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물리학도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응수하는 여자. 신을 믿지 않는 남자와 영국 국교회를 믿는 여자. 커피잔 속에 스며들어가는 우유의 움직임을 보며 우주의 시작을 고민하는 남자와 누군가가 쓴 글을 보며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여자.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두 주인공, 스티븐 호킹(에디 레드메인)과 제인 와일드(펠리시티 존스)가 사랑에 빠질 확률은 화성과 금성이 충돌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수많은 불가능의 확률을 뚫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이 두 연인이 만들어낸 사랑의 우주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스티븐 호킹을 연기하는 영국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이 거대한 우주의 한축이다. 케임브리지의 전도유망한 천재 물리학도였던 호킹은 어느 날 갑자기 교정에서 쓰러진 뒤 루게릭병에 걸려 앞으로 살날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듣는다. 그러나 그의 오랜 관심사였던 ‘시간’은 그에게 기나긴 삶을 허하는 대신 신체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잃어가는 고통을 준다. 떨리는 손으로 칠판에 물리학 공식을 적어내려가던 청년은 언제부터인가 두손을 쓸 수 없게 되었고, 목발에 다리를 의존하게 되었으며,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가게 된 뒤 결국엔 목소리마저 잃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호킹이 감내해야 했던 건 사랑하는 아내가 투병 중인 자신과 함께한다는 이유로 점점 더 수척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심지어 사랑조차 변질시켜버리는 ‘시간’을 견디는 법. 어쩌면 스티븐 호킹에게 ‘시간’은 물리학도로서 오랜 연구 주제이자 인간으로서 돌파해야 했던 지상 최대의 난제였을지도 모른다. 에디 레드메인은 이처럼 평생 시간에 맞서온 한 남자의 일대기를 놀랍도록 섬세하게 구현해냈고, 영미권 평단은 그를 현재 2015년 오스카 남우주연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 중 하나로 점치고 있다. “이건 명백한 레드메인의 영화다. 그의 연기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의 신체적인 변화는 놀라운 설득력을 보여주며, (호킹의) 고통을 체감하게 하고, 따뜻하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도 않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텔레그래프>)
당연하게도 에디 레드메인에게 쏟아지는 최초의 찬사는 루게릭병을 앓는 스티븐 호킹의 육체적 변화 과정에 대한 해석이다. 비스듬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고개와 근육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듯 흐느적거리는 손과 발. 스티븐 호킹으로 분한 레드메인은 종종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루게릭병을 앓는 이의 초상을 리얼하게 담아낸다. 캐릭터에 대한 평균 이상의 연구과정과 정신적인 혹사가 담보되어야 하는 이 역할을 위한 배우의 헌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촬영에 돌입하기 전, 제작진으로부터 넉달 동안의 준비기간을 허락받은 에디 레드메인은 스티븐 호킹에 대한 논문과 다큐멘터리, 유튜브 영상을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호킹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루게릭병을 앓는 환자들과 안무가의 도움을 받았다.
“펜을 줍는 것, 걷는 것, 무언가를 마시는 것…. 한마디로 스티븐 호킹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연구했다.” <월드워Z>에서 좀비들의 움직임을 감독한 안무가 알렉스 레이놀즈는 레드 메인과 하루에 네 시간씩 함께 작업하며 그의 움직임을 아이패드로 촬영했고, 레드메인은 “골반의 위치부터 머리를 드는 것까지” 루게릭병을 앓는 환자의 몸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자세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촬영이 시간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에게 또 다른 도전과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루게릭병의 진행 과정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레벨’ 차트를 만든 에디 레드메인에 대해 시나리오작가 매카튼은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장면을 촬영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이건 말하기 능력은 레벨4이고, 운동 능력은 레벨3겠네요.’ (중략) 그 다음 날은 10년 후의 레벨인 말하기 능력 레벨2, 운동 능력 레벨7,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바꿔가며 촬영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그의 재능과 능력 전부를 쏟아부어야 하는 나날이었다.”
사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배우에게 양날의 칼이다. 성공적으로 연기해낸다면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지만, 범상치 않은 역할 자체에 배우가 매몰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에디 레드메인이 이뤄낸 진정한 성취는 신체가 아니라 감정 연기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제임스 마시 감독은 스티븐 호킹 역에 레드메인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그가 호킹이 지닌 특유의 수줍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호킹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시간이 유일하게 변화시키지 못한 건 장난기 가득한 스티븐 호킹의 눈빛과 소년다운 미소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원작이 된 자서전 <영원을 향한 여정: 스티븐과 함께한 시절>(호킹의 전 부인 제인 와일드가 그 저자다.-편집자)의 한 구절, “스티븐이 얼마나 표현력이 강한 눈썹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제인 와일드의 언급 때문에 거울 앞에서 몇 달을 보냈다고 에디 레드메인은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본래부터 영원히 완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미완의 아름다움을 지닌 배우다.
제멋대로 난 주근깨와 묵직하지 않은 목소리, 가늘고 기다란 몸과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는 서른세살의 이 영국 배우에게 종종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아이의 이미지를 덧씌우곤 한다. 희대의 섹스심벌이었던 마릴린 먼로에게 매료된 할리우드 촬영 현장의 조감독(<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어머니와 금기의 사랑에 빠지는 미국 상류층 집안의 자제(<새비지 그레이스>), 전쟁 중에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순정을 바치는 열혈 청년(<레 미제라블>)은 배우로서 에디 레드메인의 입지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스티븐 호킹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영원한 낙천주의자”라는 영화의 제작자 리사 브루스의 표현대로 에디 레드메인이 분한 스티븐 호킹은 어떤 상황에서든 위트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에서, 레드메인이 지닌 청춘의 이미지는 이성으로 점철되었을 거라 짐작되던 한 과학자를 감성적인 존재로 인지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생각해보라. 파티장에서 춤을 추기는커녕 조명에 반사되는 와이셔츠의 형광물질에 더 관심을 가지는 남자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건 아무 배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에디 레드메인은 스티븐 호킹과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케임브리지 동문이라는 사실이다. 호킹과 같은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레드메인은 또한 영국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이튼 칼리지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의 배우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뒤 <염소 혹은 누가 실비아인가?>라는 연극 무대에 올라 이브닝 스탠더드 신인상과 비평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전통의 연극무대를 거쳐 브라운관과 스크린으로 진출하는, 뭇 영국 배우들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 알려왔지만 배역만큼은 파격의 선택을 거듭해왔다. <새비지 그레이스>의 근친상간과 그가 소아성애자로 분했던 <힉>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건 에디 레드메인이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도 할리우드와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나에게 다양한 역할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영국에선 시대극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중요한 기반인데, 미국에서는 영국인으로서의 모든 정체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당신, 인디언을 연기하고 싶어요? 그럼 오디션 한번 보죠. 안 될 게 뭐 있어요?’ 이게 할리우드가 일하는 방식이니까.” 그런 그의 차기작은 워쇼스키 남매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주피터 어센딩>이다. 주피터를 위협하는 섹시하고 손톱 긴 악당이란다.
magic hour
고마워, 고마워
에디 레드메인이 직접 밝히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예상외로 너무나 일상적인 장면이다. “그건 우리가 촬영한 마지막 신이었다. (중략) 호킹과 제인이 침대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는데 대본에는 어떤 대사도 없었다. 그래서 우린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야 했다. 제인을 연기한 펠리시티 존스가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마워.’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그래서 나는 다시 말했다. ‘고마워.’ 그 장면은 나에게 삶과 예술이 마주한 무척 기묘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