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 너드, 자학, 지질, 호구. 온갖 불운의 단어들로 집약된 코믹 아이콘 유병재. 지난해 tvN <SNL 코리아>의 ‘극한직업’으로 한껏 ‘고초’를 겪으며, 유병재식 코미디를 확립한 그는 요즘 페이스북에 써내려간 ‘유병재 어록’을 통해 청춘의 고충을 대변해주는 현실적 개그로 끊임없이 각광받고 있다. 오는 4월10일 시작하는 tvN 코미디 드라마 <열정폭발 초인시대>의 작가 겸 출연을 앞두고 있는 유병재를 만났다.
반바지에 티셔츠, 패딩조끼 차림의 tvN <SNL 코리아>의 ‘극한직업’ 속 매니저 유병재를 상상하면서 상암동 CJ E&M 센터로 갔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도착하니 유병재가 안 보인다. 잠깐 밖으로 나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카페에 있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충격적인 꽃샘추위로 얼얼하던 3월인데도 화면 속 모습을 기대한 내가 우스워진다. 다시 들어가보니 좀전에 못 보고 지나친 유병재가 서 있다. 큰 배낭을 메고 블랙 팬츠와 블랙 점퍼로 ‘제대로’ 갖추어 입은 까닭에 사뭇 낯선 모습이다. 특유의 수염은 그대로지만, 트레이드마크였던 노란 머리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검은 머리와 은테 안경의 조화로 피부는 한결 더 하얗고 말끔하고, 그래서 어려 보이기까지 한다. 실은 이제야 다소 노안인 유병재의 진짜 나이 88년생으로 보인다고 하는 게 맞겠다. tvN의 <오늘부터 출근>에서 면접을 보면서 “패션은 잘 몰라서요… 같이 사는 형이 어제 입고 벗어놓은 착장 그대로 입고 나왔어요”라고 스스로 칭하던 유병재의 못 말리는 패션은, 실제로 접하니 지극히 정상궤도다. 무엇보다 지금의 패션이 잠깐 안 본 사이 그의 변화를 알려주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싶다. 바쁜 일정으로, 밤 9시는 되어서 만난 그는 다음 작품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어 보였다.
청춘들의 좋은 방패막
지난해 tvN의 <SNL 코리아 시즌5>와 <오늘부터 출근>을 끝낸 후 근 3개월여, 유병재를 만나는 작은 창구는 44만5319명의 페친이 등록된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서였다. 주성치의 <식신> 스틸컷이 메인 화면으로 떡하니 등록된 페이스북에서 유병재가 써내려간 말들은 곧 ‘유병재 어록’으로 인구에 회자됐다. 바른말, 고운말, 교훈이 되는 말을 어록이라고 정의한다면, 유병재 어록은 일반적 규정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내가 숲속에 있는데 어떻게 나무를 안 보고 숲을 보나.’ ‘나만 힘든 건 아니지만 니가 더 힘든 걸 안다고 내가 안 힘든 것도 아니다.’ ‘국민의 간지러운 곳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집중적으로 간지럽힐 수가.’ ‘어느 날 운명이 말했다. 작작 맡기라고.’ 웃다가 씁쓸한 유병재 어록을 관통하는 규칙은 하나다. 이미 존재하는 좋은 말들은, 지금의 척박한 대한민국 현실에 적용해보려니 상용화가 되질 않는다. 유병재는 그러니 이 말들을 신랄하게 비틀어 현실 적용 가능한 쓰임새 있는 문장으로 개조해준다. 예를 들어 오늘날 유병재 어록을 있게 해준 단 하나의 문장인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비튼 유병재 어록의 ‘아프면 환자지 개XX야. 뭐가 청춘이야’다. 열정페이와 달관세대 같은 말에 노출된 지금의 청춘들에게, 유병재 어록은 좋은 방패막이 되어준다. 청춘은 말마따나 충만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저 힘들면 아플 수 있으며, 최저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절약하고 달관하며 살아갈 수 없다. 급기야 ‘젊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어도 젊은이는 헐값에 살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같은 유병재 어록에 20대의 고달픈 청춘들은 격하게 공감하고 울분을 토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어록이 가지는 막강한 파워에 대해 정작 유병재는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작가인 나도 언제 일을 그만둘지 모르는 비정규직이고, 아직 휴학 중이다.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고. 어록은 유명한 분들이 하는 말인데 내 말을 어록이라고 하기엔 좀…” 하며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에게 쏟아진 호응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요즘 바쁜 이유가 사실…”, 그가 커다란 배낭을 주섬주섬 열어서 두권의 대본을 꺼낸다. tvN에서 준비 중인 8부작 코믹 드라마 <열정폭발 초인시대>의 1, 2회 대본인데, 당장 이번 주말부터 촬영 시작이다. 공대 복학생인 20대 취업준비생이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부여받는다는 내용의 드라마로, 말하자면 취업 걱정에 하루도 편할 날 없는 청춘들을 그린 본격 청춘 드라마다. “일종의 ‘도시전설’로 성인 남성이 25살까지 첫 경험을 하지 못하면 초능력을 갖게 된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초능력으로 세상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걸 이용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지금 청년들이 사는 세상이 얼마나 팍팍하냐면, 이렇게 초능력을 부여해도 막상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웃음) 그냥 무능력자들에게 한번쯤 초능력을 주고 싶었다.” 메인 작가인 유병재와 함께, <SNL 코리아>의 안상휘 CP와 김민경 PD가 참여한다. 초능력을 활용하는 인물들이 메인인 데다 1, 2회 부제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연상케 하는 ‘영웅의 탄생’, ‘심판의 날’이다. “익숙하게 보아온 마블, DC 히어로물의 클리셰들을 활용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화려한 CG 같은 건 없고 말로 CG를 설명하는 식이다. 우리끼리는 크리스토퍼 놀란도 CG보다는 아날로그를 주로 활용하지 않았냐,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한다. (웃음)”
짧은 호흡으로 재치를 발했던 <SNL 코리아> 때와 달리, 이번엔 한회가 장장 1시간에 달하는 본격 풍자극이다. 대본을 쓰는 데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데다, 호흡 자체도 긴 프로젝트다. “이제 해봤자 작가생활 4년차 정도다. 이 정도 경력이면 아직 대본을 쓴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데, 골든타임에 1시간이나 편성을 받은 건 너무 운이 좋은 것 같다. 정말 엄청난 기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부담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감 지키는 게 정말 고역이다. 20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있어도 한줄도 못 쓰다가 마감 두 시간 전에 쓰기 시작한다.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괴로운 나날들이다. 긴 호흡의 드라마 작법을 위해 기본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 로버트 맥기의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도 다시 꺼내보고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과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다시 봤다. 혹시나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데 크게 도움이 안 되더라. (웃음) 가만 보면 글이라는 게 아무리 책상에 앉아 있어도 안 올 때도 있고, 또 갑자기 느닷없이 올 때도 있고 그렇다. 감히 비교는 안 되지만 언젠가 이창동 감독님이 인터뷰에서 ‘이야기는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을 지침 삼으며 나도 기다린다.”
작가, 배우, 개그맨? 원칙은 ‘코미디’
드라마에서 유병재는 작가로도 활동하고 배우 김창환, 이이경과 함께 복학생 3인방으로 출연한다. “1회 대본이 40쪽인데 4신 빼고 다 나온다”고 하니 분량도 만만치 않다. 역시 ‘극한직업’의 ‘찌질한’ 매니저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애인도 친구도 없는 25살 복학생 ‘유병재’를 연기한다. 검은 머리는 결국 다들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고 하고, 노란 머리가 불량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로 그가 꾀한 선택이다. “사실 시대가 좋으니 나같은 사람이 브라운관에 얼굴까지 보이는 것이지 싶다. 내 메인 일은 어디까지나 작가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워낙 많이 받는데, 그가 고수하는 원칙은 단 하나다. “작가, 연기자, 개그맨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 역할에 상관없이 ‘코미디’라는 말이다. 대본을 쓰든 연기를 하든 결국 그래서 하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에이전시나 매니지먼트 등에서 같이 하자는 제안도 들어오지만, 유병재는 ‘당장의 단맛에 취하지 말자’라는 원칙으로 이제는 자기 페이스를 찾았다. “소속사에 수익률 떼어주는 것도 싫고. (웃음) 그동안 고민도 해봤는데, 메인은 작가 생활이다. 상암동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대본 쓰고 회의하는 직장인 생활을 하다 보니 결국 이렇게 혼자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부가적인 일은 광고 정도인데, 사실 가끔 오는 거지 연락이 계속 오는 것도 아니고.”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병재가 얼굴을 알린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방송작가가 전면에 나서서 연기까지 하고 인기를 구가하는 유병재식 활동은 과거 지상파 시대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특이한 모델이다. 충남 홍성 태생. 1남2녀의 막내인 그는 어릴 때부터 남 웃기는 데는 일가견 있던 재능을 살려 KBS 개그맨 공채시험에 응시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유병재가 달라지는 건 이 지점부터다. 재수, 삼수 붙을 때까지 개그맨 공채를 준비하는 대신 그길로 더이상 시험을 보지 않고, 휴대폰으로 찍은 영상들을 유튜브에 올리는 새로운 세대의 자기표현을 시작한다. “군대에서 영화연출도 해보고 싶었고, 시나리오작가도 해볼까 싶었지만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다.” 유병재의 재능을 보여준 자체제작 UCC 영상 <프리스타일 랩배틀> <한번만 안아줘> <니 여자친구 못생겼어>는 바로 이 방황의 시기에 나온 재능 충만한 작품이다. “정말 연출도 배워본 적 없고, 편집 개념도 없고. 그냥 촬영감독 도움받아서 휴대폰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는데, 그게 다행히 유일한 PD님 눈에 들어서 방송의 기회를 얻었다.” 결국 2012년 바로 그 유일한 PD가 연출한 Mnet의 <유세윤의 아트비디오>에 유세윤의 조감독으로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리고 이후 <SNL 코리아> ‘극한직업’의 매니저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유세윤의 아트비디오>의 짱구 더빙편에서 유세윤이 성우에게 “선생님 못하시면 때리세요. 얘 되게 잘 맞아요”라고 지칭한 게 결국 일종의 예고편이었달까, ‘극한직업’ 속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스타들에게 깐죽대다가 뺨을 얻어맞고, 질질 끌려가고, 만신창이가 되어 쓰레기더미에 내던져지는 동안, 어린이, 청소년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유병재 특유의 캐릭터는 서서히 자리를 굳혀나갔다. 루저 감성 충만한 자학과 지질, 호구 스타일의 ‘웃픈(웃음과 슬픔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승부) 개그’는 지금의 유병재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윤제균 감독의 <색즉시공> <해운대>를 보면 그런 정서가 나온다. 슬픈 내용을 다루는데도 웃긴 장면들을 섞어서, 이 장면에서 내가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헷갈리게 만든다. 난 그런 방식이 세련됐다고 생각한다. 비극으로 가더라도 숨통을 틔우는 하나를 가지고 가야 한다. 생각해보면 내 스타일은 주성치의 영향이 가장 크다. 웃긴 장면일수록 웃기게 가는 게 아니라 더 진지해지는 방식을 택한다. 최대한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게 하는 것이다.”
SNS의 활성화로 수용자와 창작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금, 누구보다도 먼저 그 방식을 택한 유병재는 그 선두에 있는 인물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방송이 메인이지만, 미국만 봐도 넷플릭스의 시대가 열리지 않았나. 지상파 위주의 시대도 변화를 맞았듯이 새로운 매체의 시대가 머지않았다. 휴대폰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고 올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 중요한 건 크리에이티브한 양질의 콘텐츠만 살아남을 수 있다. 앞으로 나같은 친구들이 더 많이 나올지도 모른다. (웃음)”
유병재는 박찬욱, 최동훈 감독의 후배?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휴학 상태인 유병재는 박찬욱, 이정향, 최동훈, 전계수 감독을 배출한 영화동아리 ‘서강영화공동체’ 출신이기도 하다. 한때 영화연출을 꿈꾸기도 했지만 ‘성격이 우울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인 그는 현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연출은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물론 영화감독은 그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목표지점 중 하나다. 일 끝나면 맥주 한잔하면서 코믹영화들을 주로 섭렵한다는 그의 영화 취향은 조금 의외다. “공포영화는 아예 못 본다. <기담>은 보다가 결국 중간에 뛰쳐나왔다.” 또한 막상 너드 코미디에 심취해 있을 것 같지만 한국영화 중 가장 흥미롭게 본 영화는 바로 오승욱 감독의 <킬리만자로>(2000)다. “진짜 우울하고 센 영화인데 난 그런 영화에 끌린다. 이후에 오승욱 감독님이 뭐하나 예의 주시해왔는데 이번에 <무뢰한>도 기대된다.” 송능한 감독의 <넘버3>(1997)와 <세기말>(1999), 신정원 감독의 <시실리 2km>(2004)도 그가 좋아하는 작품들이다. 해외영화를 보자면 팀 버튼 감독의 <빅 피쉬>(2003)처럼 드라마가 강한 영화도 그의 취향이라고. 물론 ‘대부’로 모시는 주성치의 영화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출연한 수많은 영상에서 주성치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유병재 BEST3
1. <SNL 코리아> ‘극한직업’ 중 옹달샘 편
‘극한직업’ 편 스타들을 통틀어 최강 진상으로 등극한 옹달샘 멤버 유세윤, 유상무, 장동민의 매니저가 된 유병재. 불쌍함이 극에 달하는 에피소드로 그는 <사랑의 블랙홀>처럼 반복되는 꿈 안에서 맞고 또 맞고 또 맞는다. 평생 깨지 않을 유병재의 운명을 집약해준 에피소드로 유병재는 “워낙 꿈이 반복되는 장치를 좋아해서 이 에피소드에 활용했다”고 한다. 특히 바닥에 끌려가는 장면은 <식신>에서 주성치가 소림사 18동인의 스님들에게 얻어맞고 끌려가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것.
2. 보건복지부 공익광고 ‘유병재의 극한봉사-금연홍보대사’ 편
보건복지부 금연홍보대사로 선정된 유병재가 출연한 영상. 담배 피우는 청소년들을 선도하려다 오히려 맞는 남자 캐릭터로 특유의 자학 개그를 선보인다. “담배 계속 피우면 너희도 나처럼 되는 거야”라며 울먹이며, 노안에, 여자친구도 없고, 입냄새 나는 자기처럼 된다고 셀프디스하는 모습은 가히 유병재 지질 캐릭터의 종합판.
3. <SNL 코리아> 면접전쟁
<SNL 코리아> ‘면접전쟁’ 시리즈는 청춘의 고충을 대변하는 유병재 어록의 방송판. “우리 회사는 경력직만 뽑는다”는 면접관의 말에, “아니 다 씨발 경력직만 뽑으면 나같은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라고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명언을 남긴다. 현실의 고충을 개그와 접목한 유병재식 개그의 새로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