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실낙원
2015-05-14
글 : 김혜리
<바이클론즈>

<바이클론즈>는 레트로봇의 전작 <또봇>에 이어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보여준다. 부모가 행방불명된 후 가계부채에 쫓기며 생활하던 오씨네 5남매는 요금미납으로 끊긴 전기를 공짜로 얻어보려는 동기로 얼결에 지구방위대가 된다. 영웅의 의미 같은 것은 임무를 거듭하며 각기 성격에 맞는 경로로 찾아간다. 바쁘게 일하고 소소하게 행복한 5남매의 이야기는, 고전 만화 <비둘기 합창>이나 일하는 소년 소녀를 그린 이원수의 동화를 추억하게 만든다. 예쁠 것도 못날 것도 없이 그저 생생한 한국적 공간과 생활 문화의 묘사는 소박한 인류학의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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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우>(It Follows)의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은 10대 후반이라는 인생의 특정 시기를 특정한 무드로 표현하기 위해 장르를 유용하고 호러의 장치를 횡령한다. 이를테면 <팔로우>의 소녀들은 과거 호러의 여배우들만큼 헐벗고 돌아다니지만 노출로 인해 야하게 보이는 대신 추워 보인다. 그들이 사는 디트로이트의 황량한 교외 주거 지역은 <할로윈>이나 <스크림>의 악령이 출몰하는 동네보다, 가장 애틋한 미국 청년영화를 만든 감독 구스 반 산트의 단골 촬영지인 포틀랜드(<드럭스토어 카우보이> <파라노이드 파크> 등의 배경)와 닮았다. 한편 <팔로우>의 부모와 어른들은 시종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프레임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마치 다리만 등장하는 스누피 만화 <피너츠>의 성인 캐릭터들 같다. 보통 10대 연쇄살인 호러가 더욱 위태로운 게임을 연출하려는 실용적 목표를 위해 보호자들을 여행 보냈다면, <팔로우>는 장르 관습을 시적인 제약으로 거꾸로 활용해 아이들만의 호젓하고 적막한 실낙원을 그려낸다.

부모가 딱히 무능하고 무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문턱을 혼자서 또는 또래 친구들과 손잡고 넘어야 한다. <팔로우>의 10대들은 궁지에 몰려서도 “괜찮니? 도와줄까?”라는 이웃 어른의 제안을 사양한다. 죽임 당하기 직전,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마지막 인사 전화를 걸면서도 자초지종은 설명하지 않는다. 제이(마이카 먼로)와 친구들이 어른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는 까닭은 불신이나 원망이 아니다. 부모가 나를 아무리 사랑해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직감해서일 따름이다. 한편 <팔로우>에서 악령이 덮쳐오기 직전 일촉즉발의 순간들은 무서운 동시에 지극히 로맨틱하다. 주인공 제이가 소스라치는 나뭇잎을 가만히 응시하고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는 것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악령을 경계하는 행위인 동시에 세계를 향해 예민하게 개방된 청춘 특유의 감각을 전한다. 게다가 관객은 영화 초반 제이가 저주에 걸리기 전부터 풀잎을 쓰다듬고 벌레를 골똘히 들여다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10대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계절이다. 제이가 남자친구에게 고백한 대로 그녀는 오랫동안 사랑과 낯선 경험,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바라왔다. 그런데 정작 찾아온 것은 ‘그것’(it)이다. ‘그것’이, 즉 영화 속 악령이, 평생을 따라다닐 섹슈얼리티의 은유건 책임이건 아니면 생존을 위해 우리가 불가피하게 세상에 배설하는 해악의 메타포이건,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부모와 의논해봤자 근심의 총량만 늘어날 거라는 사실을. 10대 호러라는 말은 무색하다. 성년에 대한 자각이 곧 고요한 호러다.

04/06

호러영화에서 오로지 시체 카운트를 위해 스크린에 밀어넣어진 게 뻔한 매력 없는 인물들을 이제나저제나 퇴장 시점을 헤아리며 지켜보는 일은 고역이다. 한데 <팔로우>의 다섯 주연 캐릭터는 모두 개성 있고 감독이 애정을 기울인 티가 난다. 겁에 질려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제이, 예쁜 언니를 샘내왔지만 의리가 우선인 켈리(릴리 세프), 러시아 고전소설을 탐독하며 사태의 의미를 찾는 야라(올리비아 루카디), 수줍고 사색적인 폴(키어 길크리스트), 10대 소년다운 무모함으로 덤덤히 친구의 저주를 가져가는 그렉(다니엘 조바토). 그러나 개별적 특징보다 더욱 인상적인 점은 이들이 보여주는 순진한 연대다. 전입도 전출도 드문 동네에서 자란 다섯 남녀는 시기에 따라 친밀도는 변했지만 꼬마 적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며 성년의 입구까지 걸어왔다. 자매가 시차를 두고 한 소년과 첫 키스를 경험하는가 하면, 소꿉친구가 애인이 됐다가 도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이 아이들은 별나게 고결한 영혼은 아니지만 제이가 저주에 걸리자 그녀의 이야기를 무작정 믿어주고 끝까지 곁을 지킨다. 10대 호러가 지닌 공포의 변수 하나는 주인공들이 경제•사회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멀리, 자유롭게 도망칠 수 없다는 조건이다. <팔로우>의 10대들은 이 핸디캡을 콩깍지 안의 콩처럼, 한 배에서 태어난 어린 짐승들처럼 옹기종기 뭉쳐서 헤쳐나간다. 저러다가 자칫 섹스로 악령을 주고받으며 고통을 분담하고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건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가족보다 친구가 더 가족 같은 인생의 특별한 시기를 이보다 선연히 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연 첫 키스의 추억을 공유한 친구 제이와 폴은 섹스로 다시 연결된다. 그리하여 동시에 악령을 보게 된 둘은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잡고 걸어간다. 용감하게도!(<팔로우>가 설정한 규칙에 따르면 무관한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 악령은 희생자의 섹스 상대를 새로운 표적으로 삼지만 직전에 저주를 넘긴 사람의 눈에도 여전히 보인다.) 종장에 이르러 <팔로우>의 초점은 악령에게서 어떻게 도주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저주를 등에 업고 여생을 살아갈 것인가로 옮겨가는 셈이다. 제이와 폴은 더이상 제3자에게 고통을 전파시키지 않고 서로의 등 뒤를 지켜주며 견디기로 결의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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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대금, 장기매매 지하 조직을 둘러싼 <차이나타운>의 세계는 철저히 장르의 법에 지배된다. 이 우주에서는 멀쩡한 사람을 살해해 장기를 거래하는 사업이 유무형의 비용과 위험을 고려해도 과연 수지맞는 장사인지 따져선 안 된다. 다친 강아지를 돕는 방법이 어째서 병원에 데려가는 게 아니라 숨통을 끊어주는 것인지 반문하면 무너진다. 어디선가 본 듯한 <차이나타운>의 누아르 서사는 그것을 운반하는 주요 인물을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급격히 흥미로워진다. 제작진은 <차이나타운>이 여성영화로 불리는 것에 대해 주저가 있을지 모르나, 여성 캐릭터를 보기 드문 방식으로 묘사하고 이야기 속에서 운용했다는 사실을 빼면 영화의 매력이 상당 부분 반감되고 평이해질 거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차이나타운>의 줄거리는 “‘엄마’로 불리는 조직 보스 마우희(김혜수)가 수족으로 기른 ‘새끼들’ 중 한명 일영(김고은)을 편애하면서 사달이 난다”라고 요약할 수도 있을 거다. 내심 후계자로 점찍었던 일영이 수금하다 만난 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 기색을 보이자 ‘엄마’는 혹독한 시험을 강요하고, 비극이 꼬리를 문다. 그런데 유사한 구도를 지닌 <달콤한 인생>과는 화살표의 방향이 다르다. <달콤한 인생>에서 보스(김영철)의 분노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내 여자를 감히 넘봐?”로 해석된다면 ‘엄마’의 그것은 “내 새끼의 마음을 감히 가져가?”로 읽힌다. 나아가 <차이나타운> 주변 인물들의 이후 행동은 ‘엄마’와 일영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질투와 경쟁심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들은 ‘엄마’의 시선이 일영한테만 머무르는 것 같아 열등감을 느끼거나 일영이 기대만큼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아 괴로워한다.

김혜수의 ‘리더’ 연기는 처음이 아니다. 특히 최근 4, 5년 동안 김혜수는 <스타일> <직장의 신> <도둑들> 등에서 남자와 경쟁하다가 연애보다 동지애를 키우는 여자, 여성 후배들에게 영감을 주되 ‘자상한 언니’로서가 아니라 냉철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선배를 표현해왔다. 김혜수의 마우희는 ‘엄마’라고 불리지만 극중에서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준다거나 안아주는 모성과 직결된 언행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녀가 ‘엄마’여서 마땅한 이유를 굳이 찾자면 ‘새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여서다. 차이나타운의 지하세계라는 하나의 생태계를 의인화한 캐릭터라서다. 마우희는 중성적이라기보다 무성적인 인물이다. 남성화를 지향하지는 않지만, 기존 한국 대중영화 속 여성 인물에게는 이미 괄호쳐진 보이지 않는 수식어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기에 그것들을 소거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강력한 선언처럼 보인다.

맞은편의 김고은은 유보 없이 매혹적이다. 10대로 성장한 일영이 골목의 어둠 속에서 담배를 들고 성큼 걸어나오는 순간 솟아오른 짜릿함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배우에겐 카메라가 실컷 탐문하도록 자기를 계속 열어두는 괴력이 있다. 그것은 선천적인 내성과 일종의 근육이 있어야 가능한 힘이다. 일영은 기껏해야 스물 남짓한 젊은이다. 그녀의 인생은 ‘엄마’만큼 결정돼 있지 않기에 관객은 일영이 석현을 만나는 순간 연애가 그녀를 송두리째 바꿔놓지 않을까 기대하거나 우려한다. 하지만 석현을 향한 일영의 돌연한 감정은 성애보다는 쇼크와 동질감에 가깝다. 생전 경험하지 못한 인간의 행태, 친절과 온기에 전율해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돌려줘야 한다는 충동. 그리고 오래전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아이가 비슷한 사태를 겪고 영문 몰라 하는 다른 아이에게 뻗는 손길. 일영은 ‘엄마’와 달리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성장하지만 끝까지 여인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일영이 조직에서 함께 자란 친구 쏭(이수경)의 행패를 저지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쏭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에게 빚을 받으러 갔다가 약기운에 취해 그녀들을 폭행하고 있다. 일영은 여주인공이 응당 그러듯 맞는 ‘자매들’을 보호하는 바른 모습을 보이긴커녕 더 험한 주먹을 휘둘러 쏭의 의욕을 꺾어버린다. 관객은 찌푸릴지도 모른다. “나쁜 남자가 하는 짓을 여자가 그대로 하면 괜찮은가? 좋은 여성영화라면 여자는 남성적 폭력보다는 우월한 ‘여성적’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이는 앞질러 가는 기대다. 여성은 남성과 다를 바 없이 고결하고 다를 바 없이 비열하다. 캐릭터의 조건과 일관성으로 볼 때 일영이 여기서 좀더 사려 깊게 굴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이유는 이 캐릭터가 여자라는 태생적 조건밖에 없다. 그녀의 있지도 않은 미덕을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남자들과 똑같이 엄연히 그녀도 갖고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간과해야 한다. <차이나타운>은 그런 판단들을 걷어찬다. 쏭을 부축해나가던 일영에게 한방 먹은 치도(고경표)가 등 뒤에서 외치는 말이 재미있다. “너 그러다 진짜 좆 된다?” 불쑥 웃음이 났다. 그래, 정말 일영은 조폭영화 속 망가진 남자들처럼 될지도 모르겠구나. 근데 그러면 뭐? 장르영화 속 캐릭터의 운명으로 치자면, 남자가 망가지는 과정에 희생자로 동원되고 마무리로 그가 흘리는 악어의 눈물을 닦아주는 팔자에 비하면 낫지 않은가? 적어도 그것은 온전히 그녀가 결단한 파멸일 테니까.

폭력 묘사가 기본사양인 누아르, 갱스터영화, 특히 한국영화에서 여성이 연루된 폭력은 성적 모욕과 추행을 기본으로 포함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장기매매라는 소재에서 짐작할 수 있듯 폭력 수위가 꽤 높은 <차이나타운>은 이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한다. ‘엄마’가 보스인 세계라서일까? 이 영화에서 폭력은 여성이 상대편일 때도 성폭력을 뺀 그냥 폭력이다. 대등하게 패고 찌르고 똑같이 욕한다. 나는 현실의 범죄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 가운데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영화에서 보아온 성적 모욕을 수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 묘사가 얼마나 사실주의에 충실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남성끼리의 영화 속 폭력 묘사도 현실 범죄 행태에 대한 치밀한 리서치를 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감수성과 상상에 크게 좌우된다고 믿는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대중영화의 재현은 불가피하게, 재현하는 내용을 객관적 현실로 재확인하고 인증하며 때로는 강화한다.

<위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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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 세대

<위아영>은 뉴욕의 40대 다큐멘터리 감독 조쉬(벤 스틸러)와 20대 힙스터 감독 지망생 제이미(애덤 드라이버)와 만남을 통해, ‘보보스’니 ‘X세대’니 하는 이름으로 유독 긴 청년을 누린 60년대 말 70년대 초 출생자들이 비로소 중년을 자각하는 광경을 따라간다. 다큐멘터리 거장으로 존경받는 장인 레슬리(찰스 그로딘)를 앞에 두고 줄곧 주니어로만 살아온 조쉬는 바야흐로 ‘낀 세대’로서 이중의 열등감에 직면한다. 레슬리는 진실을 전하는 시네마를 변함없이 확신하고, 제이미는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뛰어나가 재미있는 것을 척척 찍는다. 그러나 사이에 낀 조쉬는 시야가 너무 넓고 생각이 너무 많아 탈이다. 조쉬가 제작비를 얻기 위해 투자자 앞에서 8년째 미완성인 작품을 설명하는 장면은 웃기지만 울적하다. “이 작품은 정치경제가 연관된 권력 구조, 아니 그것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가능성 자체에 관한 영화이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본질에 관한 영화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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