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사의 아수라장]
[곡사의 아수라장] 서민의 피가 달다?
2015-03-20
글 : 김선 (영화감독)
한국에 뱀파이어가 못 사는 이유, 한국형 뱀파이어영화가 나와야 하는 이유
<박쥐>

트위터를 보다가 빵 터지고 말았다. 그 트윗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뱀파이어가 못 사는 이유.’ 뭐지? 낚여서 클릭해보니, 헉! 사진이 한장 올라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교회 숫자’라는 제목으로 남한 지도 위에 수천개의 점들이 빼곡히 찍혀 있었다. 물론 그 점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교회가 하도 많아서 뱀파이어가 우리나라에 서식할 수 없다는 농담에 빵 터지면서 한편으론 씁쓸해졌다. 종교가 우리나라에 와서 고생이 많구나. 역시 대한민국은 뱀파이어 살 곳이 못 되는구나.

우리나라에 뱀파이어가 없는 이유는 교회 때문만이 아니다. 외국에는 수없이 많은 뱀파이어 소설과 영화들, 코믹스가 있지만 우리나라엔 (뱀파이어 전통도 없을뿐더러) 뱀파이어를 환영해줄 매체가 적다. 그나마 뱀파이어에 우호적인 매체는 영화(혹은 웹툰)일 텐데, 할리우드영화 <트와일라잇> 등은 국내 흥행에 성공할지언정 정작 우리나라 뱀파이어영화는 <흡혈형사 나도열> <박쥐> 등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게 현실이다. 물론 전통적인 흡혈귀인 구미호 등도 포함시키면 그 수는 좀더 많겠지만, 정확히 말해서 구미호는 뱀파이어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뱀파이어물이라고 하는 것엔 조건이 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파생상품들

현대 뱀파이어물의 모든 속성은 단 하나의 문학 작품에서 나왔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뱀파이어의 속성들- 햇빛과 십자가를 싫어하고 영생을 살 수 있으며 참수하거나 심장에 못을 박아야 제거할 수 있다는- 을 집대성한 것은 맞지만, 여전히 뱀파이어를 동정심 없는 무자비한 괴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현대적이지 않다. 사랑과 운명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기인한 동반자에 대한 광적인 집착… 현대적인 뱀파이어의 설정은 바로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시작됐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주인공 루이스의 대사, “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내가 악인지, 선인지. 그리고 신은 정말 있는 것인지”는 그의 고뇌하는 “햄릿적” 캐릭터를 잘 설명해주는 대사다(영화의 대사는 소설과 거의 똑같다. 앤 라이스 본인이 영화의 각색을 맡아서일 거다). 피에 탐닉하기보단 질문에 탐닉하는 루이스는, 그래서 무섭기보단 햄릿을 보는 것처럼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되는, 첫 번째 현대적 뱀파이어였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후의 뱀파이어들은 루이스의 변주된 버전들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루이스의 고뇌에 소녀감성의 ‘영원한 사랑’ 주제를 버무렸고, 캐스린 비글로의 초기작 <죽음의 키스>(Near Dark)는 ‘뱀파이어 가족’ 주제를 히피스럽고 터미네이터스럽게(이 말이 무슨 뜻인지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제임스 카메론과 결혼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죽음의 키스>는 정말 터미네이터스럽다) 버무렸고, 심지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도 원작과는 달리 드라큘라 백작을 불멸의 사랑을 찾아 고뇌하는 로맨티스트로 묘사하고 있다. 수잔 서랜던과 카트린 드뇌브의 레즈비언 섹스 신으로 유명한 토니 스콧의 <악마의 키스>(The Hunger)는 ‘뱀파이어 동반자’ 주제를 확장해서 섹슈얼리티라는 후까시를 잔뜩 잡고 있지만, 여전히 앤 라이스가 창조한 고뇌하는 뱀파이어의 변주된 버전이다.

<어딕션>

그중에서도 앤 라이스마저 기겁할 정도로 고뇌의 극단을 보여주는 뱀파이어영화가 있었으니, 아벨 페라라의 <어딕션>이다. 주인공은 설정부터 고뇌스럽게도 철학과 박사과정의 학생인데, 아벨 페라라 고유의 주제의식인 ‘중독’을 반영하듯 피에 중독되어가고 그 중독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뇌하고 또 고뇌하다가 자학하기에 이른다(철학가들이 고뇌가 심화되면 미치거나 자살하는 이유가 이런 것일까. 휴우). 하지만 고뇌 자체도 의미없다고 주장하는 선지자 크리스토퍼 워컨의 명연기에 쫄아버린 주인공은 (“You Know Nothing!”을 외치는 크리스토퍼 워컨의 신들린 연기는 게리 올드먼, 크리스토퍼 리, 클라우스 킨스키 싸대기 날리고) 박사학위 수여식의 하객들을 대량살육하면서 고뇌에 종지부를 찍는다. 고뇌의 극단은 자멸, 아니 공멸이라니. 앤 라이스가 봐도 질색할 만한 아벨 페라라스러운 뱀파이어 엔딩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에도 고뇌의 극단을 달린 뱀파이어물이 있는데, 박찬욱 감독의 <박쥐>다. <박쥐>에서 박찬욱이 물고 늘어진 고뇌의 본질은 죄책감이다. 신부가 치정에 휘말리고 살인까지 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박찬욱은 루이스의 고뇌에 “돌덩이” 같은 죄책감과 참회를 버무린다(그리고 절벽 앞에서의 엔딩은 부부싸움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고… 휴우… 칼로 물베기인데, 칼이 졸라 날카로워). 하지만 죄책감이란 주제가 너무 무거워서인지, 박찬욱 특유의 미학실험들이 난해해서인지, 한국 관객이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뱀파이어물은 아니었다(앗,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에 뱀파이어가 못 사는 이유’란 트윗을 올린 분은 <박쥐>를 안 보셨나보네. 우리나라 신부님은 뱀파이어가 될 수도 있는데…).

<흡혈형사 나도열>

오히려 한국 관객이 좋아한 뱀파이어물은 <흡혈형사 나도열>이었는데, 정확히 말해서 <흡혈형사 나도열>은 뱀파이어물이 아니다. 주인공이 뱀파이어의 운명 때문에 고뇌하긴 하지만 사건 해결과 누명을 벗기 위한 과정일 뿐 목적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더 명확한 증거는 피 빠는 장면이 한번도 안 나온다는 것이다. 뱀파이어가 된 주인공에게 초능력이 발휘되거나 흡혈송곳니가 솟아나긴 해도, 고뇌의 근본적인 비주얼- 블러드 서킹(blood sucking)- 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흡혈형사 나도열>은 뱀파이어물이라기보다는 코믹형사물(또는 히어로물)에 가까운데, 어찌보면 한국적 뱀파이어를 잘 포지셔닝했다고도 하겠다.

한국형 뱀파이어물은 언제?

그렇다면 한국 관객이 즐길 만한 진짜 뱀파이어물은 어떤 것일까? <박쥐>의 난해한 뱀파이어 말고, <흡혈형사 나도열>의 세미(semi) 뱀파이어 말고, 한국형 앤 라이스 뱀파이어물! 나의 해답은 두 가지다(물론 이전에 준비했던 어떤 영화사 대표님과 쿵짝쿵짝 같이 만든 해답이긴 하지만). 첫 번째, 뱀파이어 가족물이다. 가족만큼 한국적인 테마가 또 없으니, 외래적인 뱀파이어 소재는 가장 한국적인 것과 조합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이를테면, 인간세계에 잘 적응하며 살아오던 뱀파이어 가족이 있다. 어느 날 이 가족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 사춘기 큰딸이 인간(졸라 훈남 오빠)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아버지는 딸의 연애를 반대하고, 사춘기 딸은 홧김에 인간 오빠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두둥둥둥. 재미없지? 어디선 많이 본 듯한 이야기다. 그래서 엎어졌다.

자, 두 번째 해답은 좀 독특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흡혈귀스러운 계급은 뭘까? 단번에 떠오르는 사악하고 괴물 같은 놈들. 바로 정치인이다(물론 재벌도 있지만, 재벌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많아서 패스…). 학생들이 단체로 희생된 현장에서도 의전을 받아야 하고, 재벌들 눈치 보면서 뇌물이나 받아 챙기고, 병역기피에 위장전입…. 결국 정치인들은 서민들 피 빨아먹고 사는 거 아닌가라는 지극히 당연한 발상에서 시작된 아이디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인들의 왕 중 왕, 대통령이 뱀파이어라면? 이를테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실은 뱀파이어다. 낮에는 국정을 돌보지만 밤만 되면 뱀파이어로 돌변해 청와대를 빠져나와 서민들 피를 빨고 다닌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한테 물려도 죽지 않는, 오히려 힘이 나는 한 여자를 만나는데, 알고보니 선천적인 희귀병 만성빈혈! 그때부터 그 여자는 대통령의 비밀을 빌미로 대통령을 협박하기 시작하는데…. 재밌지 않은가? 신선하지 않은가? 한국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또 엎어졌다. 이유는 너무 블랙스럽다는 것이었다. 아차, 대한민국에서 블랙코미디는 금기였지. 아놔.

어쨌든, 흔해빠진 가족 이야기든 황당무계한 블랙코미디든 간에, 이젠 한국형 뱀파이어가 나올 때가 되었다. 앤 라이스가 울고 갈 정도는 아니어도 앤 라이스가 “오∼ 대한민쿡∼ 왓 더 퍽∼” 할 만한 한국형 뱀파이어가 나올 때가 되었다. 아니 실은 이미 나왔어야 한다. 하위장르 중에서도 그 흔한 뱀파이어물이,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에 가뭄에 콩나듯, 아니 가뭄에 콩씨 말라버린 듯 안 나오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뱀파이어뿐만이 아니다. 하위장르는 고사하고 아예 장르영화 자체가 죽어버린 것 같다. 모든 영화가 천만을 향해 돌진하고 있지만 장르를 향해 돌진하는 영화는 거의 없다. 장르는 모험이다. 모험심이 없다면 영화는 획일화되고, 획일화의 궁극은 자멸이다. 대한민국에 그 흔한 뱀파이어 한 마리 못 산다면 영화가 못 사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