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민배우 다카쿠라 겐이 지난 11월10일 악성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살인 다카쿠라 겐은 1931년 후쿠오카현에서 출생했다. 다카쿠라 겐은 메이지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1956년 <전광 공수치기>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2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다카쿠라 겐은 일본인들에게 ‘겐상’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사랑받는 배우였고, 영화배우 최초로 2006년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문화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천태종 스님에게서 받았다는 “가는 길은 정진하고, 끝나면 후회 없다”라는 문장은 다카쿠라 겐이 평생 마음에 새긴 글귀였다고 한다. 선 굵은 남성적인 외모와 강직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알려진 다카쿠라 겐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문장이다. 다카쿠라 겐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1999)과 <호타루>(2001)를 통해서다. 평생을 철도원으로 살다 마지막 순간도 역에서 맞이하는 철도원으로 열연한 <철도원>의 역장, 작은 배를 운영하며 소박한 삶을 사는 어부로 분한 <호타루>에서 다카쿠라 겐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사실 작은 시골 마을 호로마이역에서 평생을 보내는 역장 오토마츠나 작은 배로 양식업을 하는 제2차 세계대전 특공대 출신 어부 야마오카는 비슷한 면이 있는 인물로, 다카쿠라 겐이 아니라면 깊은 내면을 연기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캐릭터다. 오토마츠 역장이나 야마오카는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이지만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들이다. 평생을 한결같이 한자리에서 “신호 OK”를 외치는 오토마츠 역장은 그걸 하느라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아픈 딸을 병원에 데려가지도 못했다. 아내와 딸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울음을 참고 슬픔을 감내하며 다시 또 자기 자리로 향하는 오토마츠 역장은 끝내 역사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후회는 없다”라는 말을 남긴다.
<호타루>의 야마오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를 조종하는 특공대였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인물이다. 사실 그는 사망한 한국인 학도병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으며 지금의 아내는 죽은 학도병의 약혼녀였다. 전사한 동료의 약혼녀와 결혼하여 아이도 낳지 않은 채 어부로 조용한 삶을 사는 야마오카도 표현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다카쿠라 겐은 <철도원> <호타루> 이전에도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과 여러 작품을 같이 했다. <엑기>(1981)도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과 작업한 작품으로 여기서 그는 고독하고 냉철한 형사 역을 맡았다. <엑기>는 훨씬 스타일리시한 액션물이지만 <철도원>을 예비하는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엑기>의 주인공은 여동생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는 남다른 면이 있는 형사로 자신이 잡아야 하는 연쇄살인범의 여동생을 감시하는 그의 표정은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다.
다카쿠라 겐은 젊은 시절 야쿠자 액션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날렵한 근육질의 몸매와 짙은 눈썹을 지닌 다카쿠라 겐은 남성미 넘치는 배우다. 1960년대 유행한 야쿠자 시리즈물 ‘붉은 모란’ 중 <붉은 모란: 여자 야쿠자>(야마시타 고사쿠, 1968), <붉은 모란: 후계자>(오자와 시게히로, 1969) 등에도 출연하는데, <붉은 모란: 여자 야쿠자>에서 다카쿠라는 복수를 꿈꾸는 규슈 최대 야쿠자 가문의 무남독녀를 보호하는 협객으로 등장한다. 말없이 여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다카쿠라의 모습은 여성 팬들이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1960년대 다카쿠라 겐이 출연한 작품들로는 <꽃과 태풍과 갱>(이시이 데루오, 1961), <늑대와 돼지와 인간>(후카사쿠 긴지, 1964), <일본협객전>(마키노 마사히로, 1964), <도쿄 갱 대 홍콩 갱>(이시이 데루오, 1964), <무뢰한>(이시이 데루오, 1964), <아바시리 번외지>(이시이 데루오, 1965), <지옥에선 내일이 없다>(후루하타 야스오, 1966) 등으로 주로 야쿠자 액션물이다. 1970~80년대 대표작으로는 <목숨을 전 무뢰한>(후루하타 야스오, 1970), <행복의 노란 손수건>(야마다 요지, 1977), <남극이야기>(고라하다 고레요시, 1983) 등이 있다.
다카쿠라 겐은 일찍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불타는 전장>(로버트 알드리치, 1970)에서 단역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암흑가의 결투>(시드니 폴락, 1975)에서는 야쿠자 역으로 주연을 맡아 동양적 액션 미학을 보여줬다. 한국 배우 비가 <닌자 어쌔신>(제임스 맥티그, 2009)에서 보여준 것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블랙 레인>(리들리 스콧, 1989) 등 여러 할리우드영화에 출연했다. 중국에서 제작한 <천리주단기>(장이모, 2005)에서는 깊은 부정을 안고 중국으로 떠나는 아버지 역으로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아들과 연을 끊고 지내다 화해의 방법을 찾던 중에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에서 다카쿠라 겐은 아들의 병상을 찾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비애를 소리 없는 눈물로 표현한다. 아들이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어 했던 경극 <천리주단기>를 찍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다카쿠라 겐의 유작은 그와 오랫동안 작업해온 후루야타 야스오 감독의 <당신에게> (2012)로 아직 국내에 개봉되지 않았다. 암 투병 중에도 차기작을 준비했다는 다카쿠라 겐은 평생을 영화와 함께 살아온 영화인이다. 그는 <철도원>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리는 기차”이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역사를 지키는 역장” 그 자체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평생을 오직 영화를 위해 달려온 인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묵직한 남성미로 통쾌한 액션 활극을 펼쳤고 나이 들어서는 깊고 깊은 인생의 맛을 묘사해낸 진짜 배우다. 무언지 알 수 없는 슬픔과 연민이 가득 찬 다카쿠라 겐의 눈빛과 감정이 절제된 그의 표정은 다른 어떤 배우와도 차별되는 오직 그만의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