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성인용 에로틱 로맨스로서 싱거운 실체를 드러낸 가운데, 때마침 시선을 유혹하는 영화가 있으니 피터 스트릭랜드 감독의 <듀크 오브 버건디>다. 몇몇 영화제에서 소개된 다음 올해 초 영미권 일부에서 개봉한 <듀크 오브 버건디>는, 겉으로 보이는 지배자-복종자 관계 뒤에 색색의 실크 커튼처럼 섬세하게 겹쳐진 두 여자의 사도마조히즘적 성애를 탐구하는 영화다. 화면은 나비 표본처럼 우아하지만, 고통부터 우스꽝스러움에 이르는 관능의 온갖 성분을 망라한 내막은 만만치 않다.
02/06
<폭스캐처>를 관람한 많은 사람들이 탁월한 몸 연기(physical acting)의 향연이라고 평한다. 나 역시 맨 앞줄에 서서 동의하는 바다. 연습용 인형과 묵묵히 섀도 레슬링을 벌이는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의 모습으로 테마를 암시하는 도입부부터 눈사태처럼 설명 없이 들이닥치는 결말까지 <폭스캐처>는 대사에 의존하지 않는다. 극단적 예를 상상하자면, 음향을 소거하고 영화를 본다고 해도 줄거리의 흐름과 세 주인공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법하다. 이 드문 성취에는 스티브 카렐, 마크 러팔로, 채닝 테이텀 세 배우가 분장의 도움으로 외모와 자세를 캐릭터에 꼭 맞게 빚어낸 정적인 몸 연기와, 사지를 움직이는 방식을 성격에 맞게 조율한 동적인 몸 연기가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그리고 사람의 육체가 갖는 무게감과 속도는 둘러싼 세계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인 법이므로, 배우들의 ‘육체적’ 연기는 공간에 인물을 넣는 촬영의 구도와, 움직임을 끊는 편집으로 완결된다. 박수!
그러나 갈채를 보낸 다음, 반대로 생각해보는 일도 흥미롭다. 우리가 <폭스캐처>의 연기를 육체적, 즉 비언어적이라고 결론내린 연유는 세 남자의 말이 비효율적이고 쓸모없게 들려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언어의 매끄럽지 않음은, 인물의 면모를 자세하고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하다. 레슬러 형제 마크와 데이브(마크 러팔로), 그리고 둘의 삶에 끼어든 대부호 존 듀폰(스티브 카렐)은 공히 언어에 무능하다. 단, 무능의 형태는 3인이 각기 다르다. 몸의 대화에 익숙한 운동선수 슐츠 형제는 기본적으로 어눌하다. 소극적인 동생 마크는 비단 언어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생각을 타인에게 표현하는 일을 고역스러워하는데 그중에서도 말이 제일 힘겨운 대상이다. 견고한 인생관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소유한 데이브는 세 남자 중 단연 소통에 능하지만 그 수단은 말을 통한 설명과 설득이 아니다. 오해를 어루만지는 눈빛과 포옹, 쓰다듬는 손길이 그의 말을 보완한다.
언어에 있어 존 듀폰의 ‘장애’는 과잉하다는 점이다. 그는 사적인 대화를 (못하기 때문에) 죄다 설교로 변질시킨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이상과 애국심을 거창한 어휘로 논하고 공허를 정언명제로 덮는다. 마크에게 불현듯 유년의 외로움을 털어놓는 장면의 대사 정도가 기억나는 예외다. 그러므로 존 듀폰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유용한 정보를 준다. 단어와 단어를 끊어서 발화하는 존의 말버릇은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가 갖는 중요성을 극대화하려는 욕구를 드러낸다. 마크를 저택으로 초대한 첫 만남을 보자. 존은 조금 지체해서 등장한다. 박물관 같은 거실에서 손님이 자기의 소유물에 압도될 시간을 준 다음, 존은 입을 뗀다. “난 레슬링 코치고, 레슬링에 깊은 애정이 있어요. 당신이 뭘 성취하고 싶은지, 인생에서 뭘 이루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싶어요.” 본인의 전문성과 지위를 대뜸 기정사실화하고 다짜고짜 멘토 자리에서는 셈이다. 이어 존은 초면인 마크의 훈련 진도를 묻고 답이 돌아올 때마다 마치 본인이 내린 지시 사항의 완수 여부를 확인하듯 “좋아”, “그래야지” 같은 말로 대화의 권력을 슬쩍 점유한다. “마침표는 나만 찍는다”는 태도다. 이 남자가 아는 단 하나의 효율적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기선제압이다. 뒷날 둘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마크는 존의 질문을 묵살하는데 존은 그 침묵에다 대고 “굿”이라고 대꾸해 거절당했음을 부정한다. 존은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큰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존 듀폰이 나름대로 에고를 보호하기 위해 정교하게 구축한 화법을 결국 붕괴시키는 한마디는 “노”(No)다. <폭스캐처>는 대사에 기대지 않는 영화지만, 한편으로는 “노”를 받아들이는 법을 알지 못해서 파멸하고 파멸시킨 남자의 이야기라고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02/07
누군가가 영화를 바닥에 쏟은 것 같다, 라고 <주피터 어센딩>을 보며 생각했다. 쏟아진 물감의 색감은 화려하고 마구 흩뿌리는 행위의 통쾌함도 없지 않지만 주워 담기는 불가능하다. <주피터 어센딩>은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영화다. 인물, 사건, 공간은 물론 해설용 대사가 줄지어 나온다. 평범한 지구 아가씨 주피터(밀라 쿠니스)가 은하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세력을 상대로 모험을 벌이게 된 사연을 담은 플롯은, 대부분 “저를 왜 여기 데려왔죠?” “그건 또 누군데요?”라고 주피터가 물어보면 상대가 친절히 대답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내 좌절은 무려 대사까지 동원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전투의 동선과 전략의 동기를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왔다. 하지만 <주피터 어센딩>의 대사는 플롯보다 감정을 실어나르려고 할 때 더 요령부득이다. 감독 워쇼스키 남매는 바람구두를 신고 우주 곳곳을 누비지만, 두 인물을 한 프레임에 넣고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영화의 가장 심플한 단위에 이르면 버벅거린다.
02/18
<이미테이션 게임>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사오정이고 말 바보다. 튜링의 엄정한 두뇌는 대화의 표면 아래 깔려 있는 암시나 비웃음을 접수하지 못한다. 당연히 남에게도 거짓을 말하거나 완곡 어법을 쓸 줄 모른다. 앤드루 호지스가 쓴 전기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에 의하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튜링은 “유 아 웰컴”이라는 미국인들의 인사를 환영의 의미인 줄 알고 기뻐하다가 반사적 관용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불안에 빠졌다는 편지를 썼다. 영화는 튜링의 고지식한 언어 습관이 업무 추진력에 보탬이 된 일화도 들려주지만 평생 그의 사회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짐작 가는 바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가장 매혹적인 대목은 튜링의 이 핸디캡이 위대한 암호학자의 자질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소년 앨런 튜링을 무력하게 만드는 난제는 어려운 퍼즐이 아니라, 비밀도 아니면서 표명되지 않은 의미를 감추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불투명한 언어다. 만물의 좌우가 뒤집힌 거울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처럼 지쳐버린 앨런을 격려하는 인물은 첫사랑 소년 크리스토퍼다. 암호는 비밀이 아니다. 송신자와 수신자의 약속만 알면 백지에 굵은 고딕체로 인쇄된 메시지와 마찬가지다. 비논리적 뉘앙스를 배제한, 여분의 의미라곤 없는 코드. 그것이 너를 위한 언어일 거라고 친구는 일깨워준다. 구성과 전개가 미흡하긴 하지만 <이미테이션 게임>의 시나리오작가 그레이엄 무어의 노고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범한 말 바보의 대사를 쓰는 작업. 그것은 복잡한 뺄셈의 퍼즐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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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하는 음악
저널리즘의 선정성을 풍자하면서도 <나이트 크롤러>는 “이것은 풍자”라는 신호를 관객에게 전혀 보내지 않는다. 프리랜서 비디오 저널리스트 루이스 블룸(제이크 질렌홀)은 시청률을 올려줄 유혈 이미지를 건지기 위해 언론의 윤리나 시민으로서 책임은 껌 딱지 취급한다. 댄 길로이 감독은 이 과정을 비판적 주석을 달지 않고 가차없이 보여준다. 극중 소수의 이견은 가볍게 묵살되고 영화 역시 주인공의 성공 여부만이 관객이 마음 써야 할 문제라고 말하는 인상마저 준다. <나이트 크롤러>는 기묘한 방식으로 할리우드적이다. 그리하여 불쾌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80년대 LA 배경 TV형사물의 경쾌한 리듬을 유지한다. 이 냉정한 아이러니 전략에 크게 일조하는 요소는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오리지널 스코어다. <콜래트럴>에서 LA의 밤공기를 훌륭히 포착한 바 있는 이 작곡가는 <나이트 크롤러>에서 기타를 앞세워 가장 끔찍한 순간에도 불안을 암시하는 대신 태연자약하게 주인공의 아메리칸드림을 반주한다. 이와 같은 음악의 안면몰수는 결과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그리는 병든 세계가 얼마나 강고한지 절감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