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가 현장을 지킨다면, 다큐멘터리를 지키는 것은 영화제다. 이때 현장은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방 한구석이기도 하다. 실험, 진보, 대화를 슬로건으로 한 인디다큐페스티발이 3월26일(목)부터 4월1일(수)까지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열린다. 시급한 사회 현안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개막작으로 선정된 가운데 과거 투쟁을 회고하는 작품이 그 뒤를 든든히 받친다. 실험성으로 무장한 사적 다큐멘터리도 여전히 시선을 모은다. 크고 작은 고민을 안고 이를 돌파하려는 시도가 담긴 다큐멘터리를 통해 봄을 앞당겨보자.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제작팀 / 2014년 / 78분 / 국내신작전
<복지갈구 화적단>이라는 이름의 팟캐스트를 송출 중인 미디어 활동가들이 핵발전소가 들어설 예정인 삼척을 방문한다. 이들은 마을 주민들과의 인터뷰와 촬영을 통해 그곳의 분위기를 전한다. 각기 다른 활동가들이 참여한 4편의 영상과 1편의 팟캐스트, 참여자들의 인터뷰를 병렬적으로 이어 붙였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개별 영상은 각각 크고 작은 결함을 가진 불완전한 영상들에 불과하다. 때로는 한쪽의 목소리만을 감정적인 방식으로 호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4편을 이었을 때 그것은 서로의 결함을 적절히 보완하기 시작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믿는 일은 젊은 세대들에게 투쟁 다큐멘터리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자 일시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스와니: 1989 아세아스와니 원정투쟁의 기록> 오두희 / 2014년 / 68분 / 국내신작전
1989년 일본계 기업인 아세아스와니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통보하고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결의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가 쉽지 않다. 이에 여성 노동자 4명은 일본으로의 원정 투쟁 길에 오른다. 영화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 영상과 노동자 4명에 대한 현재 인터뷰를 교차해 보여준다. 일본 노동자들의 뜻밖의 환대와 예상 밖의 균열, 그리고 이후의 성과를 되짚는다. 실패한 투쟁을 돌아보는 것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되새김이 아니다. 되돌아보는 시선 자체에서 의미는 이미 생성된다. <스와니…>는 이러한 사실을 말없이 일러준다.
<옥포조선소> 배윤호 / 2015년 / 101분 / 국내신작전
노동 현장에 대한 기록은 대개 사건 혹은 특수한 상황에 처한 노동자로부터 시작된다. 최근 사건 중심성에서 벗어나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으로서의 다큐멘터리들이 생겨났다. <옥포조선소>는 사건에서 풀려난 노동자와 노동현장에 대한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유일한 사건이라면 이들의 회사 내 행사에서 발표할 낭독극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핵심적인 사건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거제도 대우조선해양을 중심으로, 병환 중인 아버지를 뒀다는 점 외에는 평범한 용접공 정수영씨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친다. 노동자들의 작업 현장과 식사, 회의, 체조, 휴식, 행사 시간 등을 관찰자적 시점으로 들여다본다. 평범한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다큐멘터리다.
<아들의 시간> 원태웅 / 2014년 / 127분 / 국내신작전
감독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명의의 선산이 아버지와 친척들간의 관계 소홀로 인해 오랫동안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위성지도를 통해 선산 근처를 더듬어보던 감독은 자신의 행위가 기억 속 자신의 마을을 더듬어보는 것과 닮았음을 느낀다. 다큐멘터리는 세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아노 학원’은 조카의 탄생부터 성장과정을, ‘전사’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아버지의 삶을, ‘선산’에서는 할아버지의 선산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조카와 누나 혹은 자신의 기억을, 아버지의 현재와 과거의 삶을 교차시킨다. 감독은 때로는 폐허 위에 멍하게 앉아 있거나 중간중간 간식거리를 사먹는 등의 행위를 한다. 그 행위는 때로는 의식적(ritual)이고 때로는 일상적이다. 이를 통해 의식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결국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알려준다.
<탈선> 권현준 / 2014년 / 70분 / 국내신작전
2003년 대구지하철참사를 노동자의 입장에서 회고하는 다큐멘터리다. 사고 당시 노동자들은 살아남은 죄인으로 바깥으로는 시민에게 고개 숙이고 안으로는 사쪽의 책임 전가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2005년, 그들은 회사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파업을 강행하지만, 회사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안전과 편리성 문제를 강조하며 이들의 행위에 비판적인 어조를 취한다. <탈선>은 여러 가지 측면을 환기한다. 대구지하철참사와 이후의 수습 과정에 관한 것은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참사에 대한 수습 국면과 비슷하다. 이후 지하철이 개통될 때마다 노동자를 어떻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코 과거가 되지 않을 참사에 대한 또 하나의 경고장이다.
<뜻밖의 수업> 민환기, 이윤택 / 2014년 / 110분 / 올해의 초점
통영의 한 초등학교가 교육부 선정 뮤지컬 교육 시범학교로 선정된다. 교사들은 뮤지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본을 쓰고 무대를 디자인하고 아이들을 훈련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관전 포인트는 교사들이 특수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는가이다. 아이들 앞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뒤에서 교사들끼리 모여서 하는 회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사람들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에서 진실을 길어올리는 감독 특유의 관찰자적 시선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봄프로젝트 지원작’
봄프로젝트는 인디다큐페스티발이 멘토 시스템을 통해 신진 다큐멘터리 감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을 다시 기록하는 사적 다큐멘터리 범주의 작품들이 강세를 보였다. <아빠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의 남순아는 88만원 세대를 비롯해 자기 세대의 고달픔을 지칭하는 용어가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감독은 매달 꼬박꼬박 아버지에게 용돈을 얻어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로 인한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지인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찍으라는 영화는 안 찍고>의 송이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자기 일에 대해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다. 그녀는 다른 감독들을 인터뷰하고 또 다른 작업을 병행하며 답을 찾으려 한다. <24>의 명소희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학교 입시에 번번이 낙방하자 자신의 글쓰기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해줬던 어머니를 무작정 찾아간다. 그러나 감독은 내내 어머니의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지원작 중 유일하게 사적 다큐멘터리의 범주에서 벗어난 작품인 고상현의 <우리보고 죽우란 말이냐>는 강남구청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벌이는 넝마공동체 이야기다. 어떠한 종류의 삽입 자막이나 내레이션을 배제한 채 다이렉트 시네마의 형식을 고수한다. 영상의 질감도 숏별로 다르기 때문에 마치 서로 다른 누군가의 촬영본을 이은 아카이브영화처럼 보이는 점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