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연주자를 위한 공포영화? <위플래쉬>에 대해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영화보다 재즈라는 음악을 제대로 들려주고 보여주어 짜릿했다”라고 평가하는 재즈평론가 황덕호는 그 안에서 악마와 결탁할 수밖에 없는 밴드 리더, 폭군 플레처 교수의 그림자를 본다.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음악대학 신입생과 그를 광기로 몰아넣는 악마와도 같은 교수의 이야기. 황덕호는 그 이상으로 재즈에 대해 깊숙이 들어가 ‘재즈 음악인들’의 여러모로 곤궁한 현실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플래쉬>를 향한 색다른 접근법이 여기 있다.
뉴욕에 위치한 최고의 재즈학교 셰이퍼 음악원(물론 이 학교는 가상의 학교다). 이 학교의 1부 리그 빅밴드에 해당하는 ‘스튜디오 밴드’의 주전 드러머 자리를 가까스로 따낸 주인공 앤드류 니먼(마일스 텔러)은 어느 날 친척들과 저녁 식사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의 대화는 재즈 음악인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음악이라는 건 주관적인 건데 잘하고 못하고를 구분할 수 없는 거 아니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재즈란 것은 먹고살기에는 힘든 직업이지.”
심지어 앤드류를 평소에 잘 이해해주던 아버지마저도 전설의 색소폰 연주자인 찰리 파커를 두고 아들에게 한마디 한다. “아무리 그래도 서른네살에 약물로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인생의 모델이 될 수는 없지 않니?” 이런 의견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던 앤드류는 계속되는 주변 사람들의 편치 않은 시선에 결국 식탁에서 먼저 일어나고 만다.
재즈에 미친 미치광이 연습벌레들
다른 의견들이야 무시해도 되지만 “재즈란 먹고살기 힘든 직업”이란 말은 재즈 음악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이기 때문이다.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가 활동했던 재즈의 황금시대에도,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한해 몇십 만명의 인파가 몰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21세기 한국에서도 재즈 음악인의 곤궁한 삶은 변치 않는 진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로 재즈를 듣는 사람들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모두들 재즈를 이야기하지만 재즈를 경청하는 사람들,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다.
그럼 왜 이 음악을 연주하는 걸까? 그 이유도 간단하다. 오로지 재즈만이 그들의 미적 양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하다가 악기를 잡은 이상 그들은 재즈라는 음악의 어느 수준에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것이다. 일반적인 팝음악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는 기이한 코드 진행과 복잡한 리듬을 손에 완전히 익혀서 그것을 즉흥연주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싶은, 무모하고 철없는 목표를 삶의 이유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재즈 음악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러한 인생 태도는 재즈동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이 보기에 재즈 연주자란, 앤드류의 식탁에서 이야기가 오갔듯이, 항상 일거리가 없어서 여기저기 빈둥거리거나 하루 종일 마약과 술에 절어 있고 기껏해야 영감과 흥에 의해, 그것도 약물의 힘을 빌려 즉흥적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재즈 연주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음악만을 생각하고 연습한다. 이 말이 너무 과장이라고 느껴진다면 이런 전제를 달고 싶다. 우리가 익히 이름을 알 만한 유명 재즈 연주자들일수록 그들의 삶은 창작과 연습 시간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마약, 술, 여자 이야기는 실상 그들의 음악에 비한다면 부록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자기파괴적 삶을 결코 지지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패륜아로 비난하고도 싶지 않은 것은 재즈란 음악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 대해 세상이 별로 보상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도 최소한 프랑수아 사강처럼 그들 스스로를 파괴시킬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재즈 음악인들은,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악마와 손잡을 공산이 크다. 쳇 베이커 밴드의 피아니스트였던 러스 프리먼이 노년에 그들의 젊은 시절을 “어리고도 어리석었다”라고 회고했듯이 그들이 헤로인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그 약물이 그들을 찰리 파커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음악적(하지만 그릇된) 열망 때문이었다. 파가니니 혹은 로버트 존슨 등 음악사에서 간간이 등장했던 악마와 손잡은 음악가의 이야기는 다양한 이유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그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을 것 같은 초자연적인 능력, 바로 완벽한 연주력이었다. 그들은 완벽함을 손에 쥘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치룰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완벽함을 손에 쥐는 과정에서 재즈 연주자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콩쿠르라는 제도를 통해 경쟁한다면 재즈 연주자들은 늘 벌어지는 일상적인 잼세션을 통해서 경쟁한다. 그 경쟁이 가장 치열한 도시는 역시 뉴욕이다. 영업이 끝나고 잼세션이 벌어지는 클럽에는 매일 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젊은 재즈 연주자들로 북적인다. 참가자들이 선착순으로 노트에 이름을 적고 잼세션 마스터는 악기별로 한 사람씩 무대 위로 불러 즉흥 잼세션을 벌인다. 보통 잘 알려진 스탠더드 넘버를 연주하지만 곡의 조성과 템포는 마스터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정한다. 쫓아오지 못하면 바로 아웃. 다음 연주자가 냉큼 올라온다. 이런 잼세션을 ‘잘라내기 시합’(Cutting Contest)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경쟁에서 지속적으로 오래 살아남아야 유명 밴드 리더의 눈에 띄게 되고, 그래야 재즈 연주자는 앤드류의 표현을 빌리자면, 드디어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미치광이 연습벌레들의 살벌한 전쟁터가 바로 재즈동네다.
“사람 좋으면 꼴찌야”
‘스튜디오 밴드’의 지휘자 플레처 교수(J. K. 시먼스)는 앤드류에게 찰리 파커를 전설의 닉네임 ‘버드’로 만든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잼세션의 전쟁터에서 베테랑 드러머 조 존스가 파커에게 던진 심벌즈였다. 이 유명한 일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찰리 파커의 일대기 <버드>(1988)에서도 화두로 등장하는데 당시 애송이였던 찰리 파커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날아간 존스의 심벌즈는 파커로 하여금 미친 듯이 연습하도록 만들었고, 그것이 결국 ‘버드’를 만들었다는 것이 플레처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그의 이야기는 무릇 스승이란, 선배란, 밴드 리더란 제자, 후배, 밴드 단원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묵사발내야 하며 그 수모를 이겨내야만 제2의 찰리 파커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덧붙인다. “영어로 된 제일 몹쓸 말이 뭔 줄 알아? 바로 굿잡(good job, 잘했어)이야. 이 말 때문에 오늘날 재즈가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의 이러한 견해는 현실적이다. 재즈 역사상 최고의 밴드 리더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평판을 듣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악마와 결탁한 자들이다. 플레처 교수가 보여주듯- 그가 사용하는 말들은 주로 이렇다. 호모 자식, 유대인 새끼, 아일랜드 촌놈, 거의 범죄 수준이다- 그들은 밴드 멤버 중 누군가가 실수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육두문자를 날린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당시 밴드 멤버였던 존 콜트레인에게 손찌검을 했고 그럼에도 콜트레인 이후에 들어온 색소포니스트 행크 모블리, 조지 콜먼을 끊임없이 콜트레인과 비교하면서 그들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보다 점잖았던 듀크 엘링턴은 밴드 단원들을 가족처럼 아꼈고 해고명령을 내렸던 적도 평생에 걸쳐 한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기존의 단원보다 더 마음에 드는 연주자를 발견하면 한 자리에 두명의 연주자를 기용해 결국 한 멤버가 스스로 사표를 내게 만드는, 그래서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았던 잔혹한 리더였다. 그런 점에서 밴드 리더는 야구 감독과 별반 다를 게 없다. 1940년대 LA다저스를 정상으로 이끌었던 악한, 리오 듀로셔 감독의 명언이 있지 않은가. “사람 좋으면 꼴찌야.”
실제로 <위플래쉬>에 등장하는 셰이퍼 음악원의 빅밴드들은 야구팀을 닮았고 현실의 음악원 빅밴드들도 그렇다. 한 학교에도 재능 있는 학생들로 구성된 1군 빅밴드(영화에서는 ‘스튜디오 밴드’)와 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2군 빅밴드(영화의 ‘나소 밴드’)가 나뉘어 있는 게 보통이고(심지어 어떤 음악원은 1군에서 5군까지 나뉘어 있다) 화면을 유심히 보면 알겠지만 1군 안에서도 모든 파트는 주전 연주자와 후보 연주자로 나뉜다. 영화의 주인공 앤드류는 ‘스튜디오 밴드’의 주전 드러머 자리를 놓고 다른 두명의 드러머와 그야말로 피를 보고야 마는 사투를 벌인다(여기서 말하는 ‘피’의 의미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플레처 교수는 그 피를 즐긴다. 그는 다른 단원들을 모두 연습실 밖에 대기시켜놓고 더블타임스윙을 제대로 연주하는 드러머를 골라내기 위해 세 드러머를 뺑뺑이 돌리듯 교대로 의자에 앉히고 새벽 두시까지 몰아붙인다. 스탠 켄턴 오케스트라와 돈 엘리스 오케스트라에서 기이한 홀수 박자의 작품으로 악명이 높았던 행크 레비의 곡 <채찍질>(Whiplash, 그렇다. 이 곡이 영화의 제목이다)을 앤드류가 정확한 박자에 연주하지 못하자 플레처는 앤드류의 머리 위로 의자를 집어던지더니 심지어 연신 그의 따귀를 때리며 따귀의 박자가 빨랐는지, 늦었는지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앤드류에게 캐묻는다.
내면이 만신창이가 된 앤드류는 그의 연습실 벽면에 붙여진 그의 영웅, 명드러머 버디 리치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지만 이이러니하게도 플레처 교수의 캐릭터는 버디 리치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다. 어쩌면 플레처라는 인물은 버디 리치에게서 빌려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드광, 다혈질의 마초였던 이 전설의 드러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마치 플레처 교수가 순간순간 너무도 인간적이며 자상한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자신의 빅밴드 단원들을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로 치켜세웠지만 이면에서 그는 실수하는 연주자들을 그 자리에서 해고했고 리허설 도중 단원들에게 심벌즈를 날리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심지어 그는 공개 연주회 중에도 피아니스트에게 심벌즈를 던졌는데 공연 후 빅밴드 단원 전체가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던 중에 그 피아니스트는 모멸감을 참지 못해 버스를 멈추고 사막 한가운데서 내렸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재즈 연주자를 위한 공포영화”
<위플래쉬>는 지금까지 만들어졌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재즈라는 음악을 제대로 들려주고 보여준다. 좋은 연주를 위해 연주자들은 얼마나 훈련하는지, 그들의 경쟁은 얼마나 치열한지 또 수준급의 빅밴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 영화는 생생하게 드러낸다. 재즈팬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 화면을 통해 그 점을 확인하는 것은 짜릿한 순간이었다. 비록 필자 주변의 한 트럼펫 주자는 이 영화를 재즈 연주자를 위한 공포영화라고 정의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예술가, 더 나아가서는 리더의 문제, 그러니까 악마와 손잡을 수밖에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그들의 문제를 어느 지점에서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과연 예술가와 리더는 어느 정도 악마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의 악마성은 그들의 예술을 통해, 그들의 성취를 통해 과연 어느 정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위대한 예술가들의 숱한 여성 착취는 과연 온당한 것일까. 국가주의 이념 아래서 저질러진 수많은 개인들의 희생은 과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와 같은 식의 말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영화에서 플레처 교수는 자신의 지나친 학대로 한 유능한 트럼펫 주자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스튜디오 밴드’에 대한 자신의 열정만큼은 결코 용서를 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것은 심각한 죄악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마지막 장면인 꿈의 무대 카네기홀에서 듀크 엘링턴의 작품 <카라반>(Caravan)의 화려한 드럼 솔로를 배경으로 앤드류와 플레처 교수의 미소를 통해 두 사람 사이의 극적인 화해를 이끌어낸다. 플레처 교수의 미소는 마치 이런 것 같다. “앤드류, 악마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앤드류는 일급의 재즈 연주자로 성장해 과연 어떤 밴드 리더가 될 것인가. 그는 정말 플레처 교수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밴드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장쾌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촌스러운 내게 찜찜함을 남겼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