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페루에서 혼자 런던에 온 꼬마 곰 패딩턴은 기차역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브라운 부인의 눈에 띈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거쳐 가족이 된다. 빨간색과 겨자색을 즐겨 입는, 꼬마 요정처럼 친절하고 발랄한 엄마 브라운 부인, 겉은 까칠하지만 속내는 보드라운 큰딸과 마냥 천진하고 즐거운 작은아들, 그리고 아빠 브라운씨, 그는… 곰돌이를 닮았다. 길거리에서 굴러들어온 패딩턴이 싫다고 자꾸 내치지만, 패딩턴과 나란히 있으면 종(種)을 초월하여 영락없이 부자지간인, 커다란 인간 곰돌이다. 아무리 차갑게 보이려고 애써도 그 외모 때문에 자꾸만 푸근해진다.
이 남자, 작고 동그란 파란 눈과 조그맣게 오뚝 솟은 코, 재미있는 곱슬머리, 동그스름한 얼굴과 둥근 배를 가진 영화 <패딩턴>의 아빠는 휴 보네빌이다.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눈에 익은 배우. 20년 넘게 무대와 TV, 라디오, 영화를 넘나들며 영국의 얼굴과 목소리가 되었던 그도 자기를 제대로 알고 있어, 자신과 가장 닮은 역사적 인물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허영의 시장>의 작가) 윌리엄 새커리요. 크고 볼품없고 선한.”
1963년 런던에서 삼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휴 보네빌의 본명은 참으로 영국적으로 그럴듯하게도 휴 리처드 보네빌 윌리엄스이다. 연기를 시작하면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배우 휴 윌리엄스와 혼동되는 걸 피하고자 리처드 보네빌이라는 예명을 썼지만, 일하면서 만난 동료들에게도 ‘휴’라고 불리고 싶어 10년 만에 다시 이름을 바꾼 결과 지금의 휴 보네빌이 되었다. 그리고 이름이 바뀌는 과정만큼이나 배우로서 그의 인생 또한 다사다난했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에 진학한 교외 중산층 소년이 어쩌다 배우가 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다만 여덟, 아홉살 무렵의 기억 한 토막이 있을 뿐이다. 아는 아저씨가 하는 동네 연극을 보러 갔던 보네빌은 그가 관객에게 발휘하는 영향력을 보며 넋을 잃었다. “그가 관객을 웃게 만들었는지 완벽한 침묵에 잠기게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아요. 다만 가득 찬 객석, 커튼콜과 갈채가 떠오르는군요. 다음날 아침 나는 아침상 앞에서 넋을 놓고 아저씨만 보고 있었지요.” 그 아저씨에 대한 추억이 남아 대학에 가서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하던 청년은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숱한 아저씨 역을 두루 섭렵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렇게 연극과 처음 조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보네빌은 무대가 좋았다. “그냥 좋았어요. 어두운 방에 있는 게 좋았고,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좋았지요. 가짜라는 건 알았지만, 정말 멋있었거든요.” 그래서 보네빌은 20대부터 오픈에어 시어터와 내셔널 시어터 등의 무대에 섰고, 1991년엔 꿈이었던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만사가 순조롭게 풀렸다면 우리는 보네빌을 영국인만 아는 성찬으로 남겨두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관계자의 언질을 받고 다른 극단 일자리까지 거절하면서 다음 시즌을 기다렸던 보네빌은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내게 소중했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곳은 이제 내가 사랑한 극단이 아니었던 거지요. 다시는 연극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극단에서 보낸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젊은 배우의 영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말한다. “거기서 2년을 더 있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보네빌은 자신이 평생 가장 남용한 말은 “어쨌거나 난 그 역을 원하지 않았다고”였다고 한다. 그만큼 숱하게 거절당했다. 이유도 다양했다. 너무 크거나 작거나, 평범하거나 어울리지 않거나, 이러나저러나 너는 아니라고. 그중 가장 뼈아픈 말은 이거였다. “그 역, 콜린 퍼스가 하기로 했어.” 지극히 영국적이고 평범하게 생긴 보네빌은 마찬가지로 지극히 영국적이지만 잘생긴 편에 가까운 동년배 퍼스에게 사사건건 밀렸다. 퍼스가 주연인 무대에 조연으로 섰고, TV와 영화 배역을 빼앗기곤 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콜린 퍼스를 캐스팅한)<러브 액츄얼리>의 감독 리처드 커티스가 편지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거절 당하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고요.” 오랫동안 보네빌은 <노팅힐>의 휴 그랜트를 둘러싼 친구 패거리 중 한명, 자학적이지만 사람 좋은 증권회사 직원 버니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닌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었다. 보네빌이 연기한 <사랑은 음악처럼>의 부유한 와인상 세바스찬은 푸짐하고 넉넉한 몸집으로 인해 사람 좋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구두쇠에 오지랖이 넓고 탐욕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걸 들킨 다음에도 이상하게 그가 내미는 음식 접시엔 악의라곤 없어 보인다. 도저히 악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인상, 그럼에도 한순간 비열하게 느물거리는 눈빛, 그걸 재빨리 뒤덮는 웃음. 너무 평범해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이따금 불가해하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외모는 실업자는 아니었지만 지지부진했던 그의 경력에 마침내 돌파구가 되었다.
보네빌은 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그 남편 존 베일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아이리스>에서 젊은 시절의 베일리를 연기했다. “미국 기자들은 짐 브로드벤트가 젊은 시절과 노년의 존 베일리를 혼자 다 한 줄 알더라고요, 하하!” 하지만 알고 봐도 마찬가지다. 안경을 끼고 이마를 넓힌 분장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만큼 표정과 눈빛이 닮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머독, 자유롭고 거침없고 위협적인 영혼. 그 거센 바람을 맞아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숙명적인 사랑으로 끌려들어가는 보네빌은 젊음의 샘물을 마신 브로드벤트와도 같았다. 이 선량한 노인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면, 바로 그랬을 것 같았다. 보네빌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자유자재로 탈바꿈하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다.
그 후 보네빌은 성공한 배우로 살아왔다. 때로는 겹치기 촬영을 했고, 조지 클루니와 맷 데이먼, 존 굿맨과 함께 <모뉴먼츠 맨>을 찍었고, 스스로 “영국의 DNA의 일부”라고 말하며 부담스러워했던 <패딩턴>의 일부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코미디 연기에 애착이 깊었지만, 단단하고 조용한 카리스마를 지닌 그는 패거리를 거느리고 “가라앉는 배를 구하는 선장” 같은 역을 주로 맡았다. 그리고 2010년, 그 카리스마가 배우 보네빌을 스타로 만들었다. TV시리즈 <다운튼 애비>였다.
20세기 초반, 광대한 영지와 저택을 소유한 그랜섬 백작 로버트 크롤리 경은 속을 알기 어려운 인물이다. 신사답지만 냉혹하고, 예상하기 어려운 대목에서 마음이 약해지며, 대체로 인간적이다. 그에 관해 타인이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가문의 영지를 지키겠다는 신념뿐이다. 흘러간 시대의 옛 귀족. 절도 있게 차려입은 이 구시대의 남자는 시청률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마음 또한 사로잡아 (다시 한번 기분 나쁘게도) “콜린 퍼스의 뒤를 잇는 섹스 심벌”이라 불리게 되었다.
최근 몇년간 보네빌은 난생처음 외국에서 카메라에 둘러싸이고 사인 부탁을 받고 있다. 그래서 좋아졌을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새삼스러울 뿐이다. “난 이 일을 25년이나 했다고요!” 그의 친구인 범죄소설 작가 피터 제임스에 의하면 “요즘 보기 드물게 <다운튼 애비> 출연 전부터 스리피스 정장을 조끼까지 제대로 차려입고” 다녔다지만, 보네빌은 그저 좋아서 일하고 내키는 대로 살아간다. “타락한 변호사를 꿈꾸었지만 타락하기엔 배우가 제대로”라는 걸 깨닫고는 진로를 수정했다고 그는 말한다. “배우는 떠돌이에 불한당이에요. 다른 사람의 인격을 슬쩍한다는 점에서 소매치기 같은 점도 있고요.” 그러니 보네빌은 안전만 찾는 현재의 브라운씨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질주하던 과거의 브라운씨와 더욱 비슷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브라운씨와는 다르게, 그 질주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Magic hour
<패딩턴>에서 여장을?
반세기 동안 영국 아이들의 친구였던 동화 <패딩턴> 시리즈를 영화로 만들면서 제작진이 가장 신경 썼던 문제는 등급이었다. 곰돌이를 만나러 온 동심에 금이 가면 안 되니까. <패딩턴>의 감독 폴 킹에 의하면 이 영화에 섹스와 관련된 요소는 단 하나, 휴 보네빌이 성(性, sex)을 바꾸고 등장하는 장면뿐이다.
그 장면에서 패딩턴과 함께 고고학협회 자료실에 잠입한 보네빌은 화장만했다뿐이지 크고 뚱뚱한 그 모습 그대로 용감하게 여장을 한다. 그리고 깐깐한 남자 직원의 마음을 녹인다, 꾸미지 않은 목소리는 허스키하고 튼실한 상체에 비해 종아리는 늘씬하니까. <다운튼 애비> 때문에 코미디 본능을 억누르고 산다며 투덜거리던 보네빌은 아주 만족했을 것이다.
함께 출연한 니콜 키드먼이 “아주 우아했어요”라고 극찬한 드레스 차림의 보네빌을 보았다면 20여년 전에 그를 떨어뜨린 오디션 담당자는 땅을 쳤을텐데. 그 작품은 더스틴 호프먼이 여장을 하고 출연한 영화 <투씨>의 무대 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