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이 ‘애엄마’가 됐다. 딸 하루의 엄마가 되고 5년 만에 영화계로 돌아온 강혜정은 한결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졌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되바라진 눈빛을 쏘는 대신 생글생글 미소에 말끝마다 아이 얘기가 따라붙는다. 혹시 한국영화가 예민하고 힘 있는 여배우 하나를 잃은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해졌다. “까놓고 말씀드릴까요. 멋모르는 얘기죠.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게 변하나요. 하루가 지금은 풍선을 잘 못 불지만 제 나이가 되면 터지기 직전까지 풍선 부는 법을 알게 될 거예요. 어떻게 불어야 불 줄 모르는 사람처럼 부는지도 알게 될 거고요. 저는 풍선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통제능력이 생긴 거예요. 예전의 제게서 보셨던 예민함과 우울함은 여전히 죽지 않았어요. 다만 지금은 그걸 내보일 타이밍이 아닌 것뿐이죠.” 영영 잃어버린 것인지, 잠시 숨겨둔 것인지는 앞으로의 그녀를 지켜보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됐든 지금 강혜정은 첫 엄마 역인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물정 모르는 정현과 연극 <리타>의 맹한 미용사 리타를 데리고 돌아왔다. 둘 다 강혜정의 생기를 먹고 자란 건강하고 예쁜 캐릭터다.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철부지들은 당연스레 관객을 매료한다. 순진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일과 삶 모두를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 고수, 강혜정처럼.
-5년 만에 본격적인 극영화로 돌아온 거다. 무척 반갑다.
=(기자가 준 명함에 적힌 사무실 주소를 보더니) 그나저나 상수동으로는 언제 이사했나. 나도 상수동 사는데! 예전에 <씨네21> 근처에 전 파는 집이 있지 않았나. 너무 맛있어서 내가 밤마다 그 전을 먹고 (살찔까봐) 잠을 못 이뤘다. (웃음)
-영화를 오래 쉬어서 모를 법도 하다. 상수동으로 이사오기 전엔 충무로에 있었다.
=그랬나. 아무튼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한 거라 의도치 않은 긴장감이 엄청 생겼다. 정현이란 캐릭터를 분석해 연기하는 데에도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매 신 찍을 때마다 체크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런데 김성호 감독님은 애들 얘기만 계속 하시는 거다. 떼썼다. 감독님 옆에 딱 붙어서 나 좀 봐달라고, 내가 잘하고 있는 거냐고. (웃음)
-데뷔 이후 처음으로 엄마 역을 맡은 건데, 실제로도 딸을 둔 엄마다.
=덕분에 접근이 수월하긴 했다. 아이 나이는 다르지만 나 역시 아이 엄마고, 누군가의 아내이고, 정현처럼 밝은 성격을 가졌으니까. 내가 다 겪고 있는 거라 이입이 어렵진 않았다.
-아직도 하루만 한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외모인데, 김성호 감독은 “애엄마로만 보고” 역할을 제안했다고.
=아이 엄마로 출연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은 없었다. 실제로 애 엄만데? 그런데 그동안은 아무도 날 애엄마로 봐주지 않았다. 김성호 감독님만이 나를 ‘애엄마 취급’하는 데 성공하신 거다. (웃음) 배우로서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 같아 좋다. 연륜이 쌓이고, 삶의 환경이 달라지다보면 엄마도 할 수 있고, 할머니도 할 수 있는 거지.
-김성호 감독에게도 지소(이레) 또래의 딸이 있는데, 딸 가진 부모로서 서로 정보 공유도 많이 했겠다.
=특히 아이들 나이 얘길 많이 나눴는데, 아홉살과 열살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시더라. 열살이 되면 정치를 해도 될 정도로 주관이 뚜렷해진다면서. 헤드라이트를 쓰고 있다든가 하는, 봉고차에서 생활하는 신의 디테일도 대부분 감독님 머릿속에서 나왔다. 텐트 같은 거 쳐놓고 딸들이랑 그렇게 노신 것 같다.
-오랫동안 남편이 선물한 구두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정현은 서툴지만 꿋꿋하게 아이들을 기르는 낙천적인 엄마다. 아이들 장면이 대부분이라 영화에 드러나지 않은 어른 캐릭터들의 전사(前史)도 궁금하더라.
=아마 정현은 지소를 고급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환경에 놓여 있었을 거다. 지소가 “엄마가 요리해준 적 한번도 없잖아!”라고 하지 않나. 부유하기도 해서겠지만 엄마로서의 책임감이 좀 결여된 인물이기도 하다. 마냥 친구 같기만하다. 그러니 지소가 무시하는 거지. 남편이 화려한 구두를 선물한 걸 보면 겉모습 꾸미는 걸 좋아했을 거다. 그런데 차압 딱지 붙으면서 한순간에 다 뺏기고 부랴부랴 급한 세간만 챙겨 나왔겠지.
-이레와 호흡을 맞추는 동안 하루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기도 했나.
=이레는 하루보다 몇살 많다. 아이들은 한두살이 꽤 차이가 나는데 이레에 비하면 하루는 아직도 바보고, 아기다. 이레를 하루 다루듯 하면 ‘이 아줌마 왜 이래?’라고 생각할까봐 좀더 어른스럽게 대했다. 이레는 정말 똑똑하고 의젓한 아이다. 현장에서도 이레가 먼저 나랑 친해지려고 엄청 노력했다. 애가 먼저 그러기 쉽지 않은데 놀라웠다. “엄마니까 이제부터 제가 말을 놓을게요” 하더니 며칠 반말하다가 어색해하면서 다시 존대를 하더라. 뻔뻔함은 아직 좀 부족한 것 같다. (웃음) 정현이 지소한테 “엄만 너 없으면 죽어”라고 울면서 소리치는 장면에선 실제로 엄마인 게 도움이 됐다. 나도 애가 있어서 그 감정이 이해가 되는 거지.
-그래서인지 지소와 정현이 싸워대는 장면들은 퍽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이레는 엄마랑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고 이레 어머니도 이레에게 큰소리를 내본 적이 없으시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엄마와 딸의 애증 섞인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화내는 모습을 이레가 진짜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입진 않을까. 그런데 막상 촬영 들어가니 한마디도 안 지더라. 내공이 탄탄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내가 에너지가 약한 배우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기가 안 죽더라고. 캐릭터에 엄청나게 몰입하고 있구나, 내가 괜히 걱정했구나 생각이 들더라.
-하루와도 그렇게 다투나.
=하루는 나랑 잘 안 싸우려는 편인데 싸우다보면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끝난다. 잔뜩 진지하게 혼자 화나 있는 게 너무 귀엽다. 물론 아이 기분을 생각해서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그런데 가끔 아이가 허를 찌르는 소리를 한다. 훅이 있달까. 얼마 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가 잘 먹는 시리얼이 있는데 시리얼 이름이 뭐냐고 묻기에 그냥 시리얼이라고 했더니 화를 냈다. 뭐라고 했는지 아나? “하루는 그럼 ‘사람’이야? 엄마는 하루 이름을 ‘사람’으로 지었어? 하루는 하루잖아. 얘도 이름이 있을 거 아냐!” (웃음)
-아이를 키우는 동안엔 놀라운 순간이 참 많다. 현장에서도 어린이 배우들에게 감탄한 점이 있나.
=어린이 배우여도 책임감이 굉장히 강하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과 자기 직업, 자기의 배역을 굉장히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현장에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세팅한다고 장비 세워놓고, 조명 치고, 돌리 까는 동안 성인 배우도 가만히 서 있기는 힘들지 않나. 보통 의자 갖고 와서 앉거나 잠깐 빠져 있곤 하는데, 이레는 조금도 안 움직이고 자기가 서 있을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거다. 우리가 이리 와서 앉아있으라고 해도 안 듣는다. 자기가 다른 데 앉으면 (스탭)삼촌들이 다시 일해야 될까봐 못 앉겠다고 하더라. 결국 카메라감독님, 조명감독님이 괜찮다고 한 뒤에야 앉았다. 몸만 어린이일 뿐이지, 그냥 프로페셔널한 배우구나 생각했다. (홍)은택이도 평소엔 나에게 딱 붙어서 종알종알 떠들다가도 슛 들어가면 단박에 과묵한 지석이로 변신하더라.
-12월 초부터 공효진과 연극 <리타>도 함께하고 있다. 26살의 무식한 미용사 리타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며 새 삶을 개척한다는 내용이다.
=(공)효진 언니의 권유로 참여했다. 효진 언니가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데 나에게 연락하셔서는 “너도 그렇지 않니. 함께 작품해보자”고 하셨다. 나는 언니가 하면 하겠다고 하고, 언니는 내가 하면 하겠다고 해서 (극단 수현재컴퍼니의 대표인) 조재현 선배님이 조금 초조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웃음) 언니가 무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부딪쳐보는 것도 배우로서 배울 게 많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리타는 특유의 열정과 순수함으로 프랭크 교수를 감화시키며 성장하는 캐릭터다.
=맹해서 사랑스럽다. 사적인 자리에서 보면 “쟤 누가 데려왔니?” 소리 나오기 딱 좋은 인물이긴 해도.(웃음)
-처음 도전한 무대연기다.
=사고치지 않을까, 실수하지 않을까, 너무 불안했고 앞으로도 불안할 거다. 무대에선 NG가, 편집이 없지 않나. 실수가 용납이 안 되는 곳이다. 영화 스탭은 나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연극 보러온 관객은 아니다. 관객이 나에게 내준 시간과 금액을 헛되이 할 수는 없잖나.
-무대의 관객은 영화 관객과는 접근방식이 다른 것 같다. 어쩌다 한번 본 연극이 나쁘면 다신 연극 보러 안 오는 관객도 많다고 어느 연극배우가 말하더라.
=동감한다. 내가 그런 관객이었거든. 용돈 꾸준히 모아서 분기마다 자기한테 선물 주듯 연극 보는 관객도 있고, 먹을 거 안 먹고 살 거 안 사고 보러오는 관객도 있더라. 그렇다보니 정신을 ‘빡’ 차리게 된다. “막상 보니 재밌네요!” 하는 소리가 듣고 싶다. 아직도 <리타> 공연이 한달 반이나 남았는데 매일이 너무 두렵다. (웃음)
-이번에야말로 하루에게 출연 영화를 보여줄 수 있겠다.
=강아지 나오지, 아는 언니 오빠들(이레, 이지원, 홍은택) 나오지, 엄마 나오지, 하루도 무척 좋아할 거다. 그런데 하루가 극장에서 진득하게 앉아 있었던 영화가 <겨울왕국>밖에 없다. (웃음) 다른 관객에게 폐 끼칠까봐 불안하다. 아니면 저기 왜 자기는 없냐고 속상해할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아빠(타블로)가 TV 나오는 건 좋아하는데 엄마가 작품에 나오는 건 안 좋아한다. 연기를 하다보니까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데 이질감을 느껴서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 시간에 자기랑 같이 있지 않았던 게 불만인 것 같기도 하고.
-하루가 있으니 앞으로 작품 고르는 데도 영향이 있겠다.
=그렇긴 할 거다. 그래도 나는 중학생부터 30대까지 다 소화 가능한 사람이란 걸 알아주면 좋겠다! (웃음) 나이를 먹고, 경험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걸 반기고 있다. 하지만 철드는 건 아직도 싫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