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나오미 와츠] <위아영>
2015-05-12
글 : 김보연 (객원기자)
나오미 와츠
<킹콩>

최근 나오미 와츠의 필모그래피는 과감한 선택의 연속들로 채워져 있다. 한두편은 우연이라 할 수도 있고 배우의 짧은 변덕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오미 와츠는 그런 단계를 넘어섰다. 특히 2011년의 <J. 에드가>(감독 클린트 이스트 우드)를 시작으로 <더 임파서블>(감독 J. A. 바요나), <투 마더스>(감독 앤 폰테인), <다이애나>(감독 올리버 히르비겔), <버드맨>(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세인트 빈센트>(감독 테오도어 멜피), <위아영>(감독 노아 바움백)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도전들은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여기에 <멀홀랜드 드라이브> <21그램> <킹콩> <이스턴 프라미스> <퍼니 게임> 등 이전 대표작까지 포함하면 그녀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를 가진 40대 여배우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는 단지 출연한 영화의 작품성뿐 아니라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의 다채로운 면면을 보아도 그렇다. 일단 그녀는 배역을 고를 때 파격을 겁내지 않는다. 나오미 와츠는 소위 ‘망가지는’ 연기를 거리낌없이 선보이고, 주조연의 구분을 따지지 않으며,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는 캐릭터까지 꿋꿋하게 연기해낸다. 역할마다 나이, 외모, 억양을 계속해서 바꾸는 것은 기본이다. 이를테면 <J. 에드가>(2011)에서 특수분장을 하고 노인을 연기한 뒤 <더 임파서블>(2012)에서 문자 그대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극한 상황에 뛰어들고, <다이애나>(2014)에서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주인공의 내면을 선보이는 식이다. 또한 뉴욕의 인텔리 중산층을 연기한 <위아영>에서도 구토와 같은 강도 높은 몸개그를 선보이며 사정없이 망가지는 쪽을 택한다. 심지어 <세인트 빈센트>(2014)에서는 러시아 출신의 임신한 매춘부까지 연기했으니 그야말로 거침없이 종횡무진하는 중이다. 그 과감함 때문에 나오미 와츠가 이런 깜짝 변신에만 맛을 들인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배역의 의외성만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예쁜 여배우’의 전형을 하나씩 깨트려가는 나오미 와츠의 행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쾌감을 주지만 그녀는 지금 특이한 캐릭터를 수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연기로 서커스를 펼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위아영> 개봉 당시 한 인터뷰어가 지금까지 나오미 와츠가 함께 작업한 거장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 영화에 왜 출연했냐고 묻자, 그녀는 “굳이 대사를 외울 필요가 없을 정도의 뛰어난 시나리오” 때문이라고 즉시 대답했다. “혀에 와서 닿는 대사들”이 마음에 들어 캐스팅이 결정된 뒤로 3년을 꼬박 기다려 결국 출연했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변함없이 작품 자체의 매력을 우선순위에 두고 진지하게 영화와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근래 출연작 중 가장 적은 분량을 연기한 <버드맨>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오미 와츠의 말에 의하면 <21그램>(2003)에서 협업한 적이 있는 이냐리투 감독은 그녀에게 “작은 역할”을 제안하며 미안함을 느낀 것 같다. 하지만 나오미 와츠는 <버드맨>에 출연한 것을 “대단한 도전”이자 “훌륭한 경험”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웠다”(learn)고 표현한다. 이를 신작 개봉을 앞둔 배우의 의례적인 단골 멘트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버드맨> 속 그녀의 모습은 이 답에 구체적인 믿음을 준다. 컷을 나누지 않는 편집과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배우들 사이에서 거침없이 분노와 서러움을 표출하는 나오미 와츠의 모습은 출연 분량과 관계 없이 그녀의 연기 영역이 또 한번 넓어졌음을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이때 그녀의 연기 세계는 어떤 정해진 완성형을 향해 가기보다는 좌로, 우로, 계속 확장하는 편에 가깝다.

이는 배우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나오미 와츠가 어떤 영화에 출연하든 관객은 그녀가 보여줄 모습을 더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이 영화에 긍정적인 긴장을 불어넣는다. 이를테면 <위아영>의 주된 갈등은 주인공인 벤 스틸러와 그 상대역인 애덤 드라이버 사이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사이에서 나오미 와츠가 통통 튀는 연기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정서적으로 훨씬 삭막하거나 주제에 있어 편협한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특히 나오미 와츠가 약간 과장된 모습으로 정신없이 힙합 댄스를 출 때는 이 영화에 은근히 녹아 있는 동시대 청년문화에 대한 비꼼까지 기분 좋게 잊게 만들 정도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장면에서 영화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 연기를 펼친다.

이는 불명확한 주제의식과 설득력 없는 캐릭터 묘사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다이애나>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다이애나는 그 변덕스러운 행동 때문에 도무지 내면을 짐작하기 힘든 인물이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 와츠의 연기가 다이애나의 캐릭터에 정서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녀는 당당한 현대 여성의 상을 제시하는 듯하다가도 고전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을 선보이며, 위인전 속 성인에 가까운 모습을 연기하다가도 어느 순간 남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처럼 하나의 캐릭터가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 사이의 불일치를 극의 단점이 아니라 다이애나에 대한 도발적 해석으로 읽게 만드는 건 물론 나오미 와츠의 연기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캐릭터의 의외성을 자신의 연기 안으로 끌어들여 소화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앙상블이라는 전제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오미 와츠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강렬한 색깔의 연기를 펼칠 때도 상대방의 영역을 억지로 침범하지 않는다. <버드맨>에서 나오미 와츠가 연기한 레슬리가 샘(에마 스톤)과 마이크(에드워드 노튼) 사이에서 곤란에 처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레슬리는 샘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모른 채 그녀를 흉보지만 바로 그 순간 샘이 모습을 드러낸다. 극의 긴장이 팽팽해진 바로 그 순간 나오미 와츠는 자신의 당혹감을 바로 폭발시키지 않고 (카메라 시선의 도움을 받아) 샘의 리액션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그제야 에마 스톤은 자신의 감정을 비로소 온전히 드러낼 수 있고, 그로 인해 샘을 부각시키려는 이 장면의 연출 의도는 빛을 발한다. 연극 무대 위에서 레슬리가 마이크의 돌발행동에 당황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때도 그녀는 혼자서 화를 내기보다는 마이크가 뻔뻔한 표정과 대사를 계속 선보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를 통해 자신의 여린 내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마이크의 개성 넘치는 성격까지 함께 끌어내는 것이다. 자기 옆에 있는 캐릭터에게도 풍부한 맥락을 더하는 이 같은 연기는 나오미 와츠를 배우로서 좀더 특별하게 만드는 점이자 그녀의 연기를 앞으로 더 기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보여줄 과감한 선택들을 계속해서 성실히 준비하고 있다. 당장 구스 반 산트와 작업한 신작 <시 오브 트리스>(Sea of Trees)로 올해 칸국제영화제를 찾을 예정이며, <인서전트>의 후속작인 <얼리전트> 1, 2부에도 연달아 출연해 SF세계에서 활약할 계획이다. 여기에 에롤 모리스의 신작 극영화에도 출연을 결정지었다고 하니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앞으로 더 다채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나오미 와츠의 연기 영역이 더 넓어질 것 역시 물론이다.

<세인트 빈센트>

Magic hour

봉춤 추는 임신부

그 재미에 비해 너무 일찍 잊힌 감이 있는 <세인트 빈센트>는 여러모로 나오미 와츠의 연기 경력에 특별히 기억될 영화다. 그녀는 일단 태닝을 했고, 머리를 핑크색으로 물들였으며, 이상한 러시아 억양을 사용했다. 나아가 임신부 역할을 위한 특수분장을 했으며 그 상태로 비키니를 입고 봉춤을 췄다. 파격적인 설정 때문에 이 영화에서의 나오미 와츠는 우리가 알던 배우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녹아들고, 빌 머레이를 비롯한 인물들 사이를 파고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부드럽게 각인시킨다. 술집 사장에게 해고당해 봉춤을 다시 추지 않는 건 아쉬움으로 남지만 <세인트 빈센트> 속 나오미 와츠의 괴상한 말투와 유쾌하면서 과장된 표정은 빌 머레이마저 순간 압도하는 강력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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