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소멸 중인 흘러넘침
2015-01-22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속 말로야 스네이크, 그 ‘분위기’에 관하여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젊고 재능 있는 감독 클라우즈는 작고한 감독 빌렘이 20여년 전에 썼던 <말로야 스네이크>를 다시 무대에 올리려고 한다. 그가 중년의 여주인공 헬레나 역으로 점찍어둔 배우는 과거에 헬레나의 상대역 소녀인 시그리드로 분해서 스타덤에 올랐던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다. 마리아의 비서인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은 마리아가 클라우즈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길 바라지만, 마리아는 망설인다. 심지어 캐스팅을 수락한 뒤에도 싱그러운 시그리드가 아닌 시그리드의 사랑을 갈구하다 자살을 감행하는 헬레나에게 동화되지 못해 내내 갈등한다. 마리아에게 헬레나는 초라하고 비굴하며 무엇보다 늙어버린 여인이다. 그러나 마리아를 헬레나의 적역이라고 믿는 클라우즈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인물, 달리 말해 결국은 동일인물이며, “시그리드의 20년 후가 헬레나”이므로 마리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설득한다.

그의 논리를 확장하면 <말로야 스네이크>, 나아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이하 <실스마리아>)는 발렌틴과 마리아, 시그리드와 헬레나, 그리고 젊음과 늙음의 관계가 분신의 테마 안에서 어느 여배우의 내적 성장담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이며, 네 여인이 서로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서 상대로부터 낯설거나 망각됐거나 잠재된 ‘나’를 보는 이야기가 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재현해야 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며, 재현이란 무언가와의 닮음, 무언가와의 유사성을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삼으므로 이 영화를 분신의 테마 안에서 읽어내는 건 자연스럽다. 시그리드와 헬레나를 시간적 연속성 안에서 받아들이는 감독 클라우즈와 비서 발렌틴에게 마리아가 헬레나라는 역 앞에서 느끼는 지독한 감정들은 그저 젊음에 대한 질투 혹은 나이듦에 대한 두려움 정도로 수렴된다. 실제로 대다수의 관객에게 <실스마리아>는 마리아가 혼돈 속에서 자기 안의 시그리드, 헬레나, 발렌틴을 발견하고 세월을 받아들여가는 과정에 대한 영화로 이해되는 것 같다.

위의 도식이 <실스마리아>의 중층적인 서사를 읽어내는 가장 안정된 길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나, 그 길이 이 영화의 감흥을 설명하는 데는 오히려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헬레나에 대한 마리아의 고통과 불만족은 나이든 여배우의 젊음에 대한 우울증적 갈망에 불과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스마리아>의 굽이치는 협곡을 흐르는 저 기괴하고 신비로운 구름으로 먼저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 영화 속 산과 구름의 풍경은 의외로 잘 말해지지 않거나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와 시간에 대한 상징이나 은유 정도로 설명되어왔다. 하지만 실스마리아의 협곡을 뱀처럼 가로지르는 ‘말로야 스네이크’에 대해서만큼은 주의 깊게 더 말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더없이 아름답고 청명하면서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귀기어리며 한없이 고요하지만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이 풍경의 장면들에는 서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점들이 있다. 그 점들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실스마리아>의 영화적 성취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았는가

영화의 도입부, 마리아는 비서 발렌틴과 스위스로 가던 도중 감독 빌렘의 부고를 접한다. 지난날,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주었던 감독을 대신해 상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 큰 실의에 빠지고, 발렌틴은 빌렘이 집 밖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알려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실스마리아의 눈 덮인 산에서 구조대에 의해 빌렘의 시신이 옮겨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장면이 다소 갑작스럽고 섬뜩한 이유는 이미 시간적으로 지나간 사건을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시선으로 무심하게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스마리아의 언덕, 그러니까 언젠가 ‘말로야 스네이크’가 지나갔을 그곳을 죽음의 자리로 처음 대면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빌렘의 아내를 통해 그가 오랜 기간 병을 앓았고 그의 마지막이 심장마비가 아닌 자살임을 알게 된 뒤, 마리아는 빌렘의 아내와 산을 올라 감독이 스스로 생을 마친 그 자리에서 말로야 언덕과 호수를 내려다본다. 지금 그곳은 아무 일도 벌어진 적 없다는 듯 투명하고 고요하며 쾌청하다. 그때 영화는 죽은 감독의 아내의 목소리를 따라 빌렘이 평생 매료되었던 ‘말로야 스네이크’를 흑백의 기록영상으로 담은 <말로야의 구름현상>(산악영화 전문가인 아르놀트 팡크가 1924년에 찍은 작품)으로 이행한다. 90여년이란 시간적 간극 사이의 문이 열리듯 산의 비밀이 밝혀지는 그 이행은 영화적으로 과감하며 우아하고, 흑백영상 속 산과 구름과 바람이 각자의 자율적인 리듬만으로 어울려 빚어내는 운동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그 경이로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예술가로서의 일생을 말로야의 구름 곁에서 맴돌았던 빌렘은 그 언덕에서 목숨을 내려놓기 직전, <말로야의 구름현상>에서 보았던 그 유일무이한 순간을 마침내 직접 경험했던 것일까.

<실스마리아>에는 위의 기록영상만큼 우리의 숨을 멎게 하는 ‘말로야 스네이크’ 장면들이 몇 차례 더 등장한다. 그런데 마리아와 빌렘의 아내가 함께 시청하던 <말로야의 구름현상>이 그 영상의 독립적인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영화 내에서 최소의 서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비해 이 장면들은 서사 내의 위치나 기능상으로 모호하다. 컬러 화면 속에서 설산 주위로 넘쳐흐르는 구름의 광경은 다른 무엇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화 속 어떤 이미지보다도 그 자체로 명징한데, 그 광경의 기능이 더없이 모호하다는 점, 나는 여기에 <실스마리아>의 신비가 있다고 느낀다. 이와 관련해서 두 지점의 장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헬레나 역에 여전히 회의를 느끼는 마리아는 발렌틴과 산속 호수로 수영을 하러 나온다. 발렌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음을 알게 된 마리아의 묘한 반응에 발렌틴은 그 감정이 질투냐고 되묻지만, 그들 사이에 그 이상의 이야기는 오가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벌거벗은 채 아이들처럼 물속에 뛰어든다. 다음 장면에서 발렌틴은 아침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서고 무심한 척 굴던 마리아는 계단을 뛰어올라 발렌틴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뒤이어 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남자친구에게 가는 길인지, 돌아오는 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발렌틴은 굽이굽이 펼쳐진 산길을 운전하는 중이고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클래식으로 일관되던 영화의 음악은 이 순간, 신경질적인 전자음으로 채워지고 구름인지 안개인지 알 수 없는 뿌연 연기가 그 장면을 질식시킬 듯 메운다. 어지러운 산길과 뿌연 연기와 흔들리는 차가 제각기 움직이며 서로 겹치고 뒤흔드는 이 장면 끝에 이르면 발렌틴은 차에서 내려 구토를 한다.

인과관계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듯 거기 덩그러니 놓여진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공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더 당혹스러운 건 이어지는 장면이다. 마침내 우리는 말로야 협곡을 거슬러올라 마치 폭포수처럼, 파도처럼 설산 주변으로 쏟아지며 피어오르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게 된다. 말하자면 같은 산을 배경으로, 같은 음악 위에서 영화적으로 대담하게 매만져진 장면과 자연의 위엄을 그대로 전시하는 풍경의 장면이 여기 충돌한다. 이 두 장면은 과연 누구를 위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수는 이 영화에 대한 평문(<씨네21> 987호)에서 이 장면을 글의 화두로 삼으며,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몽환적 연출을 통해 ‘실스마리아의 구름’을 ‘말로야의 뱀’으로 승화할 만한 여유와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는 마리아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표면화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내게 발렌틴이 등장하는 위의 장면은 다른 무언가로 환원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길을 잃기 위해 마련된 인공적인 미로처럼 느껴진다. 그 뒤에 펼쳐지는 ‘말로야 스네이크’의 저 광활한, 자체의 충만한 결들로 움직이는 자연의 압도적인 풍경은 앞선 장면의 혼돈과 인공성에 기묘한 해방감을 안기는 것 같다. 무엇보다 상이한 방식으로 치열하게 존재하는 두 풍경이 부딪치듯 이어질 때, 인물들(의 서사)에게 귀속되지 않으려는 영화적 안간힘과 우아함이 동시에 작동하며 이 영화의 지평을 인물들의 감정들로 팽배한 폐쇄된 무대로부터 좀 다른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 같다.

‘말로야 스네이크’의 풍경이 기적처럼 다시 등장하는 건 마리아와 발렌틴의 마지막 산행에서다. 마리아를 참아내던 발렌틴이 마리아와의 말다툼 끝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뒤, 그 사실을 아직 모르는 마리아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볼 수 있다는 언덕에 올라 희미하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고 홀로 중얼거린다. “저것 봐! 저게 말로야의 뱀일까? 아니 그냥 안개인가? 이미 걷혀가고 있는 건가?” 뒤늦게 발렌틴의 부재를 알게 된 마리아는 어린아이처럼 애타게 발렌틴을 부르며 당황해하는데, 그 장면 뒤로 영화는 ‘말로야 스네이크’의 장관에 온전히 할애된 장면들을 다시 펼쳐낸다. 이번에는 전자음이 아닌 헨델의 <라르고> 선율이 그 위를 흐른다. 여전히 인물 없이 오직 산과 구름과 바람으로만 흘러가는 그 풍경의 시간은 강렬하고도 점잖게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이 대단한 광경을 과연 마리아는, 영화 속 인물들은 보았을까? 이 풍경의 시간은 대체 어디 위치한다고 말해야 할까?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잔인하고 애잔한 영화적 헌사

빌렘이 한평생 말로야의 구름에서 예술적 영감을 찾을 때, 그를 매혹시킨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현실의 언어로 만질 수 없는 실재의 지평, 즉 끝내 완전히 포착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지평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그곳을 죽음의 장소로 택한 후, 죽음 직전에 그 찰나를 경험했을지 또한 알 길은 없다. 우리가 본 것은 그 실재의 자리에 차갑게 굳어 누워 있는 죽은 육신이었을 따름이다. 마치 환각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산길을 오르는 발렌틴의 장면 다음에 마법처럼 말로야의 생생한 자연의 풍광이 등장할 때, 우리는 그 눈부신 실재의 광경에 발렌틴이나 마리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실스마리아의 인물들은 산과 구름과 바람이 고유하고 귀기어린 리듬을 만들어내는 저 숭고한 순간을 죽음에 이르지 않고서는 닿을 수 없다. 혹은 그 실재의 빛나고 무서운 아름다움은 구토와 현기증과 혼돈의 악몽으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90여년 전의 <말로야의 구름현상>과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말로야의 구름 장면이 변함없이 감동적이라면 그건 그 아름다움과 기괴함이 시간적 연속성 안에서 변화나 보존 같은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 명백하게 일회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의 운동, 그 운동의 물질성, 어떤 찬란한 단절, 그러니까 산과 구름과 바다의 리듬이 만나 이루는 ‘소멸 중인 흘러넘침’이 우리를 감화시킨다. 그것은 재현으로 포괄되지 않는 실재의 영역이며 좀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해도 파멸(악천후) 직전의 타오름이다. 우리는 마리아가 젊음에 대한 질투로 헬레나를 거부하고 영원히 시그리드로 남고 싶어 한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헬레나를 시간적 연속성 안에서, 유사성의 맥락에서 시그리드의 거울 이미지 혹은 분신으로서, 혹은 나이든 시그리드로서 재현하는 것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명백하지만 증명할 수 없으며, 단순한 유사성도 아니고, “어떤 위세도 제거된 채 무상하게” 주어지며 “마침내 그 자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모든 언어의 끝에 있는 바로 이것!”을 “분위기”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밝은 방>). 그 말을 마리아에게도 쓰고 싶다. 마리아는 헬레나에게서 무언가에 대한 유사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차이로서 존재를 증명하는 어떤 분위기를 찾지 못해, 아니 찾아내기 위해 그토록 고통스러워한 건지도 모른다. ‘말로야 스네이크’의 움직임을 보는 우리가 모든 도식이나 관념을 뒤로하고 무력하게, 그러나 벅차오르게 느꼈던 그 감흥의 근원 또한 그 “분위기”의 경험과 조금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것!”, 마리아가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그리고 헬레나에게서 찾고자 했던 그것을 현실의 시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열망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말로야 스네이크> 공연을 앞두고 마리아의 대기실에 찾아온 젊은 감독은 23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마리아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그 인물이 나이를 초월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모든 것에 발빠르게 반응하는 인터넷 시대는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묻는다. 당신도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닌가? 영화는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지막 장면에 이른다. 무대로 돌아온 그녀는 극중 헬레나의 사무실에 앉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그러나 깊은 잔상을 머금은 표정을 짓고 있다. 지금 그 자리에서 마리아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젊은 감독의 패기 넘치던 단언은 틀렸다. 존재의 초시간성은 마리아가 찾아 헤매던 그 ‘분위기’와 오히려 가장 먼 거리에 있다. 과거의 거울도, 미래의 거울도 아닌, 지금 여기서 ‘소멸 중인 흘러넘침’을 육화하고자 하는 갈망은 시간의 초월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깊숙한 흐름 속에 육신을 힘껏 맡기고자 하는 욕망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보자. 빌렘과 마리아와 발렌틴, 아니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말로야의 스네이크’를 보았는가? 우리는 보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말하려고 한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카메라가 멈춰 선 마리아의 마지막 표정은 결국 그 실패를 깨달은 얼굴이다. 그 실패는 필연적인 것이다. 예술가는 신기루, 환영과 싸우며 그 ‘분위기’를, 설산의 찰나를 뒤덮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언제 어딘가 나타날 실재를 영원히 찾아 헤매는 숙명을 짊어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우리가 그 신기루와 환영을 실재라고 믿으며 도취되고 감동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소멸 중인 육체로, 궁극엔 죽음으로 그 실패와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실스마리아>는 젊음에 눈이 먼 어느 나이든 여배우의 뒤늦은 깨달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찌할 도리없이 그 실패를 껴안는 과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잔인하고 애잔한 영화적 헌사이자, 스스로도 그 대열에 서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야심찬, 그러나 가련한 고백이다. 그리고 그들에 비해 더없이 평범한 나는 내가 본 그 산과 구름과 바람의 움직임이 실재의 찰나였다고 착각하며 그 황홀함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가 내게 준 감흥이 인물들의 대화나 동선이 아니라 저토록 노골적인 풍경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달았다. 글로 그 풍경을 만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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