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은 연소와 다르다. 폭발은 존나 급격한 연소다. 대비할 틈을 허용하는 연소와 달리, 폭발은 대비할 틈을 주지 않는다. 불이 나면 도망갈 시간이라도 있지만, 가스 폭발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폭발은 순간의 미학이고, 순간의 한방을 위해서 몇날 며칠이고 숨어 기다리는 미학이다. 마치 당신의 퇴근시간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도망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순식간에 당신을 급습하는 가스불꽃처럼. 대부분의 영화들이- 관객이 다음 장면을 대비할 겨를을 허용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서서히 태워나가는 연소 영화라고 한다면, 그에 반해 폭탄처럼 작동하는 영화들이 있다. 구분하기는 매우 쉽다. 전자의 반응이 “음, 그럴 줄 알았어”, “오 상당히 교훈적이군”이라면, 후자의 반응은 “아 띠발, 이게 뭐야”, “옴마야 개심쿵 썅”일 테니깐. 폭탄 영화는, 관객에게 생각하고 예측할 겨를을 주면서 주제와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가 아니다. 폭탄 영화는 관객에게 생각하고 도망갈 겨를조차 빼앗으며, 안구와 시신경(나아가 무의식)에 테러만을 전달하는 영화다.
내러티브라는 유도체
초기 폭탄 영화들은 코미디의 형식으로 둔갑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채플린과 키튼의 영화들은 말 그대로 빵빵 터뜨린다. 물론 차이는 있다. 채플린이 허영과 위장으로 폭탄을 숨겨놓는다면, 키튼은 말 그대로 몸을 포탄처럼 날리고 던지고 투하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배꼽을 폭파시킨다. 비평가 데이비드 로빈슨이 키튼의 유머를 “탄도 개그”라고 칭한 것은 매우 정확한 표현이렷다. 초기 폭탄 영화는 그만큼 웃음을 투하시키는 포병대처럼 조직되었다. 물론 가장 악명 높은 포병대는 로렐/하디 콤비일 것이 아수라장다. 그들은 단지 슬랩스틱 코미디언들이 아니다. 그들은 소심한 행동과 쪼잔한 복수가 얼마나 큰 파국으로 치닫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자비하게 방관자들까지도 이 폭격에 끌어들일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융단폭격”의 창시자가 되었다(<두 선원> <빅 비즈니스>). 개그는 그 자체로 배꼽으로 던져지는 폭탄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은유가 아니다. 폭탄 영화는 분야별로, 그리고 전략과 장치에 따라서 세부 연구들이 요구되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이다. 예컨대 초기 코미디 시기에 가장 많이 연구되던 분야는 바로 뇌관이다. 웃음을 터뜨리고, 배꼽을 폭파시키기 위해선 적절한 타이밍의 격발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채플린이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개그는 “타이밍”이다). 우린 이렇게 분류해볼 수도 있다. 로렐/하디 콤비와 키튼은, 접촉하는 순간 격발하는 즉발신관을, 채플린은 허영과 허풍 속으로 무심코 걸어들어가는 폭탄을 위해 시한신관을, 그리고 해럴드 로이드는 스릴을 통해서 언제나 한 박자 늦게 격발하는 지연신관을 개발했다고. 물론 폭탄 영화들은 장약의 개발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가장 열과 성을 다해 장약을 개발했던 쪽은 실험영화 작가들인데, 예컨대 그들은- 장전되고 던져지고 투하되는- 배우의 몸뚱이에 의존함이 없이, 순수하게 빛이나 이멀전으로만 구성된 장약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일찍이 폴 샤리츠의 플리커 작품들이 그러할 것이고, 와카마쓰 고지/아다치 마사오의 그 유명한 컬러 프린트 어택(흑백 프린트 중간에 컬러 프린트를 급작스럽게 삽입하는 폭파공법이다)도 좋은 예일 것이다. 빛과 색 자체를 장약으로 삼는 이러한 폭탄들의 개발은, 폭약사에 있어서 EMX(이멀전 폭약)의 개발에 맞먹는 발전이다. 그들의 폭탄은 말 그대로, 우리의 망막에 들러붙고, 그 뒤까지 뚫고 들어와 우리의 의식을 교란시키고 끝내 폭파시키는, 안구의 벙커버스터다.
하지만 개발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분야는, 뇌관도 장약도 아니라 유도체 분야였다. 사실 장약과 뇌관은 어느 정도까지만 갖추어지면 금세 상향 평준화에 이르지만, 유도체는 기술력과 상상력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전력차를 드러내지 않는가(실제로 북한이 핵탄두 몇개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미국은, 북한이 장거리 유도체를 개발했다는, 그래서 미국 본토까지 ICBM이 직송배달된다는 소식에는 눈 하나 깜짝하고, 눈 둘도 깜짝할 것이다). 군사전략에서도 전력차의 독립변수가 되는 유도체, 영화에서 그것은 내러티브다. 내러티브는 이야기, 감정, 이미지를 전달하는 유도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잘 알려진 방식은, 스멀스멀 내러티브다. 한때 영화팬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작품 <엘리펀트>(감독 구스 반 산트)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학교의 지루한 일상들이 나열된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 잡담을 하고, 누구는 연애를 하고, 누구는 다툰다. 하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정상인 것 같은 이 일상 뒤에는, 꼭 집어서 뭐라 말하기 힘든 불길함이 스멀스멀 배양되고 있다… 고 생각하는 순간, 빵. 총이 난사된다. 평화롭게만 보이던 학교는 순식간에 학살장으로 급변한다. 말 그대로 빵. 터진 것이다. 그 불길함이, 그 불안이. 이 한방, 이 한탕을 위해서, 1시간 이상을 숨어서 기다린 폭탄, 그 끈질김과 집요함이 바로 유도체다.
사실 스멀스멀 잠행 유도체의 장인들은 공포쪽에 많이 포진해 있다. 기형아들의 인간성 묘사에 치중하면서 마지막 한방을 기다리는 <프릭스>의 토드 브라우닝, 분위기만 잔뜩 주고 정작 칼질은 몇번 안 하는 <할로윈>의 존 카펜터 등등. 사실 사다코가 몇번 등장하지도 않는 <링>의 작가 나카다 히데오도 훌륭한 유도체 제작자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스탠리 큐브릭! 큐브릭의 내러티브는 언제나 한방을 노린다. 그리고 그것은 “편안하게 영화 좀 보자”고 안심하고 있던 당신의 안구를 뚫고 들어가, 뇌를 두 동강내는 내러티브다. 핵폭발의 순간(<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피홍수의 순간(<샤이닝>), 자살추락의 순간(<시계태엽 오렌지)까지, 이야기를 최대한 지루하고 반복적으로, 그리고 안전해 보이지만 긴장감을 잃지는 않게 충분히 대칭적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하긴 인공지능 컴퓨터가 선상반란을 일으키기까지- 아무 대사도 없는 원숭이 도입부 40분을 포함해서- 근 2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역대 최고의 스멀스멀 SF영화(<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만든 분이니,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유도체 개발에 진정 미친 감독은 크로넨버그다. 그는 인간과 기계가 결합하면, 얼마나 우생학적이고 진보적이며 또 그만큼 비극적인 유도체가 배양되는지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는 몸뚱아리에 비디오테이프(<비디오 드롬>)나 게임포트(<엑시스텐즈>)도 심어보았고, 몸뚱아리를 전송도 해보았으며(<플라이>), 말 그대로 충돌의 순간을 향해 폭주하는 자동차 미사일도 만들어보았다(<크래쉬>). 크로넨버그는- 이성과 지능을 그 내비게이션으로 삼는- 인간 미사일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크로넨버그 영화엔 생각보다 많은 폭발의 이미지가 있으니, 찾아보는 건 숙제). 요컨대 큐브릭이 탄도미사일에 미쳐 있었다면, 크로넨버그는 순항미사일에 미쳐 있었다. 전자가 진화의 중력을 이용해서 탄도곡선(대칭형 포물선)을 그린다면, 후자는 중력을 거스르며 경로를 변경하거나 이탈한다.
미사일 영화에서 지뢰 영화까지
미사일 영화의 궁극은 지뢰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유도체는 보이지 않고, 이미지에 숨겨져 당신의 시선을 집요하게 기다리는 유도체이기 때문이다. 칸에서 상을 받았다는 둥 <아무르>가 어쩌고, 예술영화가 어쩌고 하는 식으로 알려져만 있는 미하엘 하네케는, 사실 가장 지독한 지뢰 영화를 만들던 작가 중 한명이다. 그에겐 독특한 폭파공법이 있다. 윤기나는 가전기구 표면, 번지르르한 대리석 바닥처럼 매끈한 면들에 맺히는 부르주아들의 불안과 충동이 점점 화약으로 농축된다. 그것은 표면들이 매끈하면 매끈할수록, 관계가 냉각되면 냉각될수록, 점점 가속화하는 원죄의 동결농축기다(<7번째 대륙>). 현대 부르주아의 가장 큰 원죄는 소통불능이다. 왜냐하면 미디어 혹은 프레임(사진, 비디오, TV…)이 이미 그 동결농축기이기 때문이다(<베니의 비디오>). <퍼니 게임>은 그의 가장 정교한 지뢰 영화다. 충동과 이성을 겨루는 게임을 자동합법장치로 삼는, 그래서 영화의 스크린마저 동결농축면으로 삼아 심지어 반칙까지 되돌릴 수 있는, 날아다니는 지뢰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불한당들이 영화 자체를 거꾸로 돌리는 이 장면은 얼마나 큰 후폭풍을 남겼는지, 영화를 본 지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통이 터진다). 불행히도 폭탄 영화의 많은 유산들은, 지금 멀티플렉스엔 ‘반전’이라는 희미한 형태로만 남아 있다. 폭파를 하되, 표값을 내고 들어온 관객의 (정신적/미학적) 안전을 고려한 일종의 타협책이리라. 왜 폭탄 영화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나? 라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너무 쉬워 안타깝다. 그 대답은: 우리가 이미 폭발에 너무 익숙해져버렸거나, 아니면 진짜 폭발은 잘 안 팔리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