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오! 마돈나]
[한창호의 오! 마돈나] ‘미친 사랑’의 낭만주의 연인
2015-05-08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Isabelle Adjani 이자벨 아자니
<카미유 클로델>

이자벨 아자니는 데뷔하자마자 ‘제2의 브리지트 바르도’라는 애칭을 들으며 영화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특히 20살이 채 안 됐을 때 출연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델 H 이야기>(1975)가 결정적이었다. 이 작품에서 표현된 광기, 열정, 신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능의 매력으로 아자니는 스타 감독들의 캐스팅 목록 1순위에 올랐다. 곧바로 아자니는 로만 폴란스키의 <하숙인>(1976), 앙드레 테시네의 <바로코>(1976) 등 유명 감독들의 문제작에 잇따라 출연하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아자니의 이런 평판은 변한다. 아자니가 당시 세를 불려가던 프랑스의 인종주의를 비판하고, 특히 극우 정당 ‘인민전선’과 각을 세우면서부터다. 더 나아가 아자니가 자신의 아버지는 알제리인이라고 밝힌 뒤부터, 순식간에 그녀는 “프랑스의 스타이기는커녕 종종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까지 부정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신성

아자니의 등장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아델 H 이야기>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딸인 아델이다. 그녀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영국인 장교를 붙들기 위해 그의 영지인 미국으로, 또 카리브해로 따라가며 사랑을 쟁취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여성 혼자 외국을 떠도는 것 자체가 위험할 때인데, 그때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의 명성을 이용하며, 오직 연인 곁에 머물기 위해 모든 지혜를 다 짜낸다. 아델이 사랑하는 대상은 사실 노름에 빠져 있는 볼품없는 하급장교인데, 그녀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대상을 이상화하고, 사랑의 감정을 숭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따른다. 말하자면 아델이 사랑하는 것은 그 남자라기보다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의 고결한 마음이다. ‘미친 사랑’ 혹은 ‘낭만적 사랑’은 아마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의 절대화된 사랑을 실현하는 듯한 아델의 광기는 곧바로 아자니의 개성이 됐다. 아델은 괴테의 베르테르처럼, 사랑의 순결한 감정 그 자체를 위해 목숨마저 내놓을 준비가 돼 있는 ‘낭만적’ 인물인데, 그런 ‘미친 사랑’의 주인공으로 아자니는 더없이 맞아 보였다. 혼 들린 눈동자, 관능적인 입술, 강인한 검은 머리칼은 아자니의 광기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고, 그런 이미지는 이후 그녀의 스타성으로 남는다.

곧이어 폴란스키가 아자니의 광기의 이미지를 이용했다. <하숙인>에서 아자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하숙인>은 폴란스키의 소위 ‘아파트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데, 앞의 두 작품인 <혐오>(1965)와 <악마의 씨>(1968)처럼 여기서도 폐쇄공포를 유발하는 공간은 환상과 뒤섞이고, 아자니는 마치 유령처럼 현실에 출몰했다.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며, 또 알 수 없는 히스테리를 폭발하는 아자니는 광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혐오>에서의 카트린 드뇌브의 강박, <악마의 씨>에서의 미아 패로의 실성처럼, <하숙인>에선 아자니의 광기가 빛났다.

유령 같은 이미지는 베르너 헤어초크의 <노스페라투>(1979)에서 다시 꽃핀다. 무르나우의 표현주의 걸작인 <노스페라투>(1922)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아자니는 드라큘라 백작과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는 창백한 희생자가 된다. 미친 연기라면 한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클라우스 킨스키가 드라큘라 백작이었는데, 뱀파이어보다 더욱 창백한 아자니의 존재는 결코 드라큘라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트뤼포, 폴란스키, 헤어초크의 작품을 거치며 아자니의 ‘광기’는 그녀의 개성으로 각인됐다.

알제리인 아버지, 독일인 어머니

아자니는 경력 초기에는 부친이 알제리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부친은 2차대전 당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군인이었다. 독일에서 아내를 만나, 파리로 돌아온 뒤 결혼했다. 아자니는 집에서는 독일어를, 바깥에선 프랑스어를 말하며 자랐다. 그런데 학교에 진학하며, 부친은 숨어 있어야 차라리 나은 ‘어두운’ 존재라는 걸 알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남편의 신분을 부끄러워했고, 숨기려 했다. 그녀는 남편이 미국인인 것처럼, 또는 터키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자동차 정비공인 부친은 남들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고, 종종 프랑스인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했다. 딸은 그런 모습을 모두 보며 성장했다. 10대 때부터 연기에 소질을 보인 아자니는 불과 17살에 명성과 권위를 지닌 극단 ‘코미디 프랑세스’의 단원이 됐다. 집안의 경사였고, 곧이어 아자니는 트뤼포를 만나며 영화계의 신성으로 우뚝 선다. 프랑스 최고의 국내 영화상인 세자르영화제에서 주연상 후보에 단골로 올랐다(아자니는 현재까지 주연상을 5회 수상했다). 1981년엔 심리 스릴러 <이자벨 아자니의 퍼제션>(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으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자니는 프랑스의 대표 배우로 거칠 게 없어 보였다.

아자니의 스타성이 위협받은 것은 부친이 알제리인이라고 밝힌 뒤부터다. 그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부친이 원하지 않았다. 1985년 부친이 죽은 뒤, 아자니는 이 사실을 공개했고,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아자니가 당시에 세를 불려가던 프랑스 사회 내의 반이민주의,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자 온갖 악소문까지 나돌았다. 아자니가 에이즈에 감염돼 죽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위기를 돌파한 작품이 <카미유 클로델>(감독 브뤼노 뉘탕, 1988)이다.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자 조각가인 카미유 클로델의 전기영화다. 아자니는 앙드레 테시네의 <브론테 자매>(1979)에 이어 다시 여성 예술가를 연기했는데, 여성 조각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던 당시에, 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클로델의 모습은 아자니의 당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자니는 전통과 통념에 맞설 때 빛났다. <브론테 자매>에서 아자니가 맡은 역할도 세 자매 중 가장 야성적이고 반전통적인, <폭풍의 언덕>의 저자 에밀리 브론테였다. 아자니는 <카미유 클로델>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다시 영화계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스타가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대변하며, 여론과 맞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자니는 더이상 배우를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휘발성은 지금도 잠재돼 있다. 프랑스의 반이슬람주의, 반외국인정서는 극우 정치가들의 단골 메뉴이고, 최근엔 그 세를 더욱 불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아자니는 ‘상식’을 환기하는 소중한 스타로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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