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학대받은 개들의 반란을 그린 <화이트 갓>은 흔히 <혹성탈출> 시리즈에 비교되지만 판타지가 아니며 공간도 한 도시로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면 갈등을 서사적으로 해소할 출구가 제한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은 이 난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 초월적으로 해결해버리는 몇 차례의 경이로운 순간을 창조했다. 몸을 낮추어 다른 종족과 눈높이를 맞추고 땅과 나란해진 인간과 동물의 이미지는 그중에서도 백미다.
02/20
내가 다닌 중학교는 예술 학교였다. 기억 속의 나는 3년 내내 음악부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를 들으며 등교했다. 주번이라서, 잠이 오지 않아서, 유별나게 일찍 집을 나선 어둑한 아침에도 음악부의 이름 모를 누군가는 반드시 나보다 먼저 학교에 와서 악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 지지 않겠어! 나도 방과 후에 석고상 소묘를 한장 더 그릴 테야”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라고 회고하고 싶지만 그럴 리는 없고 그냥, 매일 고되게 몸을 들볶아야만 하는 음악이나 무용 전공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미술 전공 학생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순전히 내 얘기다.) <위플래쉬>는 일체의 로맨티시즘이 제거된 드문 음악영화다. 극중 재즈 뮤지션들은 음악에 대한 사랑과 환희를 설파하는 대신 ‘위대한’ 음악, ‘우월한’ 음악에 집착하고 잡아 죽일 듯이 경쟁한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음악의 육체성에 집중한다. 주인공 앤드류(마일스 텔러)의 연습 장면은 토니 스콧 감독이 연출한 액션영화에 섞어놓아도 위화감이 없을 지경이다. 우리는 음악이 고도로 훈련된 육체적 움직임을 통해 구현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절감하진 못한다. 스포츠 경기와 무용 공연을 관람할 때는 즉각 고된 트레이닝 과정을 떠올리지만, 뮤직비디오나 공연을 보는 동안은 이면의 고역을 망각한다. 더구나 재즈는 얼마나 수월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가? 천재들이 영감에 몸을 싣고 ‘지 알고 내 알고’ 교감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환상이 만연해 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더블 타임 스윙의 손놀림으로 와장창 신기루를 깬다. 드럼을 피로 적시고 검지가 부러진 손으로 한사코 연주를 강행하는 극약처방까지 불사함으로써 <블랙스완>이 먼저 실현한 예술 보디 호러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과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긱와이즈닷컴’의 기사가 눈에 띈다. 드러머들의 뇌는 합주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하이 상태에 이르러 고통과 행복감의 역치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다. 고교 시절 드러머를 꿈꾸었다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도 알고 있었을까? 결국 <위플래쉬>는 예술을 구성하는 물질적 재료- 막대한 노동과 권력 관계, 원한과 희생, 신에게 가까운 축복받은 영혼이긴커녕 야수와 비슷한 외골수적 생활- 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마이크 리 감독의 <미스터 터너>와도 통한다.
02/21
영화 전체를 미니어처로 줄여놓은 오프닝이 최고라는 고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견해에 입각하자면 <위플래쉬>의 첫 시퀀스는 모범사례에 해당한다. 호러영화에 나올 법한 깊고 컴컴한 복도로 카메라가 트랙인하면, 주인공이 비지땀을 흘리며 드럼을 치고 있다. 우리는 여태 따라온 카메라의 시점이 권위자 플레처 교수(J. K. 시먼스)의 것임을 깨닫는다. 플레처는 애매한 말로 긴장한 신입생이 혼신의 힘을 다해 기량을 보이도록 자극해놓고는 사라진다. 그리고 교수를 실망시킨 줄 안 앤드류가 낙심한 순간 다시 모자를 가지러 들어와 펄쩍 뛰게 만든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위플래쉬>가 음악의 노역과 공포에 관한 영화임을 시사하는 동시에 영화 전체를 통해 반복될 ‘라이트 모티브’를 제시한다. <위플래쉬>는 첫 장면이 함축한 대로 플레처가 앤드류를 쥐락펴락 갖고 노는 에피소드의 반복과 변주로 구성된다. 플레처는 다정한 척 사기를 북돋아놓은 직후 패대기치고, 긴장 풀고 즐기라고 하자마자 묵사발을 만든다. 이것이 교수가 생각하는 담금질이다. 플레처는, 끝난 줄 알았는데 한 줄기 가능성이 보일 때 인간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육체성과 마초적 훈육을 중심에 둔 <위플래쉬>는 자연 스포츠영화와 군대영화를 닮은 구조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스스로 다루는 음악을 닮았다는 인상을 준다. 좌절과 도전의 동기(動機)가 반복되고, 기타 인물들을 원경으로 밀어내는 빼어난 ‘솔로’가 교차하며, 흥뚱항뚱 느려지는 구간 끝에는 머리칼을 잡아채는 ‘당김음’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이 106분 길이의 영화가 관객의 호흡을 지속적으로 휘어잡는 1차적 이유다.
02/22
테렌스 플레처는 “밴드 지휘는 바보도 할 수 있다”고 과감히 단언하며 본인의 참된 역할은 학생들로부터 최선의 기량을 짜내는 ‘몰이꾼’(pusher)이라고 정의한다. 득음을 위해 자식/제자를 눈멀게 하는 설정까지 익숙한 아시아 관객은 플레처의 교실관리법에 경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위대한 예술까지 갈 것도 없이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서도 나머지 삶을 저당 잡히는 상황에 익숙한 한국 관객 일부에게는 심지어 ‘고마운 호랑이 선생님’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위플래쉬>는 연출을 통해 인물을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도록 섬세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제시된 팩트만으로도 플레처가 뒤틀린 인간이고 나쁜 교사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교사는 친밀한 분위기에서 이뤄진 사적인 대화에서 들은 가족사를 단원들 앞에서 앤드류를 모욕하는 데에 이용한다. 스트레스로 자살한 학생의 사인을 왜곡해서 알리며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그의 억압적 교수법은 몇몇으로부터 기량 향상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플레처가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미래의 찰리 파커’들을 기죽여 싹을 밟아버릴 수도 있다. 플레처의 대항 논리는 “제2의 찰리 파커라면 어떤 경우에도 기죽지 않아”이지만 그것은 순환논법일 따름이다. 한편 그가 즐겨 인용하는 일화- 조 존스가 던진 심벌즈에 맞을 뻔한 모욕적 사건을 계기로 찰리 파커가 대가로 거듭났다는- 는, 위대한 음악인이 만들어지기까지 인과관계의 편의적인 단순화에 불과하다. “내 학생 중 찰리 파커는 없었다”는 플레처의 고백은 그의 교육 메소드가 가진 결함의 증거일 수도 있다. 교실에서 행해진 모든 가학적 언행이 궁극적으로는 최고의 음악과 학생들의 대성을 위한 교육의 일환이었다고 치더라도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플레처가 취하는 행동은 사적인 복수이며 무엇보다 그토록 자신이 신성시한 음악을, 무대를 제물로 삼았다는 점에서 배덕이다. 이것조차 앤드류의 각성을 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편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은, 플레처가 대변하는 위대한 음악의 정의가 편향돼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극중 시간 속에서 플레처가 앤드류에게 요구하는 성취는 드럼 연주의 빠르기와 정확성에 집중돼 있다. 딱 1초만 듣고 “글렀다”고 내쫓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분명 훌륭한 음악과 나쁜 음악이 있다는 관점은, 음악을 주관적 유희로 폄하하는 일반적인 무지- 앤드류의 가족들이 식사 시간에 드러내는- 의 중요한 안티 테제다. 그러나 플레처가 지휘하는 스튜디오 밴드의 단원들은 선생님과는 물론 멤버끼리도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며 음악적 대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들은 음악을 논쟁하고 동료들로부터 자극과 영감을 얻지 않는 걸까? 정말 찰리 파커의 숭고한 음악은 골방에서 색소폰만 독대해서 나왔을까? 앤드류와 동료들은 아직 학생이므로 기본기를 철저히 수련하는 게 먼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이미 프로 세계의 문턱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남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위플래쉬>는 앤드류가 마침내 플레처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특정한 예술관으로 무장한 이 ‘멘토’의 세계로 투항하는 이야기인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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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날
왕자의 무도회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역대 신데렐라들은 대개 공포와 슬픔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포수에게 쫓기는 토끼의 잰걸음으로 도망치기 바쁘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판 <신데렐라>의 엘라(릴리 제임스)는 확연히 다르다. 시계종이 울리면 엘라는 아쉽지만 최고로 즐거운 파티였다는 만족감을 발산하며 왕자(리처드 매든)에게 감사 인사를 던진다. 귀가 도중 마법이 풀려 흙투성이가 되어 폭우 속을 걸어 돌아오면서도 엘라의 얼굴은 환하게 빛난다. 멋진 하루를 간직하려고 일기를 쓰는 엘라를 보며 우리는, 설령 왕자가 그녀에게 구혼하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 무도회의 추억은 엘라의 인생에서 소중한 보석이 되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엘라는 팔자를 고치려던 것이 아니라 또래처럼 파티를 즐기고 싶었던 아가씨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