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블라디가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장 뤽 고다르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1966)을 통해서다. 고다르가 극단적인 영화운동인 ‘지가 베르토프 그룹’ 활동을 하기 바로 직전의 작품으로, 초창기의 다른 고다르 영화들처럼 팝아트 스타일의 현란한 색상과 사회비판적인 테마가 강하게 표현돼 있다. 마리나 블라디는 여기서 ‘그녀’를 상징하는 여성으로 나온다. ‘그녀’는 하루 종일 쇼핑만 하고 돌아다니는 파리의 여성이기도 하고, 그런 여성들이 상징하는 파리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현대 소비사회 전체이기도 하다. 마리나 블라디는 뭔가를 열심히 사고, 소비하기 위해 ‘검은돈’을 버는데, 관능적인 육체와 달리 표정은 권태의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심심해 보인다. 관능적인 육체와 무관심한 태도의 대조적인, 혹은 이중적인 인상은 이후 마리나 블라디의 스크린 이미지로 오래 남아 있다.
장 뤽 고다르의 ‘그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의 마리나 블라디 캐릭터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권태의 인물’, 곧 대부분 모니카 비티가 연기한 인물과 비교되는데, 달랐던 점은 관능성에 있다. ‘블라디의 그녀’는 ‘비티의 그녀’처럼 마른 몸매의 지적인 여성이 아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졌지만, 공식적인 직업은 없고, 경제적으로는 남편에 의존해 있는 ‘보통’ 여성이다. 극중 남편도 보통의 노동자임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줄곧 푸른 셔츠만 입고 나오는 정비공이다. 노동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블라디는 권태 속에 빠져 있는데, 육체의 건강함은 그런 권태의 무력감을 더욱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불균형이 그녀의 어두운 비밀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은 그녀의 ‘평범한’ 하루를 좇아간다. 오전에 아이들을 보육원에 ‘버리다시피’ 맡기고, 그녀는 쇼핑을 다닌다. 돈이 필요하자, 오랫동안 그랬던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매춘을 하고, 그 돈으로 오후에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손톱을 가다듬는다. 미용실의 친구가 주선하자, 이번에는 미국인 사업가를 상대로 또 매춘을 한다. 두 프랑스 여성이 미국 항공기 가방을 머리에 쓰고, 미국인 남자를 상대로 매춘을 하는 상징적인 장면은 유명하다. 그러고는 낮에 쇼핑하며 봐뒀던 유명 브랜드의 옷을 산다. 이쯤 되면 그녀는 보드리야르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소비주의의 포로’, 곧 소비함으로써 존재하는 현대사회의 특징적인 인물인 셈이다.
블라디는 여기서 시종일관 무표정한 모습으로 나온다. 남편과 이야기할 때도, 우는 아이들을 달랠 때도, 심지어 매춘을 할 때도 그녀의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다. 유명 브랜드의 옷을 살 때 약간 보였던 미소가 거의 유일한 변화다.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한 여성, 오직 소비하며 존재를 확인하는 자본주의적 페티시즘의 희생자, 동시에 묘한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이미지를 통해 블라디는 누벨바그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녀의 신비한 성적 매력의 스타성을 발견한 감독은 이탈리아의 루치아노 엠메르이다. 블라디의 첫 출세작인 <유리창의 여자>(1960)를 통해서다. 네덜란드의 탄광이 주배경인 이 영화에서 블라디는 이탈리아 이주민 광부들을 주로 상대하는 암스테르담의 매춘부로 나왔다. 블라디는 가난한 이탈리아 노동자와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다. 이 영화를 통해 블라디의 관능, 소외, 무관심 등의 개성들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유리창의 여자>의 성공 덕분에 블라디는 단번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성이 됐다. 블라디를 신성을 넘어 유럽의 스타로 성장하게 만든 작품은 이탈리아의 마르코 페레리가 만든 <여왕벌>(1963)이다. 결혼을 앞둔 보수적인 여성이, 자신은 ‘마리아의 딸’임을 강조하며 약혼자의 육체적 접근을 단호하게 차단하더니, 결혼 후에는 단 하루도 사랑을 거르지 않으려는 ‘여왕벌’로 돌변하는 코미디다. 결혼과 종교라는 제도가 서구 사회의 ‘위선’임을 맹렬히 비판하는 페레리의 코미디에서 블라디는 성처녀 같은 순결한 이미지와 육체의 화신 같은 퇴폐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블라디는 <여왕벌>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유럽의 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그녀’
마리나 블라디는 러시아계 프랑스인이다. 부모가 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부모 모두 아티스트였다. 부친은 러시아의 오페라 가수였고, 모친은 발레리나였다. 10대 때부터 연기자로 활동한 블라디는 배우이자 감독인 로베르 오셍과 결혼하며 본격적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7살 때다. 단역, 조역에 머물던 블라디가 행운을 잡은 것은 앞에서 본 대로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 감독들 덕분이었다.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 블라디는 오슨 웰스의 <심야의 종소리>(1965)에서 반군 리더의 아내로 출연하며 활동영역을 더욱 넓혔고, 고다르와의 협업으로 명성은 세계로 퍼져갔다. 이럴 때쯤 블라디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한 남자를 만난다. 바로 옛 소련의 배우이자, 시인이며, 특히 저항가수로 유명한 블리디미르 비소츠키다. 우리에겐 <야생마>를 부른 가수로 유명하다.
블라디와 비소츠키는 1969년 결혼한다. 31살 때이고, 두 사람은 동갑내기다. 기타 하나만 들고 포효하듯 노래하는 비소츠키는 이미 러시아를 넘어 유럽의 스타였다. 당시는 냉전의 긴장이 팽팽할 때였고,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기러기처럼 간혹 만나는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이런 정황들이 알려지며 냉전의 부조리는 다시 유럽 시민들에게 각인되고, 두 사람은 시대의 희생양처럼 비쳐지기 시작했다.
여론은 국경을 넘어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편이었다. 사람들은 자유를 상징하는 프랑스 여성과 반항을 상징하는 러시아 남성 사이의 사랑을 낭만화했다. 블라디는 프랑스공산당의 협조를 받아 모스크바 입국의 자유를 얻어냈다. 그럼으로써 비소츠키의 입장도 과거와 달리 점점 자유로워졌다. 알다시피 비소츠키는 당국의 통제 때문에라도 앨범을 정식으로 발매하지 못했던 가수다. 친구들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노래들이,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은밀히 퍼져나가며 이름을 알린 경우다. 그는 이후 프랑스말 노래도 부르고, 또 두 사람이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비소츠키가 1980년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10여년에 걸친 관계는 끝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억지스러운 이데올로기의 폐해는 뚜렷이 각인됐다. 러시아의 대도시인 예카테린부르크 시내에는 비소츠키의 동상이 있는데,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그의 옆에 앉아,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긴 머리의 여성이 마리나 블라디다. 정치적 부조리를 증거하는 두 사람의 낭만적 사랑은 미래 속에 영원히 각인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