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오! 마돈나]
[한창호의 오! 마돈나] 신데렐라에서 선행의 천사까지
2015-01-09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오드리 햅번 Audrey Hepburn

<로마의 휴일>(1953)이 전세계적인 히트작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잘해야 할리우드의 고전인 <어느 날 밤에 생긴 일>(감독 프랭크 카프라, 1934)의 명성을 더 높여줄 정도로 생각됐다. 사건기자가 최상급 신분의 여성을 만나 사랑의 줄다리기를 한다는 <로마의 휴일>의 모티브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의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로마의 휴일>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최고 히트작 가운데 하나가 됐다. 예상 밖의 결과에 대한 분석들이 뒤따랐다. 멜로드라마의 거장으로 절정에 이른 와일러의 연출력, 로마 현지 촬영의 매력 등 많은 이유들이 제시됐다. 하지만 관객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것은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일 것이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그레고리 펙이 공연했지만, 만약 <로마의 휴일>이 배우의 이름으로 기억된다면, 그건 오드리 헵번 덕분일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의 발굴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다. 이전엔 런던과 뉴욕의 발레리나이자 뮤지컬 댄서였고, 영화에는 단역, 조연으로 약간 출연한 정도였다. 그런데 첫 주연작이 흥행대작이 됐으며, 자신은 단번에 아카데미 주연상까지 받았다. ‘신데렐라’라는 말이 이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모마저 신인, 신데렐라 등의 수식어에 걸맞게 맑고 순결해 보였다. 신인의 가능성을 알아챈 감독이 와일러인데, 오드리 헵번의 모습에서 유럽적인 품위와 할리우드의 신성다운 패기를 모두 봤다. 영화는 유럽의 공주가 밤에 로마의 밤거리로 탈출한 뒤, 미국인 기자를 만나 모험을 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래서 여배우에겐 유럽적인 문화가 요구됐다. 영국 국적의 오드리 헵번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했는데, 이런 배경이 영화 속의 앤 공주 역을 맡는 데 장점이 됐다. 윌리엄 와일러는 제작사쪽에서 제시한 당대의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 카드를 내려놓고, 무명이었던 헵번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행운이 된 셈이다.

헵번이 의전행사의 공주로 나올 때는 유럽 귀족의 우아함이 묻어났고, 베스파를 타고 로마의 거리를 질주할 때는 규범에서 탈출하고 싶은 성장기 소녀의 순진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첫 작품부터 헵번에 대한 팬덤 현상도 뜨거웠다. 여성들은 헵번처럼 짧은 단발을 했고, 허리를 가늘게 만들려고 했고, 또 편해 보이는 단화를 신었다. 깜찍하고 발랄한 요정 같은 이미지의 여성이 아름다움의 새로운 지표로 제시된 셈이다. 신데렐라의 요정, 이런 현실에서의 이미지를 스크린으로 옮긴 감독이 빌리 와일더이다. <로마의 휴일>에 바로 이어 발표된 <사브리나>(1954)를 통해서다. 재벌 집이 배경인데, 큰아들(험프리 보가트)은 명문대 출신에 유능한 사업가이고, 둘째아들(윌리엄 홀덴)은 바람둥이다. 헵번은 이 집의 운전사 딸이다. 이런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는 게 이 코미디의 매력이다. 여기서도 헵번의 유럽 문화가 코미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파리다. <로마의 휴일>처럼 유럽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헵번이 표현하는 파리의 문화가 딱딱한 재벌 집의 분위기를, 특히 큰아들 보가트의 분위기를 바꾼다. 신데렐라의 신분상승, 그리고 소년 같은 모습에서 우아한 여성으로의 변신은 빌리 와일더가 <하오의 연정>(1957)에서 게리 쿠퍼를 함께 캐스팅하여 다시 한번 더 써먹는다.

헵번의 팬덤 현상에 중요한 변수인 패션은 <사브리나> 때부터 함께 일한 프랑스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가 맡았다. 특히 <티파니에서 아침을>(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 1961)은 패션이 코미디의 가장 주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한 선구적인 작품이다. 검정색 드레스, 사이즈 큰 선글라스, 목이 긴 검은 장갑, 그리고 긴 담뱃대 등은 헵번의 또 다른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네덜란드에서의 궁핍한 어린 시절

헵번은 벨기에에서 영국인 부친과 네덜란드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네덜란드 귀족(남작부인)이다. <로마의 휴일>의 공주 역이 우연이 아닌 셈이다. 정치가였던 헵번의 외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수리남의 총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부친은 정치적으로 파시스트였는데, 1930년대 중반에 나치의 지지자가 되면서, 가정에 불화가 시작됐다. 부친은 이혼한 뒤 영국으로 떠나버렸고, 오드리 헵번은 엄마와 함께 외가가 있는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이런 이동 중에도 헵번이 빠뜨리지 않은 것은 5살 때부터 시작한 발레였다. 그리고 부모의 언어인 영어, 네덜란드어에서 시작된 헵번의 외국어 능력은 훗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까지 발전한다. 헵번은 6개 국어를 구사하는 흔치 않은 배우가 된다.

전쟁은 헵번에게도 잔인하게 찾아왔다. 1939년부터 종전이 되는 1945년이면, 그녀의 나이 10살부터 16살 때까지인데, 한창 클 때 제대로 먹지 못했다. 굶다시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나치는 점령지인 네덜란드에서 식량배급량을 대폭 줄였고, 헵번은 영양실조와 빈혈에 시달렸다. 겨울의 네덜란드 거리에는 기아로, 또 추위로 죽는 사람들이 매일 나올 때다. 바싹 마른 몸매도 그런 성장환경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치 점령 때는 정치적으로도 공포 속에 살았다. 외가 친척들 중에는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헵번의 이모부는 나치에 붙들려 처형당했고, 또 다른 친척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집안에 죽음의 공포가 더욱 짙게 드리워질 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헵번은 1944년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을 위한 비밀기금모임에 참여해 발레를 공연하기도 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그날의 공연이 자신의 최고 발레 공연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성장기의 이런 고생은 헵번의 인도주의 활동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특히 유니세프 대사로 펼친 굶는 어린이에 대한 적극적인 봉사는 지금도 세상의 귀감이고, 이는 배우들 사이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성장기 때 익힌 외국어 능력은 유니세프 대사 활동을 하며 제대로 발휘됐는데, 헵번은 이것을 ‘신의 조화’로 해석했다. 헵번은 아프리카 등 여러 저개발 국가에서 활동할 때, 대개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현지인과 대화했다. 활동에 탄력이 붙는 건 당연했다.

헵번의 1950년대와 60년대의 배우로서의 활발한 활동은 <어두워질 때까지>(1967)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끝난다. 이후에는 간헐적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배우의 에너지는 봉사 활동으로 이어져, 헵번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휴머니즘을 호소했다. 이런 선행 덕분에 헵번은 삶의 후반부에도 스크린에서와 못지않은 큰 사랑을 받는 행복한 스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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