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새해 소망
2015-01-29
글 : 김혜리

<와일드>는 배낭 멘 여자의 이미지가 종단하는 영화다. 건조 식량과 간이 정수기, 몇벌의 옷가지와 텐트, 반복해 읽을 책과 노트.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의 파란 배낭에는 그녀의 의식주와 정신이 몽땅 들어 있다. 한명의 인간이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자신의 등에 짊어질 수 있다는 사실, 나아가 짊어질 수 있는 부피를 넘어선 물건은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소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 예기치 못한 위안을 주었다.

12/29

둘러보면 피터 잭슨 감독의 ‘중간계 6부작’만큼 주제와 스타일이 일관된 장기적 연작 영화도 없다. 혹자는 피터 잭슨이, 두벌의 <스타워즈> 3부작을 세상에 내놓고 세 번째 3부작을 디즈니의 손에 위탁한 조지 루카스 병에 걸린 게 아니냐며 놀리기도 하지만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는 조지 루카스 외 다른 감독들도 메가폰을 잡았고 심지어 그들이 연출한 <제국의 역습>과 <제다이의 귀환>이 시리즈 중 수작으로 평가받았으므로 경우가 조금 다르다.

12월13일 일기에서 나는, 피터 잭슨과 동료들이 <호빗> 3부작을 톨킨이 창작한 순서를 거슬러 <반지의 제왕>의 직접적 프리퀄 겸 주석으로 무리하게 재편함으로써 완성도를 떨어뜨렸다는 의견을 적었다. 하지만 나는 잭슨의 중간계 6부작에 대해 “<반지의 제왕>은 좋았고 <호빗>은 별로였다”라고 딱 잘라 정리할 수는 없다. 영화 작가로서 <호빗: 다섯 군대 전투>(이하 <다섯 군대 전투>)의 피터 잭슨은 13년 전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의 피터 잭슨으로부터 멀리 떠나오지 않았다는 인상 때문이다. 아니, 심지어 <데드 얼라이브>(Braindead)를 만든 1992년의 피터 잭슨도 <호빗> 3부작 안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피터 잭슨은 애초에 톨킨의 세계를 추종자로서 충실히 복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화했다. 폭력과 유머의 묘사에서 특히 그렇다. 워낙 전인미답의 스크린 스펙터클이었기에 “구현해냈다”라는 사실이 결과물이 띠고 있는 명백한 개성을 가렸을 따름이다. 피터 잭슨의 손에 온전히 맡겨진 중간계의 ‘나대지’(裸垈地)는, 원작자 톨킨이 책에서 대체로 점잖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넘긴 전투 장면들이다. 오크의 목을 베는 수십 가지 기발한 방법, 트롤을 거꾸러뜨리고 찌르는 수십 가지 기술 안에서, 스플래터 고어 영화의 귀재 피터 잭슨의 잔혹하고 야한 취향은 활개를 친다. 오크와 트롤들은 악하다기보다 흉하고 우스꽝스럽다. 잭슨의 중간계 6부작에 산재한 스펙터클이 추구하고 있는 미도 장엄하고 우아한 쪽이라기보다는 B급 장르영화의 스릴과 감상성을 방대한 규모로 펼쳐 기어코 위용까지 획득한 경우다. 예컨대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하 <왕의 귀환>)에서 사자(死者)들의 대군이 쇄도하는 신을 세련된 CG 신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그것은 약간 조악하되 재미있고 통쾌하다. 피터 잭슨의 90년대 말 코믹 유령 호러 <프라이트너>가 소환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톨킨이 살아 돌아온다면 영화 버전의 유머에 사뭇 당황할 법하다. 반지원정대끼리 주고받는 농담은 종종 톨킨의 영지를 벗어난다. 가령 고블린의 내장이 튀어나오고 중추신경에 도끼날이 꽂혀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은 객석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을 부르도록 의도돼 있는데, 이처럼 짓궂은 (때로는 고약한) 유머 감각은 중간계 6부작이 짐작보다 훨씬 피터 잭슨의 취향에 입각한 특수하고 특정한 해석임을 방증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는 결론. <호빗> 3부작이 표명한 방대한 ‘결정판’을 향한 욕망은 이 영화의 천성과 썩 어울리지 않는다.

12/30

우리는 예술에서 미비한 조건과 시스템의 압박이 종종 창의성의 뇌관을 터뜨린다는 소문을 들어왔다. <다섯 군대 전투>의 피날레를 <왕의 귀환>의 클라이맥스와 견주어보다가 나는 이것이야말로 반대의 예가 아닐까 생각했다. 피터 잭슨 감독이 CG의 마법에 매혹돼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호빗: 뜻하지 않은 여정>에 붙인 코멘터리에서 잭슨은 <반지의 제왕> 3부작에 착수했던 13년 전에는 기술과 돈의 한계로 양껏 쓰지 못한 CG의 함량을 높였다는 점에 진심으로 만족을 표했다. 잭슨은 <다섯 군대 전투>에서 오크족의 수장 아조그를 애초 실제 배우에게 연기하게 했지만, 다른 오크들과의 어울림을 고려해 찍어놓은 분량을 포기하고 CG 캐릭터로 대체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 입장에서 <다섯 군대 전투>의 결전을 구경하는 동안 나는 자꾸 피터 잭슨의 풍족한 도구 상자를 빼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인물이 저토록 위태롭게 도약하고 추락하는데, 트롤과 야수가 육박해오고 무수한 팔다리가 수숫대처럼 잘려나가는데도 왜 나는 손에 땀을 쥐지 못하는 걸까? 어째서 통증에 빙의해 움츠리거나 캐릭터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는 걸까? 아주 단순한 답은, CG 비율이 커진 <다섯 군대 전투> 속 전사들과 전투가 애니메이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모든 애니메이션영화는 깊은 감정과 스릴을 끌어내지 못한단 소리냐”라는 반문은 초점을 벗어난다. 여기서는 실사영화가 설정한 리얼리티의 평면 위에서 ‘애니메이션처럼’ 붕 뜨는 요소를 거론하는 중이다.

장시간 특수분장을 한 단역배우들이 앞줄에 선 <반지의 제왕> 시절의 오크들에 비하면 <호빗>의 CG 오크들은 종이호랑이다. 덜 무섭고 덜 징그럽고 심지어 패퇴할 때 덜 애처롭다. 요정과 난쟁이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무슨 일을 겪어도 ‘괜찮아’ 보인다. 결국 선한 쪽이 승리하리라는 추정은 <왕의 귀환> <다섯 군대 전투>나 마찬가지지만, 과정의 흥분이 반감됐다. 한번 눈에 의심이 씌어서인지 몰라도 급기야는 인물과 액션뿐 아니라, 영화를 통해 전세계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뉴질랜드라는 로케이션조차 그린 스크린 위의 픽셀 그림처럼 보인다. 확실히 예전 반지원정대가 걷고 구르던 언덕과 산지의 공간감은 <호빗> 3부작에 이르러 평평해졌다. 저절로 존재하는 자연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액션의 효율적 세트로 설계된 테마파크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맹세코 이것이 중간계 6부작에 대한 나의 진짜 마지막 일기다.

12/31

1월1일이 마감과 겹치는 바람에, 올해는 새벽 영화를 보고 매년 첫 아침 속으로 나선다는 작은 규칙을 어기게 됐다. 제야의 종을 들으며 수신자도 제각각인 새해 영화 소원의 목록을 적는다.

필름과 영사기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시나리오작가들이 환경부 직원도 아닌데 재활용은 그만 시키고 자립한 스토리를 쓰게 해주세요. 그래도 꼭 속편 행진이 계속 돼야 한다면 무의미하고 차별성 없는 거추장스런 부제라도 떼주세요. 당신이 현재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면 남성주인공을 한번 여성으로 바꿔보고 어떤 흥미로운 변화가 발생하는지 보세요. “나는 좋지만 대중은 싫어할 거야”라는 전제를 거두고 관객을 자기보다 지적인 존재로 상상하며 대중영화를 기획해주세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극장이 사라지는 지방에 ‘사업장’이 아닌 조용한 광장으로서 동네 영화관이 문 열게 해주세요. 스크린을 통해 미국과 한국 아닌 ‘제3세계’를 더 자주 여행하게 도와주세요. 영화관에서 휴대폰의 빛과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여름에는 앞줄 관객의 부채질에 시야를 침범당하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영화 보도 자료가 참여한 모든 스탭들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고 언론에 전달하게 해주세요. 멀티플렉스 직원들이 단정한 용모와 공손한 인사보다 영사 품질과 상영관 질서유지에 수고하게 해주세요.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봐야만 진지한 관객이라고 윽박지르는 공기도, 여운에 잠긴 가장자리 관객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눈치 주는 분위기도 함께 없어지게 해주세요. 관객수를 걸고 감독과 배우가 이벤트를 공약하는 이상한 풍경이 줄어들게 해주세요. 20자평과 별점은 영화 기자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붙이는 추신에 불과하니 영화 저널리즘을 그것과 동일시하지 말아주세요. 본인의 마음에 든 영화를 비판한 평에 필자를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다는 대신, 나는 그 영화를 왜 좋아하는지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그편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영화 안에서 서로를 널리 이롭게 하도록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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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간이란?

일로 바쁘거나 이혼한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미안함을, 선물이라든가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으로 갚으려 하기 쉽다. <아메리칸 셰프>의 요리사 칼(존 파브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아들 퍼시(엠제이 앤서니)의 생각은 좀 다르다. SNS에 어두운 아빠에게 트위터 사용법을 가르쳐준 날, 열살 소년 퍼시는 불현듯 오늘은 진짜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고 말한다. 여느 때와 다른 점을 몰라 의아해하는 칼에게 아들은 설명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배웠으니까.” 어린이도 주는 기쁨과 도움을 주는 보람을 안다. 아이들이란 오직 받기만 바라는 응석받이라는 생각은 단견이다. 그리고 얼마 후 칼은 초심자를 위한 요리와 요식업의 기본을 아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한다. 상호 가르치고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은, 관계를 보장하는 튼튼한 고리다. 연인끼리도 가족끼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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