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ash on]
[flash on] “이 얘기는 무조건 여성이어야 한다”
2015-04-30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차이나타운> 한준희 감독

한준희 감독의 데뷔작 <차이나타운>은 근래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강력한 여성 캐릭터들을 앞세운다. 그것도 김혜수, 김고은이라는 그럴싸한 짝패다. 사회에서 궁지로 내몰린, 이름 없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차이나타운. 그곳에는 ‘엄마’(김혜수)라고 불리는 여자와 지하철역 10번 사물함에 버려진 뒤 엄마 밑에서 길러지는 아이 일영(김고은)이 있다. 영화는 이 두 여자를 중심으로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분투하는 인물 군상을 품어간다. 장르적 클리셰를 좇으면서도 ‘생존’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자신만의 무드와 힘 조절로 끝까지 밀어붙인 신인감독의 뚝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개봉(4월29일)을 앞두고 한준희 감독을 만났다. <차이나타운>이라는 냉혹한 세계가 시작되고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전해들었다.

-<차이나타운>이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됐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첫 작품이라 부족한 게 많았는데 함께한 배우와 스탭에게 적어도 누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이제 관객과 만날 일만 남았다. 흥행은 나의 소관이 아니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어떤 이야기가 실마리가 된 건가.

=<사이코메트리>(2013)를 포함해 5년 정도 전업 작가로 글을 써왔다. 돌아보면 결국 모든 작가는 죽을 때까지 같은 주제를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는 환경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영화의 장르나 소재는 바뀔지 몰라도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항상 동일하다. 내 화두는 ‘생존’이다. 코인로커에 버려진 아이와 차이나타운에 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생존 문제가 궁금해졌다.

-생존이라니 꽤 근본적이고 묵직한 질문이다.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만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곧잘 해왔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외국인 이민자, 돈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내려는 엄마와 그 식구들 모두 하나같이 자신의 신분이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차이나타운에서 자신들이 아직 ‘쓸모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일영과 엄마, 두 여성이 극을 힘껏 끌고나간다. 여성 캐릭터 기근이라는 한국 영화계에서 이 자체로도 신선한 시도 같다.

=‘여성판 <테이큰>(2008), <아저씨>(2010)라도 찍을 셈이냐, 투자를 받으려면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꿔라, 그래야 캐스팅이 쉽다’ 등의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이 얘기는 무조건 여성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일부러 남성 캐릭터와 차별화를 두기 위해 여성의 얘기를 쓴 건 절대 아니다. 두 여자가 어떻게 날을 세우고 대립하는가, 또 서로를 어떻게 받아주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무섭고 뜨겁고 애틋하게.

-차이나타운의 지배자인 마우희(김혜수)는 자신의 이름 대신 늘 ‘엄마’로 불린다. 모성을 유독 강조한 이유가 있나.

=인간에 대한 보편성과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시대의) 로컬성에 충실한 영화가 좋은 영화 같다. 한국 사회에서 엄마라는 단어만큼 보편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말이 또 있을까. (전통적으로) 남자는 어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 마지막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책임을 지는 건 여성, 엄마의 몫이었다. <차이나타운>이 (엄마에서 일영으로 이어지는) 승계와 대물림에 관한 이야기라면 엄마와 딸의 구도가 맞다고 봤다.

-시나리오 작업 단계부터 일영 역으로 김고은을 염두에 뒀다고 들었다.

=<은교>(2012)를 보는데 고은씨는 모두를 반하게 만들고, 설득할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더라. 굉장히 어여쁜 인물인 일영도 그래야 했다. 다만 일영은 멋은 있는데 멋있게 보여서는 안 되고, 예쁘지만 예뻐 보여서도 안 된다. 그 간극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했다. 김혜수 선배를 비롯해 조연들도 하나같이 세고 독특한데 그들 사이에서 일영은 중심을 잡고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다. 영화의 엔진 같은 역할이랄까. 고은씨가 정말 잘해줬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찍어야 했는데도 모든 대사, 지문을 다 연구해오더라. 근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신기할 정도로 준비한 모든 걸 내려놓고 동물적으로 움직이는 배우다.

-엄마는 전사(前史)도 없고 도통 그 속내를 알 수도 없는 인물이다. 그만큼 감정과 서사의 빈 공간을 채워나가야 할 배우의 역할이 컸을 텐데.

=엄마의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거나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극중에서 이 여자가 엄마라고 불리는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면 관객도 모르는 게 맞다. 군데군데 드러나는 모습으로 유추만 가능할 정도가 좋았다. 김혜수 선배도 자신이 보스라고 했을 때 떠오를 법한 온갖 이미지를 다 벗어나자고 얘기했다. 동의했다. 촬영 중반을 넘겼을 때 김혜수 선배가 그러더라. ‘프리 프로덕션 때는 이 역할이 마냥 세고 거칠다고만 생각했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이 여자 인생이 너무 슬프다’고. 찍으면서 캐릭터가 살아나게 만들어주신 덕에 내가 안심됐다.

-어린 일영(김수안)이 엄마와 첫 대면을 했을 때나 성인 일영이 위기의 순간을 맞았을 때 한결같이 “배고프다”는 말을 한다. 엄마와 식구들이 음식을 앞에 두고 마주 앉는 장면도 많더라.

=생존은 곧 의식주와 연결된다. 일영이 먹는 음식, 입고 있는 옷이 바뀔 때 생존의 문제도 변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엄마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밥 먹었니?’가 아닌가. 먹는다는 건 이 영화에서 그만큼 중요했다. 또 이들이 먹는 음식(자장면을 비롯한 중화요리, 분식)은 하나같이 쉽게 시켜먹고 사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들이 머무는 사진관에도 주방은 있을 텐데 아무도 음식을 해먹지 않는다. 그런 행위가 이들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결국 일영에게 엄마는, 엄마에게 일영은 어떤 존재일까.

=엄마는 자기 새끼가 이 세계 밖으로 나가서 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자신처럼 일영도 차이나타운에서 살아갈 것이고 그게 최선이라고 여긴다. 어찌보면 엄마는 일영의 미래다. 서로가 서로의 짝인 거다.

-혹시 작업의 레퍼런스가 된 작품이 있나.

=내가 영화 오타쿠다. 특별히 가리는 것 없이 두루 다 본다. 그중 <대부>(1972)를 가장 좋아하고 <피와 뼈>(2005), <드라이브>(2011)도 좋다. 이번 작업을 위해 특별히 봤다기보다는 그동안 봐온 작품들이 자연스레 참고가 됐다.

-영화계에는 언제부터 발을 들였나.

=고2 때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스무살 때 <…ing>(2003) 소품팀에서 일했고, 이후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기획, 마케팅, 기술팀 업무를 다 경험해봤다. 시나리오를 계속 써왔고 준비하던 작품이 엎어지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앞서 작가에게는 평생 가져가야 할 주제가 있다고 했다. 계속해서 써내려가고 싶은 이야기는 뭔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면 관점도 성격도 조금씩 바뀌겠지만 아직까진 젊어서(한준희 감독은 1984년생이다) 그런지 날선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 원래 산다는 건 힘든 일 같다. 그래도 힘들게 작업해 개봉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처럼 가끔씩 오는 좋은 순간 때문에 나머지 힘든 시간을 버티는 것 같다. 삶을 마냥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런 내 생각을 좀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유독 ‘작가’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지을 작(作), 집 가(家). 작가는 집을 짓고, 일가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 의미가 좋다. 나는 아직 일가를 이루진 못했지만 영화에서 엄마는 일가를 이루려는 사람 같다. 언젠가 나도 가족을 꾸리고 영화를 통해 먹고살게 된다면 이 말의 무게를 보다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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