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4일, 투자배급사 리틀빅픽쳐스 엄용훈 대표가 사임했다. 그가 제작한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흥행 부진에 따른 결정이다. 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언론의 호평과 시사회 관객의 응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박스 경쟁 시기에서 정상 수준의 1/3 정도의 개봉관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그나마 받은 상영관은 조조와 심야시간대가 주를 이루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개봉했다”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1월21일 현재 상영관 수는 10개 남짓. 하지만 좌석점유율 60%를 상회할 만큼 관객의 입소문이 퍼지고 있고, 대관 상영도 줄을 잇고 있다. 제작사 삼거리픽쳐스 사무실에서 만난 엄용훈 대표는 “제작자로서, 영화 소비자로서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내는 아주 이상한 한국영화산업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고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상영관은 얼마나 남았나.
=14개 정도 남았다. 이중 단관 극장이나 지방 상영관은 장기상영하기로 했다. 현실이 아쉽긴 하나 멀티플렉스가 아닌 극장에서라도 영화를 틀 수 있다면 그걸 유지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 개봉한 지 불과 2주 만에 벌어진 상황이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1년 중 가장 많은 영화가 개봉하고, 시장 사이즈가 가장 큰 겨울 성수기에 개봉했기에 상영관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그럼에도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자사 계열사 영화들에 대한 쏠림 현상이 새로 진입한 영화들을 철저하게 차단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건 중소 배급사들은 성수기에 영화를 배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겨울 성수기에 배급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가 클 거라는 생각은 안 했나.
=당연히 경쟁이 치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작자와의 계약이 만료되고 새로 연장할 때 2014년 12월31일까지 개봉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개봉일을 12월31일 이전으로 앞당기는 건 가능하지만 그 뒤로 미루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많은 영화가 몰리는 시기라 할지라도 좋은 영화를 찾는 관객의 판단을 믿어보자.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가늘고 길게라도 가면서 상영관을 차차 늘려가는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영화의 낮은 예매율과 좌석점유율 때문에 상영관을 많이 줄 수 없었다는 게 멀티플렉스의 입장이다.
=예매율과 좌석점유율이 공정한 룰에서 나온 데이터라면 누가 거부하겠는가. 어떤 영화는 개봉일 2주 전부터 예매창이 오픈된 반면, 우리 영화는 개봉 직전에야 예매창이 열렸다. 예매 싸움에서 차별이 발생했고, 그게 왜곡된 데이터를 만들어냈으며, 그 데이터는 어른과 아이들이 손잡고 극장 가서 봐야 할 영화를 조조와 심야시간대로 배치시켰다. 어떤 부모가 아이들의 수면권을 침해당해가며 영화를 보러 가겠는가. 그러니 예매율이 올라갈 수 없게 되고, 좌석점유율 역시 낮게 나왔다. 그걸 명분으로 상영관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지.
-개봉 전, 예매창 사전 오픈 요청에 대한 극장의 반응은 어땠나.
=극장은 항상 예매창을 열기 어렵다는 얘기만 했다. 아예 처음부터 반관(퐁당퐁당)이라도 많이 받겠느냐, 상영관 수를 줄여 온관으로만 받겠느냐라는 제안을 해왔다.
-개봉 첫주 배정받은 스크린 수는 몇개였나.
=반관까지 포함해 205개. 원래 목표가 400개관이었으니 1/3 정도만 배정받은 셈이다.
-관객이 뒤늦게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대관 상영이 늘고 있고, 조조와 심야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좌석점유율이 60%대를 상회하고 있다. 상영관이 더 확대될 가능성은 없는 건가.
=확대해줄 수 있는지 극장의 의사가 궁금하다. (웃음) 지금까지 그랬듯이 확대냐, 축소냐 같은 의사 결정에 대해 배급하는 우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하기 편한 시간대에 보고 싶으니 상영관을 더 열어달라고 요구해도 그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데, 현재 거의 내려간 마당에 움직일까 싶은 회의감이 든다. 극장이 정말 관객의 반응에 둔감해진 건지 아니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마치 옆을 보지 못하게 시야를 가리고 그저 결승선만 바라보고 달리는 경마장의 경주마 같다.
-영화의 흥행 실패는 엄용훈 개인만의 책임은 아닌데 리틀빅픽쳐스 대표를 비롯해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 서울영상진흥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가 무엇인가.
=당연히 내가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사임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리틀빅픽쳐스 대표로 계속 있으면 앞으로 배급할 작품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까봐 우려됐기 때문이다. 여러 단체에 대한 사임도 마찬가지다. 단체 입장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싸움이 될 것 같아 내 정체성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가져가보자 생각했다. 하나는 지금까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영화를 만들어온 제작자로서 정체성, 또 하나는 영화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영화 소비자로서 정체성.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영화 소비자로서 제 권리 찾기 운동을 전개해나갈 것이다.
-창립작 <도가니>는 CJ라는 대기업와 함께, 두 번째 영화 <러브픽션>은 NEW라는 대형 배급사와 함께 제작했다. 앞의 두 작품과 달리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리틀빅픽쳐스라는 신생 투자배급사에서 진행됐다. 투자배급사를 운영하고, 직접 배급해보니 기존 파트너들과 어떻게 다르던가.
=당연한 얘기인데 공부 잘하고 힘 센 친구와 팔짱끼고 다니는 것과 순수하지만 힘은 없는 친구와 어울려 노는 것의 차이랄까. 영화 만드는 게 너무 힘드니까 대기업과 함께하면 제작에만 신경쓸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대기업과 함께 영화를 만들 때 발생하는 여러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틀빅픽쳐스를 만든 게 아닌가. 리틀빅픽쳐스 대표로서 경험한 건 유통과 관련된 조직이 작으면 작을수록 영화 개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영화 마케팅 비용이 총 13억원밖에 안 들었다. 사실 마케팅 비용을 적게 쓰고도 흥행했다는 소문이 나야 하는데…. (웃음) 그걸 보여주고 싶었고. 리틀빅픽쳐스 직원들은 굉장히 좋은 철학과 근성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앞으로 계속 도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리틀빅픽쳐스를 비롯해 인벤트스톤, 와우픽쳐스 등 중소 배급사들의 경쟁이 올해는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멀티플렉스는 관객이 찾는 영화에 스크린이 열린다고 말한다. 문제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좋건 나쁘건 많이 틀면 관객이 찾는 영화가 되는, 아주 이상한 구조가 됐다. 이걸 업계 안에서 바로잡을 수 없다면 영화 소비자로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여달라’고 얘기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이제는 관객도 왜곡된 데이터로 영화를 판단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런 문제를 만든 수직계열화라는 괴물 같은 구조를 입법을 통해서라도 바꾸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정책의 가장 대표적인 장점을 갖고 있는 영화산업이 규제개혁과 합리적인 원칙을 마련하는 일에는 가장 둔감해져 있는 것 같다.
-제작자로서 앞으로 많은 고민이 될 것 같다.
=내 영화 인생에서 단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는데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것 같다는 걱정이 든다. 반대로 몇번 쓰러지다보니까 두려움보다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용기와 인내심도 생긴다. 매 순간 정직함과 절박함을 잃지 않고 용기와 인내 그리고 지혜를 동원해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참 힘드네. 영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