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전속결. 인터뷰 시간보다 30분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해 미리 해온 메이크업을 간단하게 매만진 뒤 곧바로 카메라 앞에 서서 다양한 포즈를 척척 취하는 한고은은 TV 속 모습 그대로 시원시원했다. 마치 익숙한 곳이라도 왔다는 듯 말이다. 1995년 슈퍼엘리트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지 올해로 20년째지만 그녀의 연기 인생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씨네21>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심지어 첫 영화 출연작 <태양은 없다>(감독 김성수, 1998)가 개봉했을 때도 <씨네21>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자 한고은은 깜짝 놀랐다. “정말인가? 진작에 만났어야 했는데, 이제야… 좀 늦었다. (웃음)”
공포영화 <검은손>(개봉 4월16일)에서 한고은이 연기한 유경은 털털한 그녀의 실제 모습과 거리가 먼 성형외과 전문의다.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게 된 여동생(배그린)에 대한 죄책감을 안은 채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가고, 유전자를 변형해 장기를 이식하는 수술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병원장 정우(김성수)의 숨겨진 연인으로 온갖 희생을 마다지 않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다. 한고은이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유경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다운된 여자”로 다가왔던 것도 유경의 불운한 가정사와 언제 균열이 생길지 모를 남자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아닌 어두운 가정사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를 처음부터 깔고 가야 하는 캐릭터였다”라는 게 한고은의 설명. 어느 날 유경은 의문의 오른손 절단 사고를 당한다. 정우의 재빠른 처치 덕분에 새로운 손을 접합하는 수술에는 성공한다. 하지만 수술 이후 유경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유감스러운 도시> 이후 6년 만에 출연한 영화가 공포 장르인데 흥미롭게도 평소 한고은은 “공포영화를 잘 못 본”다. 씩씩하고 당당하고 건강한 이미지를 가진 그가 설마 공포영화 따위를 무서워할 리가. “맞다. 공포 장르 중에서 <쏘우>처럼 잔인하게 난도질하는 영화는 그나마 잘 보는데 <오멘> 같은 스타일의 호러는 정말 못 본다. 어찌나 겁이 많은지 중학생 때까지 놀이공원에 가면 탈 줄 아는 게 회전목마밖에 없었다. (웃음)” 그럼에도 그가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건 배우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배우라면 이제껏 해왔던 캐릭터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나 역시 한번도 출연하지 않았던 공포물을, 쭉 출연해왔던 드라마가 아닌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면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평소 미국 드라마 <하우스>나 <그레이 아나토미> 시리즈 같은 메디컬 드라마를 즐겨봤던 덕분일까. 의학을 소재로 하고, 병원이 주요 배경인 이 영화가 친숙하게 다가온 것도 어렵지 않게 출연을 결정하는 데 한몫했다. “장기이식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이전에도 많았기 때문에 시나리오가 허무맹랑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좋은 스릴러 소설 한권을 읽은 느낌이 든 것도 그래서다. <오멘> 같은 귀신이나 종교 현상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면 출연을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경험한 영화 촬영 현장은 일정에 쫓겨 빡빡하게 진행된 탓에 낯선 기분을 즐길 겨를조차 없었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일정이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저예산영화이다 보니 스탭도, 배우도 날이 선 채로 작업했다. 기상 때문에 일정이 조금이라도 꼬이는 날엔 현장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고. ‘빡세다’ 말고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을 정도였다. (웃음)” 말만 들어도 얼마나 긴장된 상태로 연기를 했는지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영화 속 한고은의 연기는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도 없다. 공포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주인공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데 충실할 뿐이다(물론 여기에도 반전이 있긴 하다). 한고은 역시 이 사실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쉬움이 많다. 그래도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얻었고, 좋은 경험이 됐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매년 한편씩 출연해 익숙한 드라마 대신 마흔이라는 나이에 영화에 다시 도전한 건 반갑다.
되돌아보면 몇몇 작품에서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2006)에서 한고은이 연기한 배우 미자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했던 잡초 같은 여자”였다. 한고은은 평탄치 못한 삶을 감내하는 미자를 아슬아슬하게 버텨가며 표현했고, 미자가 더욱 안쓰럽게 보였던 것도 그래서다. 오랫동안 연기를 전문적으로 해온 선배배우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연기했던 까닭일까. 한고은은 아직도 미자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빠져나오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린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나보고 ‘쟤, 술 마시고 연기한다’고 그랬는데 미자는 술 마시고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다. 연기할 때 술을 마시지도 않고.(웃음)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지금 미자를 맡으면 그때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살면서 늘 그런다.”
<사랑과 야망>이 끝난 뒤 곧바로 출연했던 드라마 <경성스캔들>(2007) 역시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전작에서 에너지를 소진한 탓에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던 데다가 시대극이 내 이미지에 맞지 않을 거라 판단해 출연 제안을 거절”했지만, “감독의 거듭된 요청과 한눈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라 합류”한 작품이었다.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한 차송주는 조국을 위해 기생으로 위장한 독립투사였는데, 드라마를 다시 봐도 꽤 매혹적이었다.
이 두편의 드라마는 한고은이 단지 키 크고 몸매가 빼어난 섹시 스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낸, 올바른 ‘한고은 사용법’이었다. 그 뒤로도 매년 드라마 한편씩에 꾸준히 얼굴을 내밀어 연기력을 검증받았던 그가 그간 영화 출연이 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출연 제안이 들어오지 않아서? “아예 안 들어온 게 아니었다. 좋은 작품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여배우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신체 조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가 없어서? “그런 생각도 하긴 했다. 모든 게 때가 있나보다.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 당시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건… 내 의사가 아니었다. 영화가 로망인데 어떻게 일부러 출연을 안 했겠나.”
영영 늙지 않을 것 같았던 한고은이 올해로 마흔살이 됐다. 오랜만에 영화에 도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요즘 배우로서 고민이 많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을까. 배우 한고은은 또 어땠나. 39살 때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굉장히 많이 가졌다. 마흔이 된 지금은 그런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는 내 나이를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배우로서 나이듦을 부정하고 싶거나 부담스럽진 않을까. “3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그런 두려움이 컸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외모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언젠가 엄마라는 숭고한 옷을 입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도 많이 하고. 망가지는 한고은도 보고 싶다고? 나도! (웃음)”
Magic hour
욕망의 미자
사람마다 의견이 제각각이겠지만, 한고은 하면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미자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미자는 “살아남아야만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는 여자였다. 그래서 가난했을 때는 “밥 한끼 먹는 게 삶의 목표”였지만, 신분이 상승할수록 그녀의 욕망은 “좋은 집, 옷, 역할, 사랑 등을 차지”하기 위해 점점 더 커져간다. “드라마를 찍는 내내 미자에 흠뻑 빠져 살았다”는 한고은의 말처럼 미자는 정말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면 미자를 표현하기 위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한고은이 정말 대견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