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곰, 패딩턴이 책장을 뚫고 우리 곁으로 왔다. 폴 킹의 실사영화 <패딩턴>이다. 지진으로 페루의 집을 잃은 아기 곰은 숙모가 가방 안에 챙겨준 마멀레이드 한병만 가지고 런던행 배에 오른다. 런던에 도착했지만 버려진 어린 곰을 거둬주는 이는 없다. 상냥한 브라운 부인을 빼고는. 브라운 부인의 흘러넘친 동정심은 브라운가에 무지막지한 사건사고를 불러들인다. 거실 바닥이 목욕물로 뒤덮이고, 거리의 전신주를 쓰러뜨리는 정도는 별일도 아니다. 그래도 어쨌든 브라운가는 패딩턴 덕에 행복하다. 이유가 궁금하다고? 그렇다면 <패딩턴> 제작 비화에 귀를 기울여보자.
1958년 런던 패딩턴 기차역에 꼬마 곰 한 마리가 자그마한 카드를 걸고 앉아 있었다. “이 곰을 돌봐주세요, 감사합니다.” 가진 거라곤 낡은 모자와 찌그러진 여행 가방 한개, 거의 다 비어 오렌지맛이 희미하게만 나는 마멀레이드 한병뿐. 바쁘고 번잡한 런던 시내에서 누구도 그 곰을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 착한 브라운 가족이 그 아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56년이 지났다. 누군가 데려가주기만을 기다리던 가엾은 고아는 팔자를 고쳐 다정한 가족과 패딩턴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푸우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곰이 되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파란 더플코트를 입은 곰돌이, 마멀레이드와 스튜에 들어가는 경단을 좋아하고 밖에 나갈 때면 언제나 먹을 것을 챙기는 사고뭉치 먹보, 작가 마이클 본드가 창조한 이후 4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3500만부 넘게 팔린 동화 <패딩턴> 시리즈의 주인공. 그 녀석이 왔다. 그 숱한 사고를 치기에는 2차원이 너무 좁다며 책장을 뚫고 살아 움직이는 3차원의 포동포동한 곰돌이로 다시 태어났다. 반세기 만에 복슬복슬한 옷을 입고 현실로 실현된 판타지, 영화 <패딩턴>이다.
누구나 비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2007년 패딩턴이 마마이트(맥주를 빚고 남은 이스트 찌꺼기로 만든, 빵에 발라먹는 영국산 스프레드) 광고에 출연하자 영국은 분노에 휩싸였다. 마멀레이드가 아닌 마마이트라니! 차라리 뽀빠이더러 시금치를 버리고 시래기를 먹으라지! 에이전트에게 저작권 관련 업무 전부를 맡겨놓아 그 광고를 허락한 적이 없던 마이클 본드는 패딩턴의 고향인 페루 대사관에 점심 초대를 받아 갔다가 난감해졌다. 페루 대사 부인이 점잖게 운을 뗐던 것이다. “저, 요즘은 패딩턴이 마멀레이드 대신 마마이트를 먹는다던데?” 1년이 지난 다음에도 본드는 왜 패딩턴이 샌드위치 스프레드를 마마이트로 바꿨는지 묻는 아이들의 편지를 받고 있었다.
그것이 영화 <패딩턴>이 처한 문제였다. 세상에 패딩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 누구든 무엇이고 흠을 잡을 수 있었다. 비난할 권리가 있었다. TV시리즈와 독립영화 한편을 연출했을 뿐이었던 감독 폴 킹은 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 제작진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패딩턴을 좋아하는지 역설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네, 네,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1950년대 이후 태어난 영국 아이들은 거의 모두 패딩턴과 더불어 자랐던 것이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와 <그래비티>를 제작한 <패딩턴>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헤이먼(1961년생)은 네살 때 받은 패딩턴 인형을 지금껏 가지고 있다.
그래서 <패딩턴>에 쏟은 5년이 “105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나리오를 고치고 고친 폴 킹과 작가들은 과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동물 영화를 만들면서 마음으로부터 진실하고자 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들은 이미 어엿하게 존재하고 있는 패딩턴에게 충실하고자 했다. 페루에서 태어난 패딩턴이 어째서 뉴욕도 아니고 파리도 아닌 런던으로 왔는지, 아니 그전에 도대체 정글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런던엔 뭐가 있다고 믿었기에 페루에서부터 혼자 밀항을 한 건지, 원작엔 나오지 않는데도 원작에 기반하여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작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건 1956년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이었다. <BBC> 카메라맨이었던 본드는 195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옥스퍼드 거리 셀프리지 백화점의 선반에 홀로 남아 있던 테디베어 인형을 발견했다. ‘크리스마스에 혼자라니, 아, 안 돼…’라고 생각한 이 서른살 어른은 아직 애도 없는데 아내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곰 인형을 사들고 돌아왔다. 그날 밤으로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집 근처에 있어서 출근 때마다 이용하는 기차역 이름 ‘패딩턴’이라고(하마터면 옥스퍼드나 셀프리지가 될 뻔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본드가 타이프라이터에 백지 한장을 끼우던 순간 떠오른 건 외로웠던 그 곰돌이 한 마리였다. 그리고 1926년에 태어나 버크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만난 런던 아이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런던의 부모들은 폭격을 피해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카드와 함께 기차에 태워 시골로 보내곤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을 어린아이가 들 수 있는 여행 가방 하나에 꾸린 채로. 그 작고 쓸쓸한 모습은 고스란히 패딩턴이 되었다.
지진으로 페루 밀림의 집과 삼촌을 잃은 아기 곰은 숙모가 꾸려준 마멀레이드와 가방을 들고 런던으로 가는 배에 밀항한다. 40여년 전에 삼촌 부부를 만난 영국 탐험가가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숙모는 팀험가가 들려준, 피난 떠난 런던 아이들의 이야기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런던은 변했다. 한때 낯선 이들의 선의에 의지했다던 런던 사람들은 이제 춥고 배고픈 곰 한 마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 순간 걸려든 유일한 먹이는 몽상가 기질이 다분한 브라운 부인(샐리 호킨스). 현실적이고 팍팍한 남편(휴 보네빌)의 반대를 무릅쓰고 곰돌이를 집으로 데려간 브라운 부인은 이제 패딩턴이라고 불리는 꼬마에게 탐험가를 찾아주고자 한다. 파란 더플코트를 얻어 입고 아침마다 마멀레이드를 먹으니 배부르고 등 따신 패딩턴. 하지만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박제사 밀리센트(니콜 키드먼)가 희귀한 페루의 ‘말하는 곰’에 눈독을 들이면서 패딩턴은 가죽이 벗겨질 위기에 처한다.
패딩턴이 치는 사고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그걸 모두 겪고도 패딩턴을 내치지 않는 브라운 가족은 생불)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세번의 TV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그중 아이버 우드가 셀과 컷애니메이션을 섞어 연출한 1970년대 영국 TV시리즈는 폴 킹에게도 영감을 주어 그의 영화 <버니 앤 더 불>에 비슷한 기법을 사용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사영화는 그 후로도 40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묘한 기계장치의 세계
시도는 멈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패딩턴 앤드 컴퍼니의 경영을 맡고 있는 본드의 딸 카렌은 매번 코웃음을 쳤다. “사람이 더플코트를 입고 돌아다니겠다고 하던데, 믿어져요? 그게 고작 10~15년 전이었다고요.” 그만큼 패딩턴은 소중했으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첫 번째 책 <내 이름은 패딩턴>이 출판되기 두달 전에 태어난 카렌에게 패딩턴은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저녁도 같이 먹었다니까요.” 니콜 키드먼도 그랬다. <패딩턴> 출연 섭외를 농담으로 여긴 매니저가 지나가다 흘린 말에 대뜸 “나 그거 할래! 한다고!” 외친 그녀는 언제나 “우리 집에 패딩턴이 살았으면” 하고 바라던 소녀였다.
그 때문에 500명이 넘는 스탭이 모여 만든 <패딩턴>은 그 규모와 예산이 무색하게도 킹의 말처럼 “가내수공업의 느낌을 간직한” 영화로 남았다. 100% 컴퓨터그래픽으로 창조됐는데도, 지하실에서 찾아낸 그 옛날 곰 인형처럼 거칠거칠한 느낌을 간직한 패딩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득한 향수. 팀 버튼과 장 피에르 주네, 미셸 공드리를 좋아하는 킹은 원작에는 없는 발명품들을 덧붙이면서 증기기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그들의 기묘한 기계장치의 세계로 들어갔다.
21세기가 시작되고도 14년이 지났지만 <패딩턴>은 온갖 쓸데없는 발명품과 설계도가 판을 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유럽을 떠올리게 한다. 페루 밀림의 컨베이어벨트는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며 오렌지를 쪼개 마멀레이드를 만들고, 노팅힐 골동품 상점의 미니어처 기관차는 패딩턴을 위해 뜨거운 코코아를 나른다. 차가운 금속이 맞물리며 돌아간다 해도, 그에 덧입힌 나무와 천과 플라스틱과 페인트의 색채만은 따뜻한 세상. 킹은 그걸 할리우드에 내주고 싶지 않았다. “패딩턴은 달나라 여행 같은 걸 떠나는 곰이 아니에요.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 땅에 단단하게 앞발을 붙이고 있지요.” 그런 패딩턴이 할리우드로 가서 “야구 모자를 쓰고 가죽 재킷을 입고 범죄와 전쟁을 벌이는” 곰이 될 수는 없었다.
디자인 또한 예스럽다. 킹은 인형과 머그, 도시락 그릇처럼 다양한 상품으로 생산되었던(본드는 패딩턴 화장지만은 안 된다고 막았다) 패딩턴 중에서도 페기 포트넘이 그린 초기 일러스트를 가장 좋아했다. “가장 새끼 곰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원작에는 없었지만 장난감 디자이너가 서 있는 자세의 인형을 만들기 위해 덧붙인 빨간 웰링턴 부츠를 벗고, 패딩턴은 다시 오래전 맨발이 되었다. 2014년 런던 한복판의 윈저가든스 32번지를 색연필로 칠한 것처럼 따스한 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보다 오래 남는 온기는 친절을 믿는 패딩턴 자체였다. 낯선 이를 만나면 반드시 모자를 벗어 인사하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참으로 곰다운 미련함이었다.
본드는 이민과 난민이 물결치던 전후 <BBC>와 영국에서 패딩턴을 위한 관대함을 배웠다. 그랜드피아노 안에 숨어서 탈출한 러시아인, 말을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망명한 다음 영국에서도 말을 타고 출퇴근을 했던 폴란드인, 그리고 독일에서 가장 젊은 법관이 되기 직전이었지만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주머니에 10파운드만 넣은 채로 영국에 도착한 독일인 하비 우나. 우나는 훗날 본드의 에이전트가 되었고, 매일 아침 패딩턴과 함께 코코아와 롤빵을 나누어 먹는 골동품상 그루버씨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방인에게 친절하라
그런 세상에서 망명자가 살아남으려면, 또는 지금 런던에서 패딩턴이 살아가려면,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야만 한다. 키드먼은 <패딩턴>이 이방인들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주제를 전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서로 돌봐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쳐야 해요. 매우 중요한 일이랍니다.” 브라운씨는 아내와는 다르게 느닷없이 굴러들어온 노숙자 곰돌이를 의심하지만, 무작정 사람을 믿는 해맑은 털뭉치 앞에선, 그 아이를 끼고 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또한 패딩턴은 반세기가 흐르는 와중에도 홀로 느긋하고 평화롭다. 마멀레이드 샌드위치와 달걀과 베이컨을 배불리 먹고, 노팅힐 거리의 상인들과 흥정을 하면서 장을 보고, 뭐 또 도울 일 없나 크고 동그란 눈동자를 깜박인다. 본드는 아직도 패딩턴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지만, 패딩턴은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간답니다.” 잘하려고 한 일들이 몽땅 말썽이 되어버리고, 몇번이고 소망이 부서져도, 패딩턴은 좌절하지 않는다. 아무리 혼이 나더라도 털북숭이 앞발을 내밀어 수줍게 인사한다. 이러니 우리도 <내 이름은 패딩턴>의 브라운 부인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집에 곰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죠?”
도움을 요청하지 마세요!
원작 동화 <내 이름은 패딩턴> <사랑스러운 패딩턴> <패딩턴, 도와줘!>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브라운 가족을 낚아 런던 포토벨로 지구에 입성한 패딩턴은 날마다 바쁘다. 정해진 업무는 노팅힐로 나가 시장 보기, 그리고 나간 김에 그루버씨와 함께 앉아 코코아와 롤빵 먹기 정도이지만, 이상하게도 매일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다. 목욕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어찌어찌 넘어간 패딩턴의 첫 번째 본격적인 도전은 지하철 타고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는 것. 하지만 계단은 스스로 움직이고 백화점 문은 끝도 없이 돌아가니(회전문이다) 브라운 부인이 시킨 대로 가만히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뜻하지 않게 곡예를 부리는 곰이 되어 백화점 매출에 지대한 공헌을 한 다음에도 패딩턴의 도전은 끝나지 않는다. 마침내 나만의 방을 얻었으니 자기 앞발로 직접 꾸미고 싶고, 가족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서 포장하고 싶고, 바닷가와 강가로 소풍도 나가야 하고, 나가 보니 거기 모래가 있기에 모래성도 쌓아야 하고, 누군가 정원에서 훔쳐간 브라운씨의 호박도 찾아야 하고…. 그러다가 몇번이나 패딩턴을 잃어버린 브라운 가족은 마침내 깨닫는다. 무언가 말도 안 되는 사고가 일어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으면, 바로 그곳에 패딩턴이 있다!
참고로,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책 제목은 <패딩턴, 도와줘!>이지만 패딩턴에게 “도와줘!”라고 말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패딩턴의 마멀레이드는 표절?
곰이 주인공인 다른 작품들
아기 곰 푸우(그런데 목소리는 늙었다. 처음 들으면 충격받는다)는 작가 A. A. 밀른이 아들에게 들려주려고 만든 동물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1천에이커(약 404만m²) 숲에 사는 푸우의 친구들은 돼지지만 푸우보다는 덜 먹는 피글렛과 방정맞은 호랑이 티거, 엄마 캉가와 왠지 영악한 아기 루, 세상 근심을 몽땅 짊어진 당나귀 이요 등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소년 크리스토퍼 로빈도 있다. 본드는 <패딩턴>시리즈를 쓰기 전에 푸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푸우가 꿀을 무척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패딩턴에겐 마멀레이드를 주었다. 이건 표절인가, 인용인가.
곰 아저씨 에르네스트는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 <셀레스틴느>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셀레스틴느는 자그마한 생쥐 꼬마 아가씨. 에르네스트를 무척 좋아하는 마음 착한 셀레스틴느는 아저씨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떼를 써서 그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에르네스트는 투박한 곰 손으로 바느질까지 해야 한다. 수채화의 느낌이 맑고 고운 이 시리즈는 2012년 장편애니메이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으로 만들어졌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곰들의 이야기지만 <패딩턴> 시리즈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 서글픈 이야기도 있다. 그림책 <나는 곰입니다>는 어느 날 거리에 버려져 하루하루 낡아가는 곰의 이야기.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 커다란 덩치를 보지 못하고 그를 스쳐가지만 한 꼬마가 그를 발견한 순간… 그 곰은 곰돌이가 된다.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