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피겨 소녀, 달동네 봉자 되다,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의 한채영
2002-03-06
글 : 위정훈
사진 : 오계옥

소녀 시절엔 은반 위의 요정을 꿈꾸었다. 키가 너무 자라 7년 동안 했던 피겨스케이팅을 접었을 때가 고교 1학년 때였으니 연기자의 길은 어린 시절의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연은 언제나 우연과 종이 한장 차이. 8살 때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갔던 한채영은 12년 만인 2000년 여름, 잠시 다니러 왔던 서울에서 인사동 카페 ‘학교종이 땡땡땡’에 갔다가 인연과 조우했다. 개그맨 전유성씨가 사진을 찍어주겠다면서 ‘얼굴에 뭔가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던 것. 연예계에서 일해보자는 섭외를 받았고, 그해 겨울, 미국의 대학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밀리오레, 샤워껌, 에버랜드, 프렌치카페 등 CF와 함께 SBS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뒤바뀐 운명 때문에 은서를 미워하는 신애, SBS 주말 드라마 <아버지와 아들>에서 과수원집 딸 강자 역 등으로 얼굴을 알렸다.

지금 촬영중인 김동원 감독의 80년대풍 코믹액션영화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는 ‘바비인형’ 같다는 소리를 듣는 한채영의 ‘미모’를 한껏 살릴 영화다. 맡은 역은 ‘강북 최고의 미인’ 봉자. 달동네에 살고 있는 청순가련형 미녀로, 오빠 봉팔의 친구인 해적을 한눈에 사랑의 포로로 만들지만, 똥지게를 지던 아버지가 다치자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에 나가기도 하는 고운 마음씨의 소녀다.

사실 한채영의 영화 데뷔작은 2000년 여름을 ‘난도질했던’ 10대 공포영화 중 한편인 <찍히면 죽는다>다. 그러나 한채영은 그 영화에 대해 “기억하지 마세요”라고 딱 자른다. 한국에 온 지 4개월 만에 찍은 영화로, 살도 지금보다 10kg은 쪘고 대사도 억양 하나하나를 외워서 했을 정도로 미숙했던 영화였으니까. 한국에서 일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한국말.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라”라는 뼈아픈 충고를 들으며 대사 전달 연습을 한 날도 있었다. 지금도 대사는 될 때까지 연습한다. 최하 50번, 때로 밤새도록.

촬영 현장의 에피소드 한 토막. 80년대 달동네 풍광을 재현하기 위해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 팀이 택한 촬영지는 난곡 재개발지역이었다. 계절은 한겨울인데, 고지대라 모질게도 바람은 몰아쳤고, 영화 마지막 부분 해적과 디스코를 추는 장면을 찍는데 너무 추웠다. 내복을 몰래 껴입었는데, 감독의 눈을 피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들켜서 혼이 났다. 그렇게 ‘초보’ 배우는 영화를, 연기를 하나씩 배웠다.

“연기는요, 재밌을 줄 알았는데, 재미없어요. 힘들어요.” 가식이라곤 없는 대답을 친구들과 수다떨 듯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다. “<봄날은 간다>가 왜 슬퍼요?” 되묻기도 한다. 1980년생, 00학번. 아직은 무척 ‘젊은’ 한채영은 그렇게 솔직하고 낙천적이다. 겉모습도 취향도 밝다. 우는 드라마는 싫고, 해피엔딩이 좋다. “와이어 액션도 해봤어요.”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 나이트클럽 큰형님의 회상장면에서 삽입된 2시간 정도의 액션연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스물셋, “지금은 젊으니 <툼레이더> <쉬리> 같은 몸을 날리는 액션을 해보고 싶어요. 로맨틱코미디는, 나이가 더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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