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창재] 생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일은 기어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2014-12-03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최성열
다큐멘터리 <목숨> 이창재 감독

엄연히 삶 안에 있는데도 특정한 계기 없이는 잘 감지되지 않는 삶의 진리들이 있으니 그것을 들여다보자고 이창재 감독은 다큐멘터리로 자주 청한다. <사이에서>(2006)는 삶이 껴안고 있는 무속을, <길 위에서>(2012)는 비구니들의 삶으로서의 수행을 그렸다. 그리고 <목숨>에서는 삶의 끝을 만진다. <목숨>은 죽음에 임박한 이들이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곳, 호스피스 병동, 그곳의 사람들을 기록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시작은 8년쯤 전이었다. 무속인을 주인공으로 <사이에서>를 찍고 있을 때였다. 무속인에게 30대쯤 되어 보이는 손님이 찾아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무속인이 점괘는 설명을 제대로 안 해주고 이상한 이야기만 해주더라. “무조건 즐겁고 신나게 생활하라”고 말이다. 손님이 떠난 뒤 물었더니 이렇게 답해주더라. “저 사람은 지금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사실은 이미 명이 끝나 있는 운세다. 몇 개월 더 갈 뿐이고 곧 끝날 것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주겠나. 남은 생을 즐겁게 살라는 말밖에.” 그때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사실을 알고 싶을까, 모르는 게 나을까? 저 사람에게는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만약 내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면 그건 또 어떤 것일까? 그때 삶의 마지막 나날이라는 것에 대해 떠올린 것 같다. 그래서 호스피스 병동에 자원봉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많은 걸 봤다. 그 전날 밝은 모습으로 계셨던 분이 다음날 돌아가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임종의 순간을 처음 보기도 했다. 그런 걸 경험하자 이런 걸 만드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만두고 잊자,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만뒀다.

-그런데 다시 시작했다.

=<길 위에서>를 끝내고 난 뒤에 다음 작품은 뭘 할까 고민 중일 때였다. 친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10분간 면회하는 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손짓만 하다 가는 걸 봤다. 한달 반 뒤에는 형수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두달 사이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뭔가 운명적인 것이 내 멱살을 잡아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풀어야 할 어떤 숙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걸 풀어야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은 제작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단 촬영장소 섭외가 문제였을 것 같다.

=16군데 정도 돌아다녔다. 최종적으로 촬영한 곳은 포천에 있는 모현 호스피스다. 우리나라에 호스피스 개념이 없을 때 이미 생겨서 호스피스의 모델로 자리잡은 유서 깊은곳이다. 촬영하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시더라. 편지도 보내고, 만나기도 하고, 설득하는 과정만 6개월 정도 거쳤다. 지난주 토요일에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수녀님들과 함께 영화를 봤는데 웃으며 그러시더라, 당신 참 운이 좋았던 거라고.

-촬영 대상의 협조를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일단 호스피스에 계신 분들이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된다. 깨어 있어도 의식이 또렷한 시간은 더 짧다. 명료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다섯 시간 정도? 그런데 그 하루의 귀한 시간 중 내가 두 시간 정도를 청했으니 처음에는 너무들 당황스러워하셨다. 그리고 여성 환자들의 경우에는 특히 더 거부감이 심했다. 병환으로 용모가 상했기 때문에 그걸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거다. 촬영을 앞세워 섭외가 된 경우는 한번도 없다. 전부 인간적인 관계들이 맺어지고 나서야 자연스럽게 풀려갔다. 남아 있는 우리에게 보물 지도를 남기는 거라 생각해주시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그 지도를 잘 만들어서 다른 분들이 생의 마지막에 길을 잘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는 그러면 해보겠다고 하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는 어땠나.

=장소와 일상이 단조로워서 힘들었다. 7개의 병실, 12개의 병상을 12개월간 찍었지만… 거의 똑같은 일상이다. 목욕하고, 점심 드시고, 주무시고. 촬영감독도 찍을 게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다고 은유적인 표현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든 생각은, 이분들 내용을 잘 담으면 된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였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많이 차분해지더라.

-반면에 환자가 임종하는 장면을 넣었다.

=그건 내가 꼭 넣고 싶었다. 우리는 방송 등에서 쉽게 탄생의 장면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임종 장면은 그렇지 않다. 그것 역시 우리 삶의 일부인데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른들 사이에서 임종 과정을 지켜보는 건 삶의 일부였다. 지금은 피해야 하는 것이 됐다. 불쾌해서 피해야 하는 것처럼 되었지만 실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다. 탄생과 소멸이 한 사이클인데 한쪽을 폐쇄하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영화로 임종을 한번 체험해봤으면 했다. 가능하기만 하면 나는 세번, 네번, 그런 장면을 더 반복하고 싶었다. 물론 기분이 좋을 순 없다. 이런 상황에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하는지 좌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7~8개월 정도 매일 술을 먹었다. 돌아가신 그분들을 편집실에서 보고 집으로 가는 것이라 매일이 멍하다. 나는 일을 한 것이지만 오늘도 그분들의 임종을 목격한 것이니까. 힘든 시간이다. 하지만 필요했다.

-촬영 중에도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 같다.

=꿈을 꾼 적이있다. 꿈에서는 내가 호스피스의 환자였다. 호스피스 원장님과 수녀님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괜찮지요?” 하면서 등을 두드려주더라. 나도 웃으면서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그들이 가고 나 혼자 방에 남았을 때 눈물이 나더라. “당신들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나는 내일도 안 보이는데.” 너무 화나고 외로웠다. 그러다 깼다. 그 꿈을 촬영 중에 꾸고 나니 느낌이 더 달랐다.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은 인물 중심으로 완성됐다. 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위암으로 돌아가신 박수명님을 촬영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분에 관해서는 내가 감정이입이 심했다. 연배도 비슷하고 친구가 됐기 때문이다. 나와 성격이 많이 닮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분을 통해 내 인생에서 한번도 물어보지 못한 질문들을 스스로 묻고 답하게 됐다. 그분도 나를 통해 당신의 삶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하더라. 삶의 마지막에서야 드디어 삶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하더라. 박수명님 돌아가시는 걸 끝으로 이 영화의 촬영도 끝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걱정하기보다 앞서 떠나간 가족을 그리워하거나 남겨질 가족을 안쓰러워하는 분들이 많았다.

=거기 계신 분들 중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우는 사람은 한명도 못 봤다. 남겨지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만 그들은 어김없이 무너져서 운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이별이 무서운 거다. 그런 걸 보면서 내가 느낀 또 다른 슬픔도 있다. 이곳 분들은 대부분 말기 환자들이어서 극심한 고통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모르핀을 많이 맞는데, 투약 절차가 까다로운 일반 병원의 기준으로 보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그들의 고통이 심하기 때문이다. 모르핀 한방 맞으면 일반적으로 사흘 정도 가는데 하루에 300방 맞는 분도 봤다. 그 정도 되면 보통 사람은 죽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면… 아무리 말기 환자라도 먹고 싶고, 움직이고 싶고, 낫고 싶다. 그런데 모르핀을 맞으면 고통이 감소되면서 그때마다 아주 잠깐이지만 희망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그분들은 내가 혹시 낫지 않을까, 느끼게 된다. 호스피스는 죽음을 준비하는 곳인데 때때로 이렇게 상태가 완화된 것처럼 느끼는 상황이 온다는 것, 하지만 결국 죽음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 이게 내가 그분들을 보며 느낀 또 다른 슬픔이었다.

-그러고 보면 박진우님은 연세가 많으시지만 술도 한잔하고 싶어 하시고 자장면을 먹으러 몰래 병동을 벗어나기도 한다. 카메라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분이기도 하다.

=사실 처음에는 가장 까다로운 분이었다. 수녀님들이 그분 조심하라고 할 정도로. 온갖 의료행위들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여기까지 오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 중 한명이었다. 우리와 만난 지 한열흘쯤 지나면서는 마음이 많이 풀리셨고 영화에 나온 그대로였다. 신창열님도 비슷했다. 후두암 수술로 목소리를 못 내셔서 노트에 글자를 적어 의사소통을 했는데 처음에는 우리가 다가가니까 수첩에다 크게 “취재 거부”라고 쓴 다음 그 위에 가위표를 딱 긋더라. 그러다 나중에는 마음이 많이 녹아서 젊은 신학도인 스테파노와 농담도 주고받고한다.

-그런 변화된 경우가 많았나.

=누구나 다 그런 변화를 겪는 건 아니다. 대개 죽음을 선고받고 나서 부정-타협-우울-수용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가서 보니 이분들은 그 과정을 하루에도 여러 번 겪고 계시더라. 어느 때는 보호자가 밥을 맛있게 먹거나 코를 골고 잠을 자는 것만 봐도 화가 난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 분노는 일반적인거다. 수용이라는 단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분은 거의 못 봤다. 당연하지 싶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감정들의 오르내림이니까.

-환자들에게 벗이 되어주는 젊은 신학도 스테파노가 인상적이다.

=멋진 친구다. 지난 토요일 상영회에도 왔었다. 영화제 때 어느 관객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저 신학생은 혹시 감독인 당신의 페르소나가 아니냐? 뜨끔했다. 이 영화에 관한 한 내가 최대한 감독으로서의 자리를 배제하려 했는데 결국은 저 신학생을 통해 내가 묻고 싶은 걸 묻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에 담고 싶었는데 끝내 못 담은 분이 있나.

=있다. 돌아가신 이성규 감독님이다.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 허락하실까 싶었는데 “내가 똥칠하는 것까지 찍어라” 하시더라. 다큐 감독으로서 자신조차 냉철하게 바라보는 그 강인한 자의식이 놀라웠다. 다른 병원에 계셔서 그쪽으로 갔었는데 촬영 시작 3일 만에 돌아가셨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시기 때문에 찍었지만 넣지 못한 경우가 많다.

-<사이에서> <길 위에서>에 이어지는 작품이다. 창작 과정의 궤라는 면에서 볼 때 어떤 가치를 두고 있나.

=나는 개인적으로 세 작품을 ‘존재의 간극 3부작’이라고 부른다. 존재의 간극에서 나오는 떨림, 불안, 갈등이 내게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사이에서>는 신과 인간을, <길 위에서>는 속과 비속을, <목숨>은 생과 사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 내 오랜 숙제였던 것 같다. 이제는 그 숙제를 다 마쳤으니 다시 사회로 나아갈 때라고 생각하고 있다.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서 그걸 준비 중이다.

이창재 감독은 편집 과정 중 고민했던 한 대목을 들려주었다. 그가 보여준 휴대폰 사진에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는 신창열씨가 있었다. 그는 말기 환자까지는 아니었어도 위독한 후두암 수술을 거쳐 호스피스 병동에 얼마간 위탁되었다가 퇴원한 독거노인이었다. 금방 다시 호스피스 병동의 대상이 될 거라는 말까지 나오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의 암이 없어단다. 하지만 이창재 감독은 힘주어 말한다. “이 사실을 결론부에 넣을까 고민했는데, 넣지 않기로 했다. 호스피스를 기적의 장소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다. 이곳이 진정한 의미의 마음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기는 하지만 몸의 기적을 만드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적으로는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 영화가 그저 말줄임표로 끝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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