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교 감독 말을 많이 실어달라. 내 얘기도 정 감독이 한 것처럼. (웃음)” 인터뷰를 하기 전, 김한민 감독은 정세교 감독을 먼저 챙겼다. 자신의 2011년작 <최종병기 활>의 조감독이자 다큐멘터리 <명량: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개봉 5월7일)를 함께 연출한 후배 감독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부탁일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명량: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는 감독의 전작 <명량>과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다큐멘터리다. <명량>에서 준사 역을 맡은 오타니 료헤이, 송희립 장군을 연기한 이해영, 나대용 장군을 맡은 장준녕 등 세 배우가 김한민 감독과 함께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거쳤던 곳을 차례로 따라가는 이야기다. 네 남자가 이순신의 행적을 따라 걷는 <역사스페셜>이라고나 할까. 김한민 감독은 <명량>을 찍고 난 뒤 무슨 못다 한 말이 남았기에 명량해전과 이순신 장군을 손에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16일 동안 쉬지 않고 걸었”던 까닭인지 양볼이 쏙 들어가 몰라보게 날씬해진 김한민 감독과 이 다큐멘터리로 연출 데뷔한 정세교 감독을 만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
-김한민 감독은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
=김한민_많이 빠졌다. 힘들었다. (웃음)
정세교_가까이서 지켜보니 10kg 정도 빠지신 것 같다. <명량>을 하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다. 요즘도 미음을 드신다고 한다.
-<명량>을 끝낸 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무엇인가.
=김한민_<명량>이 관객수 1500만명을 넘어섰을 때 어떤 떨림이 있었다. 그 떨림이란 두려움이라 할 수도, 부담감이라 할 수도 있다.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긴박하게 노력했던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다큐영화를 만들어야 감독으로서, 사람으로서 쇄신할 수 있겠다 싶었다.
-‘명량해전은 과연 조선이 승리한 전쟁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김한민_예전부터 ‘명량해전은 전략적으로 일본 수군의 승리’라는 분석이 일본 역사기록에 나와 있어 그 의견에 대한 반박 자료도 함께 엮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세교 감독과 공동 연출을 하게 된 이유는 뭔가.
=김한민_혼자 할 순 없었다.
정세교_아니,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나. (웃음)
김한민_정말. 출연까지 해야 해서 혼자 하기엔 벅찬 분량이었다.
-공동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어땠나.
=정세교_<최종병기 활>을 함께하면서 감독님의 성격도 잘 알고, 관객으로서 <명량>도 재미있게 봤다. <명량>를 보고 나서 궁금증이 두 가지 생겼다. <난중일기>가 어떤 내용일까와 울돌목에 정말 회오리바람이 불까였다. 그러던 차에 공동 연출 제안을 받았고, 이순신과 명량해전을 잘 아는 감독님 옆에 역사를 잘 모르는 내가 있으면 이야기의 균형이 맞을 것 같아 제안을 수락했다.
-함께하자고 제안한 걸 보면 <최종병기 활>이 끝난 뒤에도 사이가 좋았나보다.
=김한민_아니, 감독과 조감독의 사이가 나빠야 하나. (웃음) 감독과 제작자, 감독과 배우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는 흔하지만, 감독과 조감독은 어려움을 함께 겪었기에 편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다.
-촬영 전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구상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김한민_배우 셋과 내가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의 16일간 행적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수군 재건 과정을 담았으면 좋겠다는 큰 틀을 제시했다. <난중일기>와 울돌목의 회오리 바다도 함께 담아내자. 그 방향 안에서 정세교 감독과 양희 작가가 디테일한 아이디어를 채워나갔다.
정세교_공동 연출을 맡자마자 김한민 감독님이 <난중일기>를 읽길 권했다. <역사스페셜> 같은 TV다큐멘터리를 보는 건 좋아하는데 역사책을 읽는 걸 즐기진 않는다. 그런데 읽어보니 정말 재미있더라. 김 감독님이 이런 얘길 해주셨다. 이야기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쌓아올려 관객이 집중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고 말이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기했던 최민식을 캐스팅할 계획은 없었나.
=김한민_이순신과 배우 최민식은 신비주의로 남는 게 맞다. 이순신 장군을 아련히 추억하면서 그의 심경을 따라가는 것이 그에게 표하는 경의라고 생각했다.
-김한민 감독이 직접 출연한 이유는 뭔가. 배우 셋이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따라가는 모양새도 상관없지 않나.
=김한민_그보다는 <명량>을 만든 사람이 직접 출연해야 진심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게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큰 차이인 것 같다.
-김한민 감독, 오타니 료헤이, 이해영, 장준녕 등 남자 넷의 캐릭터가 제각각이다. 김한민 감독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는지, 당시 이순신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설명해주는 역할이었다면 일본인인 오타니 료헤이는 주로 물었다. 그러면 이해영, 장준녕이 영화 속 대사를 곁들이면서 알기 쉽게 알려줬고. 배우마다 역할을 어떻게 분담했나.
=정세교_배우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캐릭터로 보여야 한다고 주문한 건 하나도 없다. 출연을 제안하기 전에 사전 인터뷰를 했다. 한달 반 가까이 일정을 비워야 하며, <명량> 출연배우들이 실제 이순신의 수군 재건 과정을 따라가는 프로젝트라는 계획만 얘기해줬다.
김한민_신묘하게도 4명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됐다. <서유기>에 비유하자면 가장 나이가 많은 나는 삼장법사, 한국사를 잘 모르는 오타니 료헤이는 사오정. 이해영은 손오공이며, 덩치 큰 장준녕은 저팔계. (웃음)
정세교_배우들에게 이런 얘긴 했다. 김한민 감독을 감독이 아닌 형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눈치보지 멀고 편하게 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김한민_그런 기운이 배우와 배우 사이뿐만 아니라 스탭과 배우 사이, 정 감독과 양희 작가 사이에도 있었다. 그게 이 작업의 매력이었던 것 같다.
-그중 흥미로웠던 조합은 김한민 감독과 오타니 료헤이였던 것 같다. 한국사를 잘 모르는 오타니 료헤이에게 김한민 감독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장면은 마치 이 다큐멘터리와 관객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김한민_누구는 그를 캐스팅한 게 신의 한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웃음) 사실 그가 출연을 결정할 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일본인이라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감정이 더 복잡했을 것이다. 화엄사 스님들이 승병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화엄사가 전소됐다는 사실은 오타니 료헤이에게 얼마나 강도가 센 이야기였겠나. 그는 몰랐던 사실을 알아갔고, 아는만큼 변해갔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딱 나와 오타니 료헤이의 관계였으면 좋겠다. 서로 잘 몰랐던 건 알아가고, 이해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관계 말이다.
-얼마나 걸었나.
=정세교_이동한 거리는 총 450km. 실제로 걸었던 거리는 270km. 나머지 180km는 배로 이동했다.
-큰 체구 때문인지 김한민 감독은 걷는 걸 싫어할 줄 알았는데.
=김한민_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웃음) 수군 재건의 길을 걷는 게 이 프로젝트 목표라서 걸어야 했다. 걸으면서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느끼자. 중간에는 말 대신 자전거를 탔고.
-힘들진 않았나.
=김한민_다리가 욱신거려 나중에는 걸을 수가 없겠더라.
정세교_촬영 전 사전 답사할 때 도로로만 이동했다. 그때 감독님이 도로로 다니면 안 된다고 하셨다. 시청, 군청 등 지자체에 문의해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이동했던 길을 찾아라. 그 길을 찾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가는 곳마다 경관이 빼어나더라.
=정세교_그래서 제작비가 좀 들더라도 헬리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배우들도 고생 많이 했다. 16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김한민_신기하게도 촬영하는 동안 모든 날씨를 경험했다. 햇빛이 쨍쨍할 때도, 비가 내릴 때도, 안개가 낄 때도 있었다. 눈만 내리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눈이 내렸다. 아이러니했던 건 주변 풍광이 빼어나 감탄사를 연발했는데 당시 그 길은 이순신에게 절망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이다. 가는 곳마다 왜군의 침략을 받아 불타 없어졌으니 말이다.
-영화는 승려들과 합심해 왜군과 맞선 석주관성을 시작으로 군량미를 확보하게 되는 고내마을, 육군으로 합류하라는 어명을 받게 되는 열선루,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서신을 보낸 회령포까지 다양한 공간을 소개한다. 이중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나.
=김한민_다 기억에 남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곳은 석주관성이다.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많았는데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열선루는 안타까웠던 게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간 곳은 여러 자료를 조사해 열선루라고 추정되는 공간이었다.
정세교_실제로 본 울돌목은 회오리치는 물결 소리에 압도당했다.
김한민_울돌목을 느끼려면 배를 타고 나가봐야 한다. 4DX로 느껴야 돼. (웃음)
정세교_바람이 너무 세서 드론을 바다 위에 띄우지 말자고 얘기했는데 김한민 감독이 그 풍경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 헬리캠을 띄웠다. 덕분에 장대한 그림을 담아낼 수 있었다.
-16일 동안 찍은 분량은 얼마나 됐나.
=정세교_매일 10시간 이상 찍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었으니까. 조감독이 그랬다. 배우들이 얘기하는 건 하루 이틀뿐일 거라고. 그런데….
김한민_우리는 참 할 말이 많았다. (웃음) 촬영팀과 동시녹음팀이 왜 이렇게 말이 많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NEW가 배급을 맡았다. <명량>을 투자, 배급한 CJ엔터테인먼트와 함께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김한민_당시 NEW에 4억원 규모의 저예산 펀드가 있었다.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펀드의 성격과 맞다고 판단해 CJ에 양해를 구하고 NEW와 함께하게 됐다.
-“<명량> 수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김한민 감독과 CJ의 사이가 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었다.
=김한민_금융수수료를 둘러싼 이견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다행스럽게도 CJ가 좋은 결단을 내렸다. 이 다큐멘터리가 NEW와 함께한 건 그 일과 무관하다. 업자들이 워낙 엮는 걸 좋아하지 않나. (웃음)
정세교_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투자자와 관객이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
김한민_역사 공부 붐이 일면 좋을 것 같다. 영화를 본 한 아이돌 스타가 그러더라. 이렇게 역사를 배웠다면 가수 대신 국사 선생님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웃음)
-역사 다큐멘터리는 시리즈 형태로 계속 만들 거라고 들었다.
=김한민_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임진왜란이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 끼친 영향도 다루고 싶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본국으로 돌아갔던 일본 장수들이 내란과 내분을 겪고, 유배 생활을 하게 된 사연,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뒤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게 된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리고 싶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는 과정에서 역사적인 교훈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정세교_빅스톤에 내 차기작은 없나. (웃음) 아이템이 워낙 많으니까. 인터뷰가 끝난 뒤 곧바로 마지막 보충 작업하러 가야 한다. 다큐멘터리 개봉을 잘 마무리한 뒤 차기작을 생각하겠다.
김한민_차기작은… 지금 교통정리하고 있다. 어떤 작품이 될지 고민 중이다.
-한 인터뷰에선 “1932년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日王)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시나리오 <자객열전>이 나왔다”고 밝혔던데.
=정세교_그것도 김 감독님이 가진 많은 아이템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