이 된다. 특정 스포츠 심사위원들이 최고점과 최저점을 뺀 점수를 평균 내서 등수를 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가장 흔하지만, 또한 가장 극단적이기도 한 섹스와 죽음이 <보이후드>에는 빠져 있다.
영화의 초반에는 기대감이 컸다. 어린 메이슨이 마당 구석에서 브래지어 팸플릿을 보면서 이상한 웃음을 지을 때, 나는 ‘소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동네 형들과 맥주를 마시며 여자아이들에 대한 허세 가득한 음담을 할 때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물론 <보이후드>는 ‘주인공 메이슨이 성에 눈뜨는 영화’가 아니다. 아닌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명의 소년이 남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성적인 부분이 지나치게 적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이럴 거면 영화 제목을 <차일드후드>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괜히 심통을 부려본다(맞다, 걸작 영화에 대한 소심한 투정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일반적인 소년이 아니라 ‘이상적인 소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남자들은 대부분 알겠지만, 15살과 16살 즈음의 소년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15살과 16살 즈음의 소년들이 이 글을 읽고 발끈한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 (아니 거기 말고, 가슴에 손을 얹으라고!) 해보길 바란다. 몇몇 별종 소년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고삐 풀린 망아지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대체로 남자들은 15살에 생식 과정을 시작하고 20살에 2세를 낳았다. 인류학자 수잔 프레이저가 454가지 전통문화를 연구한 결과 신부의 평균 연령은 12살에서 15살이었고, 신랑의 평균 연령은 18살이었다. 문명화된 도시의 문제는 사회화 과정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다. 18살이면 이미 육체적으로 완성된 동물들인데, 여전히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으니 부조화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소년의 ‘몽정’이 부조화의 시작일 것이다. 소년은 ‘몽정’으로 사정을 경험한다. ‘소년의 몽정’은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본능적인 몸의 과정인데, 소년에게는 이 과정을 받아들일 만한 능력이 없다. 자신의 몸을 부정하게 되고, 부끄럽게 여기게 되고, 덕분에 새로운 비밀이 탄생한다. 많은 소년들에게 이것은 최초의 비밀이다. 이때부터 자위행위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소년들의 밑바닥에 이런 부조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무슨 성 관련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나 역시 그 시절을 통과해왔다.
소년들의 자위행위에는 묘한 슬픔이 있다. 섹스가 죽음과 맞닿아 있듯 자위행위 역시 죽음과 맞닿아 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거나 (특정한) 영상 자료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힘들게 공들여 사정을 한다.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정액이 배출되고 나면 어마어마한 무게의 허무가 찾아들고, 죽음이 코앞에 와 있는 듯한 감각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자위행위는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본능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남자에게는 정기적으로 정액을 배출시켜 싱싱한 정자를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는 본능이 숨겨져 있다. 슬픈 자위행위다. 소년들은 자위행위를 ‘견디며’ 남자가 된다.
메리 로치의 골 때리는 성 관련 보고서 <봉크: 성과 과학의 의미심장한 짝짓기>(Bonk)에는 ‘자위행위’를 금기시하던 (뭐, 지금도 장려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속으로는 정자를 흘려보내도 (영혼이 느끼는 기쁨으로 인해 잃어버린 부분이 보충되어서) 생기를 잃지 않는 반면’ 무분별한 수음은 발기불능, 시력상실, 심장병, 정신이상, 구부정한 어깨, 처진 근육, 끈끈한 손 등의 각종 질병을 수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저런 증세가 사실이라면 영화 <돈존>의 주인공 조셉 고든 레빗은 진작에 시력을 잃고 (스칼렛 요한슨도 못 알아보고) 정신도 이상해지고 (진정한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 좋아 보이는 근육도 다 잃고 말았을 것이다. <자위-극심한 공포의 역사>에 나오는 크롬랭크 박사는 “자위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일 때에는 철학이나 역사책의 어려운 부분을 외워라”라고 권했다. 정부가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철학’과 ‘역사’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크롬랭크는 참으로 고약하게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어서 자위를 방지하는 여러 가지 비책을 얘기했는데, 그중에는 남자들에게 자신의 성기를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무심결에 스스로를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소변 볼 때도 ‘빨리 소변을 보고, 바지에 소변 몇 방울을 흘리는 한이 있다 해도 페니스를 털지 말도록’ 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갈 수 있다면 크롬랭크 박사를 만나 한마디 해주고 싶다. “제발, 좀!”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포르노그래피영화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몇살 때였는지는 말 못하겠지만 비교적 어린 나이였고, 성적인 것에 큰 관심이 없을 때였다. <보이후드>의 메이슨이 브래지어 팸플릿을 보던 것처럼 포르노를 보았다(아마 메이슨도 동네 형들과 포르노를 보지 않았을까?). 화면 속에서 금발의 여자는 외계인 같아 보였다. 가슴이며 엉덩이며 모든 게 비정상적으로 컸고, 표정 역시 생전 처음 보는 종류였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징그러워서 화면을 끄지도 못한 채 계속 지켜보았다. 한동안 그 영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 여러 번 포르노영화를 보았다. 친구들과 함께 본 적도 있고, 혼자서 몰래 본 적도 있다. 그때의 충격적인 영상들을 보면서 내 안의 무엇인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엇인지, 어떤 것에서 어떤 것으로 바뀌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생의 커다란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두들겨 맞은 날 이전과 이후가 반으로 나뉘었듯 그 영상들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소년은 시각에 지배당한다. 어릴 때 보았던 영상이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시각적 충격에 지배당한다. 어떤 보고에 따르면 ‘성인 남자가 시각적 대상에 새로이 성적 집착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 보았던 시각적 환상과 함께 어른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된다. 만약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내 경우엔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남자라는 동물은 얼마나 슬픈가. 여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여자들도 슬픈 존재들이겠지) 자세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혹시 <걸후드>라는 영화가 개봉하면 그때 다시 한번 자세히 다뤄보는 걸로.
자, 그럼 <보이후드>에서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내 식대로 채워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자. 메이슨은 브래지어 팸플릿을 보며 성에 눈을 뜨게 된다. 더욱 새롭고 자극적인 팸플릿을 찾아다니던 메이슨은 동네 형들과 어울리다 포르노영화를 접하게 되고, 그 자극적인 매력에 도취돼 그날부터 방에 처박혀 수음에 전념하게 된다. 기나긴 노력 끝에 수음능력(수능)을 마스터하게 되지만, 수음을 통해 허무한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된 메이슨은 돌연 후드티 하나만 입고 긴 여행을 떠나는데…. (아, 새삼 정훈이 작가님이 존경스럽다.) 시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 슬픈 남자 어른들의 섹스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