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어느 작은 동네에 돈이 필요했지만 나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살았어요. 고심 끝에 그 사람은 이웃이 키우는 개를 훔치기로 결심했답니다. 뭐, 그것도 일종의 납치이긴 하지만, 옆집 애를 훔치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은 어둠을 틈타 이웃 마당에 잠입하여… 잠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고요? 이건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아니랍니다. 21세기 초엽, 우루과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라고요.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 같은 데 가서 신부를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우루과이 친구가 나를 유혹했다. “너도 우리 동네 와서 신랑을 사라. 너 돈 많잖아. 내 친구가 가난해도 심성은 착하고 키는 작지만 얼굴이 아주 귀여운데 말이야….” “나 돈 없다.” “아냐, 너 부자야. 2천만원만 있으면 화장실이 두개인 집을 살 수 있다고!” 나는 솔깃했다. 그 돈이면 한국에선 화장실 두개 사기도 힘든데! 우루과이에 가서 귀여운 남자와 집을 사고 한국의 맛(이자 우리 엄마 손맛) 미* 팍팍 뿌린 코리안 푸드를 대충 만들어 팔면서 저 푸른 초원 위에 님과 함께 살고 싶었다. 흔들리는 내 얼굴을 보더니 우루과이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기까지 한지 알려주겠답시고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저거였다, 몬테비데오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그래서 그 개는 어떻게 되었던가. 어이가 없었고 돈도 딱히 없었던 개 주인이 마음대로 하라며 몸값 지불을 거부하자(야, 우루과이 사람들 착하다며) 납치범은 고민하다가 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엄청 귀찮았을 텐데도 개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았어! 납치범까지 그렇게 착한 나라가 우루과이야.” 친구는 으쓱했다. 그게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처럼 개를 훔치는 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범죄 행위이다. 1955년에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을 보면 ‘kidnap’ 대신 ‘dognap’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말장난이라고 믿었지만 진짜 사전에도 나오는 단어였다. 그 뜻은 짐작하다시피 ‘개를 훔치다’. 보들보들한 달마시안 강아지 모피로 코트를 만들어 입고 싶었던 크루엘라 여사가 강아지 99마리를 납치했지만 그중 15마리의 부모가 애들 찾으러 오는 바람에 망하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단어이다. 그나저나 원래 달마시안 17마리를 키우던 부부는 졸지에 101마리를 떠맡게 되었으니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모르겠다.
참고로 달마시안은 성질이 나쁘기로 유명하여 1996년 영화 <101 달마시안>이 개봉한 다음 미국엔 대규모 달마시안 유기 사태가 벌어졌다. 과연 모피가 탐날 만큼 무늬가 예쁘다며 강아지를 샀던 사람들이 그 성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다버렸던 것이다. 성견 달마시안을 딱 한번 만나본 나로서는… 말을 아끼겠다. 그날 난 뒷발로 서면 키가 나하고 비슷한 달마시안이 덤비는 바람에 초면에 뽀뽀할 뻔했다.
크루엘라처럼 되지 않으려면 납치범들은 그 부모를 눈여겨봐야 한다. 크루엘라는 퐁고와 퍼디가 달마시안의 탈을 쓴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몰랐고, 알바니아에서 건너온 <테이큰>의 인신매매단은 공항에서 점찍은 여자애가 그 새아빠는 재벌이요 친아빠는 전직 특수요원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 그 참극의 끝에는 이런 질문만이 남았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세상 무서운 건 혼자 다 아는 브라이언(리암 니슨)은 10대 딸이 친구와 파리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자 맹렬하게 반대하지만 전처의 한마디에 주저앉고 만다. “내가 왜 세상 쓴맛을 몰라? 5년 동안이나 오지 않는 남편 전화를 기다렸는데.” (그게 그녀가 겪은 가장 쓴맛, 복받은 인생이다.) 그렇게 파리로 떠난 딸은 납치를 당하고, 전처의 남편에게 당장 전세기를 내놓으라고 호령해 파리로 날아간 브라이언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불태우며 폭주를 시작하는데…. 머나먼 20세기에 <코만도>(이쪽은 무려 아놀드 슈워제네거) 딸을 건드렸던 납치범들은 리암 니슨 없는 세상에(아니, 그때도 어딘가에 있긴 있었겠지만)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슈워제네거가 기관총을 들었다면, 리암 니슨은 전선을 들고 나타난 고문 기술자.
하지만 세상엔 부모를 눈여겨보는 정도가 아니라 부모를 너무 눈여겨봐서 아이를 납치하는 똑똑한 납치범들도 많다. 근데 다시 생각하면 똑똑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그 요구가 하나같이 허황되다. <세븐 데이즈>의 납치범은 7일 안에 살인범을 풀어달라고 우기고 <용서는 없다>의 납치범은 자기 입으로 범행을 자백한 인간을 사흘 안에 풀어달라고 우긴다. 그럴 거 자백이나 하지 말지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이나 깨지 말지, 너 나오라고 살해 도구 숨기려는데 어디 있는지 물어봐도 알려주지를 않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차피 해도 안 되는 일, 내가 안 하고 남 시키겠다는데, 그걸 보면 역시 똑똑한 것도 같다.
한편 인간 세상에 똑똑한 납치범들이 있다면 강아지 세상엔 똑똑한 인질들이 있다. 2대를 이어 납치당하면서도 구하러 온 주인 가족이 뭘 제대로 하기도 전에 제 힘으로 뚫고 나오는 거대 견종, <피터팬>의 웬디와 동생들의 보모 노릇을 하며 명성을 떨친 세인트버나드종의 후손, <베토벤>의 말썽꾸러기 베토벤 가문. (내가 어릴 적에 참 인기 있었던 영화인데 난 이걸 보면서 절대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베토벤>의 아빠 말대로 삶이 파괴될 것 같아서.) 이 시리즈 1편에서 베토벤은 무기 실험용으로 납치당하는데 그 실험용 개의 조건은 이렇다, 두개골이 클 것. 개나 사람이나 머리가 크면 슬픈 일이 많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자루에 보쌈 당하기엔 지나치게 머리가 크지. 그래도 키는 작지만 얼굴도 주먹만 하고 금발 곱슬머리가 귀여웠다는 우루과이의 가난한 연하 총각이여, 내겐 아직도 2천만원이 남아 있다. 하지만 넌 아직 총각으로 남아 있지 않겠지.
큰 개는 절대 납치하지 말자!
납치범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두세 가지 것들
개를 훔치고 싶다면 소형견으로
<베토벤>의 납치범들은 세인트버나드종인 베토벤을 온갖 중소형견들과 같은 견사에 가두는 실수를 범한다. 베토벤이 어떻게 거기에서 나왔을까, 앞발로 철사나 머리핀을 구부려서 자물쇠를 따고 나왔을까? 아니다, 그냥 있는 힘껏 머리로 받고 나왔다. 고양이들이 멀리서부터 우다닥 뛰어와서 방충망을 들이받아 뚫고 가출한다는 도시전설을 들었는데… 그거 진짜다. 내가 실제로 봤다. 그러니 개를 훔치고 몸값을 받고 싶다면 착한 인간의 작은 개를 훔치도록 하자.
사람을 훔치고 싶다면 크기보다는 연륜으로
왠지 <나 홀로 집에>의 인기를 등에 업고 나온 짝퉁 같았지만 그래도 아기가 귀여워서 너도나도 보았던 영화가 <베이비 데이 아웃>이었다. 납치당한 부잣집 아기가 3인조 납치범들을 농락하고, 인질 구출부터 범인 체포까지 책임지는 되바라진 영화. 반면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의 순분 여사는 얼마나 자상한지. 납치범들이 머리가 달리니까 협박하는 거랑 몸값 받는 거랑 세심하게 지도해주고, 자산 평가 후에 몸값 액수도 정해준다. 무엇보다 어차피 당할 거라면 아기보단 할머니한테 당하는 편이 체면도 살고.
그래도 굳이 꼬마를 납치하고 싶다면 자기 필드에서
<플라이트 플랜>의 납치범이 왜 굳이 부자도 아닌 항공 엔지니어의 딸을 납치하려고 마음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걔 엄마, 잘못 건드렸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물정 모르는 납치범이 범행을 감행한 비행기 엔진을 설계한 전문가로서 비행기 구조를 속속들이 아는 데다 며칠 전에 남편이 죽는 바람에 이젠 잃을 것도 없이 악만 남은 슈퍼 중의 슈퍼 엄마이시다. 남의 구역은 침범하지 않는 것이 전문가들의 상도덕. 프로페셔널한 납치범이라면 자기 필드나 제대로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