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사의 아수라장]
[곡사의 아수라장] 무대 뒤는 없다
2014-12-05
글 : 김곡 (영화감독)
앙드레 바쟁이 보지 못한 미디어 환경 속 역할극 영화
<트루먼 쇼>

소싯적 헤비메탈밴드 백두산의 <주연배우>에서 “인생이란 주연배우…”란 오글거리는 가사를 들었을 때, 난 하염없이 솟아오르는 닭살을 움켜쥐며 피식 비웃었다. 인생이 연극이라는 비유가 얼마나 유치한가를 되뇌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년 후 감독질을 시작하면서, 소싯적 유지해오던 둥글둥글 물탱이 이미지를 탈피하여 근엄한 감독님 이미지를 득템하기 위해 수염을 기르는 나 자신, 즉 ‘캐릭터’ 변화를 꾀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난 깨닫는다. 백두산이 옳았다. 인생은 참도 거짓도 아니고, 당신은 진품도 짝퉁도 아니다. 인생은 연극이고, 당신은 캐릭터이고, 또 주연배우다.

백두산 노래를 미처 듣지 못한 바쟁 흉아는 심히 고민하셨다. 영화는 연극보다 우월한 매체인데, 이를 어찌 입증하나… 라고. 바쟁 흉아가 고민 끝에 결론내리길, 연극은 무대 뒤가 닫혀 있는 반면, 영화는 무대 뒤가 열려 있도다. 매우 명민한 논증이고 결론이었지만, 사실 이는 이론상에서만이다. 나조차도 그의 논증을, 감독질 시작할 때 기른 콧수염으로 이미 논박한 적이 있지 않은가. 내 편은 나뿐만이 아니다. 마치 바쟁 흉아의 논증에 ‘빅엿’이라도 먹이려는 듯이, 연극에 우호적인 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연극을 아예 자신의 테마로 삼는 작가들도 쏟아져나왔다. 그것은 단지 ‘극중극’ 영화와는 구분되는 ‘역할극’ 영화들이다. 초창기의 가장 좋은 예는 아마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롤모델이 되었을 법한) <카게무샤>(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일 것이다. 성주의 대역으로 캐스팅된 주인공은, 성주의 배역을 연기해나가는 와중에, 점점 그에게 동화되어간다. 이 영화의 주요한 긴장감은 그의 연극을 폭로하려고 시시각각 비집고 들어오는 테스트들에 있다. 카게무샤는 성주만 타는 말을 탈 수 있을까? 그의 손자와 첩들과 주치의마저 속이면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이미 마음속 깊이 성주가 되어버린 그가 자신조차 속이고, 그 자신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이 테스트들을 통과해나가기 위해서, 점점 카게무샤는 자신의 배역(실제 성주)에 몰두하게 된다. 어느새 연극처럼 시작한 남의 인생은, 점점 그 자신의 인생이 되어간다. 인생이란 주연배우… 구로사와 백두산.

역할극 영화의 기념비적 작품 <트루먼 쇼>

사실 바쟁 흉아가 그런 무리한 논증을 전개한 것은 그가 생각이 짧아서가 아니다. 그는 아직 TV나 PC 등과 같은 값싼 미디어에 의해서 점점 모듈화되는 현대, 무한경쟁 슬로건 아래 각 분야가 서로를 고립시키며 점점 전문화되는 현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폭증, 그리고 그에 따라 동반상승하는 무사안일과 잉여현상에 의해 방콕문화로 점점 소굴화되는 현대를 못 보고 가셨을 뿐이다(내가 콧수염을 기른 것도 영화판이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할극 영화들의 풍년은 그러한 현대에 찾아왔다. 테크놀로지와 전문화 덕택에, 실제와 사실을 시선의 무대 속에 가둘 수 있게 된 그러한 현대 말이다. 현대 역할극 영화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 <트루먼 쇼>(감독 피터 위어)는 그렇게 태어났다. 주인공 트루먼은 이것이 모두 연출된 무대라는 것을 모른 채 리얼리티 쇼에서 태어나서 리얼리티 쇼를 살아나간다. 그는 무대 위의 주연배우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른다. 결국 그는 -그의 실존에 대해선 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무대제작자들에 대항하여, 무대 바깥을 향한 탈출을 감행한다(아직도 이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높은 추상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자아내니 거참, 놀라운 영화로다). 아마도 이 영화의 작가들(각본이 무려 <가타카>의 앤드루 니콜!)은, 시선의 무대 속에 갇혀 살면서도, 그리고 항상 연출된 채로 살면서도 이를 모르고 살아가는 트루먼이 우리 삶과 비슷하다고 여겼으리라.

<백 투 더 퓨처2>

가엾은 중생들이여! 역할극은 이 시대의 잔혹한 생, 그 자체다. 한편으로는 조작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우리의 의지라고 착각하고 살아내는 이 시대의 생 말이다. 미디어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무대닫기와 소굴고립은 더더욱 시대현상이 된다. 비디오데크가 비디오방이라는, 노래방기계가 노래방이라는, PC가 PC방이라는 고립공간을 연출해낼지, 바쟁 흉아가 알았을 턱이 없지. 그래서 SF영화들은 역할극을 다룬다. 그러나 SF영화가 다루려는 무대는, 단지 PC방의 수준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영혼과 기억을 전이시키거나 바꿔치기하는 무당 수준의 역할극이다. 소싯적에 보았던 <토탈 리콜>(감독 폴 버호벤)은, 아직도 내게 최고의 SF 역할극 영화다. 이 영화는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낯설다…’라는 역할극 영화의 대표적 상황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기억이 가짜였음을 깨닫고 진짜 기억의 이면으로 액션 까며 들어가는 황홀한 전개로 내 눈을 매혹시켰다. 이것만으로 성이 안 찬다면 -SF 선수들이라면 다 아는- 숨은 걸작 <13층>(감독 조세프 루스낵)은 어떨까. 시뮬레이션 기계로 벌어지는 이 황당한 누아르는, 결국 이중의 시뮬레이션, 겹시뮬레이션으로 나아간다. 무대 안에 또 무대가 있는 셈이다. SF영화는 타임머신이라는 개쩌는 설정 덕분에 시간 자체를 무대로 삼을 수도 있다. <매트릭스>와 <인셉션>만 가지곤 아는 척하는 중2병 시네필을 위해서라면, 시간여행의 진정한 걸작 <백 투 더 퓨처2>(주의! <백 투 더 퓨처> 아님!)를 추천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의 실수로 엉망진창이 된 시간계열들을 교통정리하기 위해 <백 투 더 퓨처>의 무대로 되돌아간다. 1편의 자기 자신이 이미 연기를 하고 있는 무대에 살며시 끼어들어, 그들의 연기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그만의 배역을 소화해야 하는 긴장감이란…! 주연배우는 시간을 연기한다….

역할극은 공포영화도 매혹시킨다. 무대에서의 고립감은 공포(자신이 배역임을 알고 있는 경우)와 불안(자신이 배역임을 모르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하긴 시체는 언제나 연출되고 무덤은 언제나 무대인 법이다. 시체 주위엔 항상 관객이 모여들고, 시체는 언제나 이야기(다잉메시지)를 간직하지 않는가. 공포영화의 시초 격인 <프릭스>(감독 토드 브라우닝)는 아예 배역으로부터 태어나는 프릭쇼 기형아들이 주인공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을 걸리지 않기 위해 연기를 하는 순간부터 좀비판도 무대가 된다(<시체강탈자의 침입>, 감독 돈 시겔•필립 카우프먼). 꿈속 무의식 자체가 무대가 될 수도 있다(<나이트메어>, 감독 웨스 크레이븐). 특히 동양 공포영화들은 으레 무대를 다룬다. 빙의나 환생 자체가 이미 배역이고 역할이기 때문이다(나카다 히데오의 <여우령>, 시미즈 다카시의 <환생>). 주연배우는 빙의돼 연기한다.

<바르게 살자>

한국에도 역할극의 전통이 있다. 하녀들과 본부인이 역할을 나누고 실내극을 협연하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들(특히 <충녀> <육식동물> <화녀>)이 그 시초이리라. 남자와 그의 정충을 가지고 노는 두명의 여자, 두 배역이 있다. 그리고 장선우 감독이 있다. 그의 영화들은 모든 것이 연극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영화들(<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쁜 영화>)이고, 심지어 남근을 하나의 배역, 하나의 거짓말로 만들어버리는 마조히즘 역할극이다(<거짓말>, “내 자지를 똥이라고 생각해…”, 대사 개쩔). 이명세 감독의 카툰 무대, 김상진 감독의 난장판 역할교대극은 지면상 생략하자. 현역 중 가장 역할극에 충실한 감독은 단연 장진 감독이다. 그는 <바르게 살자>(감독 라희찬)의 각본만으로도 진정한 역할극 영화제작자다. 교통경찰이 강도 배역을 맡아서 진행되는 모의훈련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제와 거짓의 교착을 이토록 경쾌하고 코믹하게 풀어낼 수 있는 한국 작가는 장진밖에 없다.

전시행정에서 연출행정으로

이 모든 것은 단지 영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의 실제 정치•사회적 상황 역시- 87혁명을 기점으로- ‘전시행정’에서 ‘연출행정’으로 바뀌어 오지 않았나. 이러저러한 기술적, 정치적 발전으로 인해 무대 뒤란 것이 없어졌으므로, 더이상 사람들을 무대 앞의 관객으로 남겨놓는 것만으로는, 그래서 ‘팩트’와 ‘근거’를 무대 뒤로 은폐하는 것만으로는, 뻥카가 안 먹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대국민 연출작으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금강산 댐이다. 최근 가장 대범한(그러나 동시에 가장 어설픈) 연출은 유우성, 이석기 간첩 사건이다. 옛날엔 간첩 시체만 ‘전시’하면 끝이었지만, 이제는 간첩을 산 채로 ‘연출’해야 한다(국정원과 법무부는 최근 가장 열정적인 역할극 연출자다). 역할극 영화들의 교훈에 따라서라도, 이제 더이상 무대 뒤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 무대에 하나의 배역으로서 참여하고, 더이상 근거와 팩트를 가지고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일베의 폭식투쟁 퍼포먼스를 어떤 근거로 논박할 것인가? 연기자들의 연기력은 팩트와 근거로 논박할 수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배역, 또 다른 역할로, 그것도 무대 위에서 압도할 수 있을 뿐이다. 더이상 관건은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다. 이제 관건은 ‘무대 안(배우)이냐 무대 밖(관객)이냐’, 나아가 ‘무대 중심(주연배우)이냐 무대 주변(조•단역, 엑스트라)이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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