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액트 오브 킬링>의 충격은 어디서 오는 걸까.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일까? 학살자들의 상상하기 힘든 뻔뻔스러움, 혹은 그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한 나라의 지배자라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 다큐멘터리의 표현과 형식의 기괴함 때문일까? 아마도 그 모두 때문일 것이다. 이 다큐를 말하면서 100만명의 고통과 죽음, 학살자들의 가공할 만한 그리고 변치 않은 잔인성을 괄호 안에 넣는 것은 정당화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괄호를 푸는 순간, 이 작품을 평자로서 말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 사실들 앞에서 평자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말문을 막는 것이 사건 자체의 악마성뿐인가. 달리 말해 현실의 과도한 끔찍함이 비평이라는 행위를 하찮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뿐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충격의 또 다른 진원은 학살자들의 말이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한다. 진담과 궤변, 허언과 농담, 반성과 정당화, 과장과 위장의 말들을 끝없이 쏟아낸다. 그 말들을 계속 듣다보면 어느 순간 귀를 막고 싶어진다. 그 말들이 끔찍한 사건을 표상해서가 아니라, 말의 근본적 능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요컨대, 평자에게 가해진 <액트 오브 킬링>의 진정한 충격 한 가지는 비평 행위가 가장 깊은 층위에서 전제하고 있는 말의 표현과 소통 능력이 완전히 유린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있다.
많은 평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떠올린 건 자연스런 일이다. 아렌트는 나치 친위대 지휘관 아돌프 아이히만의 1961년 재판과 심문기록을 지켜본 뒤, 홀로코스트라는 악마적 사건의 실행자들에게서 악마적 동기를 발견할 수 없으며 그들이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라는 난처한 사태에 직면해, 이 표현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말하는 ‘평범성’의 의미는 생각만큼 평범하지 않다.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전혀 없는’ 등이 이 ‘평범성’의 성분들이다. 우리말에서 ‘평범’의 뉘앙스는 이런 점까지 담지 못한다. 아렌트가 평범성에 악마성이 내재한다는(혹은 그 역이라는) 정신분석학적 교훈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니다. 최악의 잔혹 행위를 저지른 인간이 ‘숭고한 악마’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비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현실 앞에서, ‘평범성’이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렌트의 논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아이히만이 괴물도 거짓말쟁이도 아니며, 단지 ‘상투어에 둘러싸인 사람’이라는 관찰이다. 아이히만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상투어들이 어떤 모순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사고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나는 지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로 기쁘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고 말한 다음 “내가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 “운명이 내게 부여한 얼마 안 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아렌트의 요점은 이렇다.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 말을 함께 기억해두고 싶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재능.’ <액트 오브 킬링>에서 우리의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것도 학살자들의 이런 재능일 것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영리해 보이는 아디줄카르디는 “사람을 죽이는 건 가장 잔인한 범죄다. 그러니 구실을 찾아야 한다. 충분한 보상 같은 것 말이다. 어차피 도덕관념은 상대적이다. 죄를 물으려면 카인에게부터 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또한 “내 아버지가 공산당원이었고 살해당했으면 난 분노했을 것”이라고 말한 다음, “진실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신에게도 비밀은 있을 것이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아디는 아이히만보다 더 매끄럽고 윤기나는 말을 재빨리 찾아낸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같다. 누구도 그와 대화할 수 없다. 언제나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
불길한 예감은 이것이다. 우리 역시 그러한 말들에 둘러싸여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때보다 더 많고 세련된 상투어들로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의 말들은 학살자들의 시대보다 더 타락하지 않았는가.
2.
우리의 말문을 더 깊이 막는 건 요염하고 사악한 말들과 ‘영화’의 연루다. <액트 오브 킬링>에는 여러 영화가 있다. 학살자 안와르 콩고의 기억 속에 있는 할리우드영화가 있고, 그를 안심시켜준 인도네시아 정부의 반공선전영화가 있으며, 그가 지금 배우가 되어 만드는 영화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가 있다. 앞의 두 부류의 영화는 우리가 많이 봐왔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보기 전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한 건 뒤의 두 영화다. 이 모두가 영화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토록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나 한 걸까.
<액트 오브 킬링>에 관한 정지영 감독과 김민웅 교수의 공개 대담(아트하우스 모모, 11월27일)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정지영 감독: 안와르를 보면서 제가 예전에 찍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란 작품을 떠올렸어요. 안와르는 완전히 할리우드영화 중독자예요. 할리우드영화에서 본 것처럼 어떤 장면에서는 서부극 흉내를 내고, 어떤 장면은 공포영화 흉내를 내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죠.
김민웅 교수: 특히 이 사람이 모델로 삼는 영화는 존 웨인이 등장하는 서부영화잖아요. 서부 개척사로 미화되는 영화들. 그리고 (안와르가) 존 웨인 역할을 스스로 하잖아요, 복장도 그렇게 입고요. 그러다 보니 폭력이 굉장히 멋있게 그려지죠. 그걸 보면서 느낀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이고요. 다른 하나는 그 작업을 하면서 영화 속 주인공이 되려 하는 환상이에요.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뽑는 장면을 멋있게 연출한다든가 해서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미화시키잖아요. 이런 것들이 안와르의 폭력을 보다 더 세밀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정지영 감독: 유럽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영화를 비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할리우드영화는 포르노그래피를 섹시함으로, 폭력을 정의로 포장해서 파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도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서 잘 아시겠지만, 어느새 우리도 폭력을 잔인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 근사하게 느끼곤 하잖아요. 그게 바로 할리우드의 전략이에요. 그러다 보니 안와르 같은 인물이 탄생한 거죠.」
존중받는 영화감독과 인문학자의 이 단호한 말들은 우리를 멈칫하게 만든다. 안와르 콩고. 50년 전에 벌어진 학살의 집행자 가운데 한 사람. 약간 어둡지만 인자한 인상의 이 평범한 노인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100명의 생을 박탈한 살인마로 만든 주요인이 할리우드영화이고 서부극이고 존 웨인이라는 말일까.
할리우드-서부극-존 웨인에 대한 도덕적 규탄에, 그 규탄 대상으로는 존 웨인의 시대가 아닌 오늘의 주류 할리우드영화 혹은 주류 한국영화가 더 걸맞다 해도, ‘다 그런 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건 새삼스런 짓일 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예증과 반증을 반복할, 폭력적 영화가 폭력성을 낳는다는 심리학적 가설에 새삼스레 맞서는 것도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학살 사건을 말하면서 할리우드영화를 주요한 원인의 자리에 두는 인과론은 너무 안이한 발상 아닐까. 이들이 할리우드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 인과론은 안와르 콩고의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극장 암표상이었지만,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가난해지기 싫었다.” “알 파치노를 좋아했다. 존 웨인이 나오는 영화도 좋아했다.” “영화를 보고 살인 방법을 배웠다. 갱영화에서는 철사로 목 졸라 죽이고 시체를 던져버린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려는 듯 학살 경험을 서부극과 갱스터, 공포영화의 양식으로 재연한다. 하지만 1970년대(일찍 잡아도 1960년대 후반)의 갱영화에나 등장하는 장면을 근거로 1965년에 저지른 자신의 살인을 설명하는 그의 말을 우리는 믿어야 할까. 다른 장면에서 안와르는 “어떤 영화도 우리가 한 것만큼 잔인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학살자의 말들을 사건의 진상에 관한 증언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는’ 상투어들의 조합이라고 봐야 한다. 일관성이 완전히 부재한 그들의 증언으로 작성된 할리우드 기소장 역시 상투어에 지나지 않는다. 궁금증은 오히려 이것이다. 그 상투어들이 왜 영화라는 것의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가. 그들에게 영화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3.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학살자들이 자신의 살인 경험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혐오스런 말들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살자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극영화로 만들면서 주연배우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 스스로 허구의 재연드라마를 만드는 과정, 만들어진 장면들, 그리고 그들의 증언들이 이 다큐멘터리에 병렬된다. 왜 증언만이 아니라 허구가 필요했을까. 감독의 변은 이렇다. “<액트 오브 킬링>은 현실 도피의 끔찍한 결과, 저지른 일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들의 끔찍한 결과에 대한 영화이다… 하나의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거짓말은 실패하고, 균열이 생기고, 말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과거가 난입한다.”(<씨네21> 981호)
거짓말이 실패하는 순간 번득이는 끔찍한 진실. 그것을 위해 허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감독의 이 유려한 자기논평은 그러나 선뜻 수긍하기 힘들다. 학살자들의 거짓말이 실패하는 것은 ‘거짓의 역량’ 혹은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허구의 시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이며 서투른 초보 작가-감독-배우이기 때문이 아닐까. 오펜하이머는 그들의 연기 장면이 점차 다큐멘터리에서 비극적 오페라로 변해가는데 그럴수록 “더 힘 있고 더 무섭고 더 아름답게” 나타나며 “우리는 안와르의 악몽 속에서 길을 잃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건 남루한 세트와 조잡한 대사와 서투른 연기이며,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열의와 자신의 악마적 행위를 영화적으로 수식할 수 없는 그들의 무능력 사이의 기괴하고도 처연한 간극일 뿐 아닌가. 이 간극은 최선의 경우에조차 에드 우드의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한 연민 혹은 도착적 비애감을 자아낼 뿐 아닌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학살자들이 만든 장면들이 거짓말에 실패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악몽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안와르 콩고라는 인물은 “피할 수 없는 죄책감에서 탈출하기 위한 인공물인 허구 드라마를 통해 자신이 한 짓의 진정한 의미를 맞닥뜨렸다”고 근사하게 표현한다. 내 생각은 반대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오인하고 있는 것 같다. 안와르는 거짓말에 실패한 게 아니라 악몽의 표현에 실패했다.
감독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끔찍하지 않은가. 1천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40여년을 더 산 사람,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동료와 함께 방송에 나가 “우리가 그들을 몰살시켰기 때문에 복수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고 떠드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위엄을 부여하기 위해 시도한 허구가 실패하고 악몽으로 변함으로써 진실에 이르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역겹지 않은가. 처음부터 돈 때문에 거짓 죄목으로 학살을 저질렀다고 순순히 말하는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진실이 달리 있기라도 한 걸까.
다행스럽게도 <액트 오브 킬링>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악몽이라고 가정된 장면들은 그저 조잡하고 천박하며 추할 따름이다. 2시간40분간 전시되는 그들의 말과 행동과 창작의 시도가 보여주는 건 어떻게 해도 자신들이 잔인하고 어리석고 천한 존재들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안와르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다. 나는 그 전적인 실패에 이 다큐멘터리의 특별함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범죄-죄의식-악몽-진실과의 대면’이야말로 상투형이며, <액트 오브 킬링>은 이 상투형조차 실패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학살자들은 특히 안와르는 자신들의 잔인성과 무능력을 동시에 드러내는 영화 만들기에 이토록 몰두하는가. 앞서 인용한 대담에서 김민웅 교수는 그 동기를 “영화 속 주인공이 되려 하는 환상”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환상이 안와르가 할리우드 키드이기 때문에 생긴 걸까. 그렇게 단순하진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안와르가 동료들과는 달리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재능’조차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그 재능의 빈자리에 불려나오는 대체물이다. 영화에서 그가 보는 건 서사가 아니라 오직 행위의 강력함이다. 그가 영화 만들기에 몰두한 건 그저 강력한 행위자로 보여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패했다.
이 실패에 두 결말이 뒤따른다. 첫 결말은 안와르가 100명을 죽인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 격렬한 구역질을 반복하며 옛일을 다시 회상하는 장면이다. 그는 “양심에 따라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만 고통스러운 구역질은 그가 시도한 허구의 실패가 결국 진실과의 대면으로 이어진다는 오펜하이머 감독의 생각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감독은 이렇게 끝맺지 않았다. 영화 전체의 결말은 따로 있다. 프롤로그에 나왔던 기괴한 세팅이 다시 등장한다. 호수와 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모형 물고기가 프레임의 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 물고기 입에서 여자 무용수들이 민속춤을 추며 걸어 나온다. 이 익스트림 롱숏에서 안와르로 보이는 검은 옷의 신사가 무용수를 맞아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결말은 비상하고 강력하다. 이 숏이 안와르의 환상인지 감독의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학살자들의 잔인하고 어리석은 상투어들보다 그리고 안와르의 실패한 허구들보다 이 환상 장면이 더욱 강렬한 실재감을 전한다는 것이다. 불길한 형상의 먹구름, 더없이 아름답고 고요한 산과 호수, 괴물에 가까운 모형 물고기의 흉포하게 벌어진 입, 미물 같은 인간들의 태평스럽고도 초라한 춤…. 이 장면은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려 한 사건과 상황과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도 정돈하고 이름붙이기를 거부하는 몸짓이며 오직 그들과의 대면이 남긴 불길하고 섬뜩한 잔상으로 보인다. 대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가 이토록 강렬한 표현주의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우리가 보지 못한 다큐멘터리다.
후기)<액트 오브 킬링>은 여러 이유로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새로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