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시간은 정말 안온하게 흘렀을까
2014-12-04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보이후드>에서 링클레이터가 의도적으로 지나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짚다
<보이후드>

12년간 동일한 배우들을 데리고 매해 일정한 시간 동안 촬영을 해서 그 인물들의 세월을 함께 살아낸 <보이후드>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인물들의 시간을 내내 공유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여러 인물들의 각기 다른 세계, 그리고 그 세계들의 작지만 지속적인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그중 단 한순간과도 공명하지 못했다고 말할 이가 과연 있을까. 이미 여러 평자들이 이 영화의 무엇이 자신들을 감화시켰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감상기를 제출했다. 아무래도 <보이후드>는 영화비평이 아니라, 보는 이 각자의 기억, 감정,인상을 더욱 환대할 영화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시간의 냉정한 흐름에 대면하는 이 영화의 온기에 충분한 감응을 표현했으니 영화를 보는 동안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고 여전히 얼룩처럼 남겨진 잔상들,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그 느낌에 관해 말해볼 생각이다.

자상하고 친절했던 올리비아의 두 번째 남편, 그러니까 사만다와 메이슨의 첫 번째 양부는 어느새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중독 결벽증자가 되어 있다. 올리비아는 그 사실을 진작 눈치챘음에 틀림 없는데도 또 한번의 결혼 실패를 모면하기 위해 모른 체하는 것 같다. 그사이 사만다와 메이슨, 그리고 이들의 새로운 가족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의붓남매는 아버지의 병적인 잔소리와 폭력에 노출된다. 남자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지고 급기야 가족들이 모여 밥을 먹는 자리에서 아이들을 향한 심각한 위협이 가해지지만, 올리비아는 겁에 질려 저항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두고 사라진다. 그러자 남자는 아이들을 집합시켜 강압적이고 비열하게 올리비아의 행방을 캐묻는다. 영화는 이 숨 막히게 무서운 순간들을 별다른 동요 없이 담담하게 찍는다. 하지만 아무리 영화가 그렇게 찍을 수 있다 해도, 일련의 폭력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유지하는 대체로 무덤덤해 보이는 표정은 당혹스럽다. 그들은 분노도, 두려움도 내지르지 않고, 남자의 거친 요구를 거부하지도 않으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넷이 모여 앉아 방금 전까지 그들을 짓누르던 그 긴장된 공기를 말없이 공유한다. 어른 세계의 소란함에 고요하고 무관심하게 대응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자꾸만 그 속내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이 그새 폭력에 익숙해진 거라고, 혹은 그렇게 해서라도 가정이 또다시 깨지는 걸 막고 싶어 하는 거라고 말하면 될 일인가. 정말 의아한 상황은 이후에 벌어진다. 도망갔던 엄마가 다급히 집 앞에 찾아온다. 그녀는 사만다와 메이슨에게 당장 나오라고 외치며 이 지긋지긋한 남편의 집을 떠나려 한다.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급하게 맨몸으로 집을 나오는데, 그때 계단 위에서 이들의 의붓남매가 이 상황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결코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상처와 불안의 실체

더없이 사이좋은 가족이었던 네 아이의 이별이 이토록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점도 가혹하지만, 어찌되었든 한때는 엄마였을 여자가 자신의 혈육만을 챙기며 나머지 아이들을 폭력에 방치한 채 떠나는 단호함, 그걸 울지도 않고 바라보는 남은 아이들의 미묘한 시선, 엄마에게 서운함을 토로하고 두고 온 남매를 잠시 걱정하지만 금세 다음 일상에 적응하는 사만다와 메이슨의 모습은이 영화의 가장 차갑고 섬뜩한 면이다.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버려진 그 남매를 영화적으로도 버렸을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말하자면 사만다와 메이슨이 그들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잊었을 리 없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재회하게 할 거라는 기대, 혹은 그들이 불쑥 나타나 당시의 상황을 원망할 것이라는 걱정, 혹은 사만다와 메이슨이 당시에 대한 죄의식을 내내 품고 있었을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그 트라우마가 시간이 흘러 드러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그런 일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해의 일은 지나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며 망각 속에 묻혔다. 그날 우리가 본 그들의 모습은 어른들의 선택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생존본능일까, 점점 더 말이 없어지는 메이슨의 변화는 그에 대한 반응일까 내심 예상해보지만, 그렇게 이해하려 애써보다가도 그해, 인물들의 선택, 아니, 영화의 선택에 대한 위로가 될 만한 설명을 듣고 싶은 심정은 변하지 않는다. 링클레이터는 영화 속 인물들, 특히 메이슨의 불안과 상처가 가시화되기 직전 이듬해로 건너뛰고, 그때가 오기까지 인물들이 살아내야 했을 시간을 짐작 속에 묻어두거나 삭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시간 조각을 잇는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이들에게 다음 해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지금 이들을 감싸는 불안과 상처가 또 어떤 식으로 견뎌지고 망각되며 지나갈까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지만 자꾸만 과거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며 저 시간은 정말 지나간 것일까 묻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또다시 엄마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마을로 이사를 온 메이슨은 어느덧 목소리가 굵어지고 제법 청년티가 난다. 그는 지금 동네 형들과 친구들이 모여 있는 낡은 창고에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독 왜소한 몸짓으로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한 친구가 그 자리의 놀림감이 된다. 딱히 폭력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좀 우습고 불량해 보이는 제스처로 무용담을 늘어놓는 동네 형들의 모습, 이들이 그 와중에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합판을 깨고 날카로운 톱니를 벽에 던지는 행동은 어쩐지 불길한 결과를 암시하는 것 같다. 마침내 메이슨을 둘러싼 오랜 불안감이 비극적 사건으로 폭발할 것인가? 10대의 철없는 작은 일탈 행위로 넘어가기에 이 장면의 공기가 예상치 못한 사태를 어딘가 숨기고 있는 듯 위태로워서, 보는 이를 내내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영화는 그 기대(?)를 다행스럽게 좌절시키며 평온한 다음 장면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마치 당신은 10대 소년들의 장르물을 너무 많이 봤군, 이라는 조롱을 던지듯이 말이다.

변하지 않음에 대한 믿음을 지켜내려는 어떤 방식

말하자면 링클레이터는 메이슨을 위태로운 순간들에 던져두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심신이 행여나 다치거나 망가질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든 다음, 별다른 사태 없이 다음해에 이른다. 그리고 다음해의 메이슨은 육체적으로 조금씩 달라져 있지만, 적어도 그의 영혼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라는 안도를 안긴다. 그의 삶에는 세명의 아버지가 있었고, 그는 그중 두명의 양부가 처음의 선한 인상을 손상해가는 과정을 목격했으며, 그런 남자를 선택한 엄마 때문에 늘 한곳에 머무르지 못했지만, 링클레이터는 그가 사춘기의 반항을 내지르는 단 한 장면에도 영화를 할애하지 않는다. 그런 시간을 보여주는 대신, 그는 성장했으나 변질되지 않았다는 믿음을 주는 순간들을 선택한다. 이 영화가 촬영된 12년 동안, 인물들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킬 만한 미국 사회의 정치•경제적인 급박한 상황들을 굳이 연루시키지 않더라도 메이슨의 사적인 환경은 늘 변화에 직면했고 그는 매번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영화는 특정 시간을 건너뛰고 특정 시간을 취하며 자신이 만들어낸 타임라인 안에서 이 소년을 보호하려고 애쓴다는 인상을 준다(좀 다른 맥락에서 말해졌지만, 김혜리 역시 그의 영화가 “오염되지 않은 소년의 시야를 필사적으로 수호”한다고 표현했다(<씨네21> 979호)). 수염이 거뭇거뭇 나고 외형적으로 달라졌어도 그의 본질은 12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어린 메이슨으로부터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아니, 부서지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환상이건 신뢰건 이 영화는 그걸 지켜내는 방식으로 시간을 살아간다. 아니, 구축한다. 조금의 비약이 허락된다면, 이것은 링클레이터식의 21세기, 희망이 희미해져가는 그 땅에서 그가 소년들에게 바라고픈 새로운 아메리칸드림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순간을 붙잡으려는 노력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지나 마침내 <비포 미드나잇>에 이르러 당황스러웠던 건 하룻밤에만 꿈처럼 가능할 법한 그 사랑이 시간이 흘러 망각이 아니라 더 강렬한 현실로 재회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결혼제도로 들어와 있다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둘은 여전히 다정한 연인 같지만, 세번째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그들의 뜨거웠던 관계도 어김없이 시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타인들 앞에서 다정함을 증명해 보이던 그들이 둘만의 호텔방에서 그간 쌓였던 불만과 상처를 터뜨리는 장면, 특히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맨 가슴을 내놓고도 개의치 않고 몇분간을 격렬하게 싸우던 셀린느, 그 모습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며 대응하던 제시의 모습, 무엇보다 그걸 끈질기게 응시하던 카메라는 두눈을 감고 싶을 만큼 날것 그대로의 충격이었다. 앞선 두 영화가 품고 있던 환상이 처참히 날아가버리는 그 장면을 대면하며 링클레이터가 이 시리즈를 마감하는(적어도 나는 마감하기를 바라고 있다) 태도에 울컥 흔들렸다. 그 어떤 온기와 믿음으로 해결되거나 환상으로 가려질 수 없는 시간의 이물감을 그는 결국 방어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후드>에서 링클레이터는 다시 기대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카메라 앞에서 커가는 것”을 보는 기쁨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시간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려는 이 영화는 실은 앞서 말한 것처럼 불안의 제어와 망각의 작동을 전제로 한다. 이 영화는 메이슨과 그의 주변인들이 겪어낸 12년의 시간을 따뜻한온기로 품고 그 시간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종종 인물들, 특히 메이슨이 당면한 일련의 순간들에 냉정히 컷을 외치고, 어쩌면 그의 속내를 충분히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메이슨에게도 분명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지난 12년간 액션보다는 리액션에 익숙한,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음을 일찍이 알았던 소년이 거의 처음으로 액션을 취한 순간은 그가 카메라를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리는 그의 말 대신 그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광경을 점점 더 많이 보게 된다. 영화 안과 밖의 시간이 경계 없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현실 속 배우들과 영화 속 인물들이 뒤섞이는 경험에 이르면서, 이 소년이 거쳐온 시간의 흐름에만 눈길을 빼앗긴 채 정작 내가 놓쳐버렸을지 모르는, 매해 컷된 그 자리마다 여전히 맴돌고 있을 소년의 내면이 비로소 궁금해지는 것이다. 링클레이터가 “카메라 앞에서 커가는” 그의 변화를 감지하며 그 시간의 운동을 즐기는 동안, 메이슨은 그 운동에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순간을 정지시키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직 아무것도 잊지 못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했는데, 그 감정들을 속으로 누르고 해소하지 못한 채 시간의 전환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의 영화적 운명에 그는 그렇게 고요하게 저항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나는 그날 폭력적인 양부에게서 도망치듯 떠나며 의붓남매를 가차없이 버려둘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의 마음에 대해서부터 우선 묻고 싶어진다. 10여년이 흘러 청년이 되었지만, 그날 그 소년의 마음으로부터 당신은 몇 발자국 더 내디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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