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식(손현주)은 승승장구하는 강력반 반장이다. 그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뒷돈을 받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곧 특급 승진을 앞둔 그는 회식 직후 홀로 집으로 돌아가던 택시 안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잠에서 깬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택시는 그가 전혀 모르는 길로 접어든 뒤다. 택시기사는 갑자기 강도로 돌변해 택시를 내달린다. 택시를 세우기 위해 창식과 괴한이 승강이를 벌인 끝에 택시가 외딴길에 멈춰 선다. 창식은 자신을 죽이려는 의문의 남자를 상대로 몸싸움을 벌이던 중 괴한이 자신에게 겨눴던 칼로 괴한을 찔러 살해한다. 창식은 승진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기로 하고 모든 증거를 지운 뒤 그곳에서 도망친다. 다음날 창식은 근처 공사현장에 설치된 고공 크레인 위에 매달린 괴한의 시체를 본다. 이로 인해 경찰청은 발칵 뒤집히고 사건의 범인을 체포하는 데 인력이 총동원된다. 최 반장은 수사망을 좁혀오는 동료들의 움직임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한편, 범인의 정체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악의 연대기>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로부터 복수의 대상이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복수의 주체는 일단 숨겨져 있고, 복수의 대상이 극을 이끌어나간다는 점은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를 연상시킨다. <올드보이>가 사적 복수의 이야기로 이를 풀어나갔다면 <악의 연대기>는 주요 캐릭터를 수사반장으로 설정, 사적 복수의 차원과 공적 복수의 차원을 흐리는 전략을 취한다. 이런 유의 복수극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재미는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남자에게 복수를 감행하려 하는가와 남자가 이것을 어떻게 돌파하는가에 있다. 일단 관객이 봐야 하는 것은 남자의 분투다. 그러나 행동하기보다는 상황을 관망할 필요가 있는 입장에 놓인 창식의 대응방식은 액션보다는 심리적인 차원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경찰의 수사방식이 CCTV 확인 같은 정적인 작업으로 이뤄진 것은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극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측면도 있다. 헐거워진 긴장감을 메우기 위해 사운드와 배우의 연기에 기대지만 복수의 비밀을 둘러싼 대단원에 다가가기까지 힘이 부친다. <쉬리>(1999)의 각색자이자,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 <튜브>(2003)를 연출한 백운학 감독이 1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여성 캐릭터는 이상하리만치 배제한 채 남성 캐릭터, 특히 부자 관계나 유사 부자 관계를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를 통해 오로지 악이 악을 낳는 악의 대물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