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없애고 나니 걷는 일이 많아졌다. 버스 정류장 한두개 정도의 거리는 가볍게 걸어가게 되고, 외출을 준비할 때면 심혈을 기울여서 음악을 준비한다. 자동차에서 듣는 음악도 좋지만 걸으면서 듣는 음악도 무척 좋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들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한다. <500일의 썸머>에서 조셉 고든 래빗이 생전 처음 만나는 동네 사람들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처럼 짜릿한 감정이 이어폰으로 흘러들어온다(실제로 그렇게 했다가는 귀싸대기를 여러 번 맞고 미친놈 취급당하기 딱 좋지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무덤덤하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리드미컬하게 변한 것처럼 보인다.
자동차가 없어서 불편한 점이라면 외출할 때마다 여행 가방을 꾸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 성격이 문제이긴 하다. 어떠한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집 밖을 나설 때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외출했는데 갑자기 손톱이 깎고 싶어지면 어떡해? 손톱깎이를 챙겨야 한다. 술을 먹다가 갑자기 소설 쓰고 싶어지면 어쩌지? 노트북을 챙기면 되지. 노트북의 배터리가 모자란다면? 그럼 어댑터도 챙기고…. 아이패드는 없어도 될까? 있으면 좋지 않을까? 별로 무겁지는 않으니까…. 책은 안 보게 되겠지? 흠, 그래도 한권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좋아, 그럼 이왕 들고 나가는 거 소설 한권, 비소설 한권. 메모지도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 필통과 노트를 들고 나가자. 필통에는 샤프펜과 연필과 그림을 그릴 만한 로트링펜과…,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문득 회의가 든다. 아니, 밖에 있는 시간은 겨우 대여섯 시간일 텐데 이렇게 짐을 많이 들고 나갈 필요가 있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자동차가 있던 10년 정도를 제외하면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나는 거대한 배낭을 메고 외출을 한다. 들고 나간 도구들의 사용 빈도는 1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당황하는 것보다 내 어깨가 무거운 것이 훨씬 낫다. 좀더 발전했다가는 (식당을 찾지 못할 때를 대비한) 취사도구와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때를 대비한) 텐트 세트를 들고 나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뭔가 짊어지고 걷는 걸 좋아하긴 했다. 술에 취하면 먼 길을 걸어서 갔고, 술이 깰 때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배낭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인생 전체가 배낭여행에 가깝지 않나 싶다. 군대에 있을 때는 걷는 게 제일 좋았다. 동료들은 행군을 무서워했지만 나는 그 어떤 일보다 걷는 걸 잘했다. 한번은 함께 걷던 동료가 탈진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의 군장까지 짊어지고 걸은 적도 있다. 걷고 있으면 하염없어서 좋다. 그냥 왼발 다음에 오른발이 가고, 오른발 다음에 왼발이 가면 된다. 그렇게 걸으면 시간이 흘러가고 내가 원하던 곳에 도착하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군대에 있을 때는 음악을 들을 수 없으므로 내가 아는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걸었다. 이승환의 노래들, 김현식의 노래들, 동물원의 노래들이 흥얼거리기에 좋았다. 그때 흥얼거리던 노래들의 가사는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잘 짜여진 사고와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사고는 고운 모래밭에 말랑말랑한 베개를 베고 누워 반쯤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거나, 솔밭에서 낮잠을 청할 때 더 잘 이루어진다. 걷는 것은 행동이고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런 바람, 구덩이투성이인 길, 가볍게 흔들리는 밀밭, 자줏빛 체리, 잘려나간 건초 또는 꽃이 핀 미모사의 냄새, 이런 것들에서 끝없이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정신이 분산되기도 하며 계속되는 행군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생각은 이미지와 감각과 향기를 빨아들여 모아서 따로 추려놓았다가, 후에 보금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것들을 분류하고 각각에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26살에 인생의 모든 것을 잃고 4천km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이하 ‘PCT’)을 걸어간 셰릴 스트레이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와일드>는 고통스러운 걷기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전부였던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셰릴(리즈 위더스푼)은 삶의 모든 의미를 내려놓고,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걷는다. 그녀가 PCT를 시작한 이유는 이전과는 다른 통증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헤로인 주사를 맞던 쾌락의 발목에 벌을 주기 위해서, 남자들을 유혹하던 자신의 아름다운 몸에 상처를 내기 위해서, 그녀는 들기도 힘든 배낭을 짊어지고 계속 걷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걷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도 계속 걸었다. 영화 내내 사이먼과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를 흥얼거리는 셰릴을 보면서 나도 따라부르고 있었다. “못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어요. 그럴 수 있다면 그럴 거예요.” 그럴 수 있다면 그러겠지만, 그럴 수 없어서 나는 못이 되어서 두들겨 맞고 싶어요. 나를 상처내고 내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나는 걸어갈 거예요. 하이킹은 산책과 다르다. 적당히 생각하고 적당히 걷는 게 아니다. 무모하게 걸을 때 통증과 상념은 극에 달한다. 통증은 상념을 멎게 만들고, 상념은 통증을 잊으려 한다. 생각을 잊기 위해 걷고, 걷기 위해 생각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 한발 한발이 완성된다.
PCT 초반, 거의 이삿짐 수준의 짐을 꾸린 셰릴에게 전문가 선배들이 충고한다. 신발은 자신의 발보다 조금 큰 것을 사는 게 좋다. 그리고 짐은 최대한 간단하게 꾸리는 게 좋다. 셰릴의 짐을 풀어헤치고 하나씩 점검을 해준다. 물건들을 하나씩 보면서 과연 필요한 것인지 묻는다. 한번도 쓴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전문가가 결정적인 조언을 해준다. “책에서 읽은 부분은 불태웠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셰릴에게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을 빼앗아 든 전문가는 과감하게 앞부분을 찢어버린다. 이미 지나온 길의 지도는 필요 없다. 그것은 짐이 될 뿐이다. 가이드북의 몇 페이지를 찢어버린다고 해도 무게가 얼마나 줄어들겠나 싶지만 그것은 아마도 마음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전문가는 찢은 페이지를 불 속으로 던져버린다. 마음이 통쾌하기도 했다. 전문가가 내 배낭의 물건도 정리해주면 좋기도 하겠지만…, 과연 그걸 찢을 수 있을까.
PCT 방명록에 남긴 셰릴 스트레이드의 글 중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인용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몸을 초월할 수 있을까. 셰릴이 PCT를 걷게 된 것도 그런 시도였을 것이다. 몸을 초월하기 위해 셰릴은 4천km가 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엘 콘도르 파사>에는 이런 가사도 있다. “인간은 땅에 묶여 살면서 가장 슬픈 소리를 내뱉지요.” “나는 도시의 거리가 되기보다는 숲이 되고 싶어요.” 하염없이 걸어야 하는 인간의 몸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