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x cross]
[trans × cross] 나에게 오는 미지의 단어를 기다린다
2015-05-18
글 : 이다혜
사진 : 오계옥
대표작 모음집 <사과에 대한 고집> 출간한 시인 다니카와 타로

다니카와 타로는 일본의 시인이다. <우주소년 아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제곡 가사를 쓴 것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스물한살에 데뷔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발표한 이후 63년간 시를 쓰고 발표하며 살고 있다. 얼마 전 신경림 시인과 주고받은 시를 모은 대시집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가 출간된 데 이어 이번에는 그의 대표작을 모은 앤솔러지 <사과에 대한 고집>이 출간되었다. “만유인력은/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라고 노래하고, “연애는 야단스러운 것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비웃지 못한다”는 산문으로 삶을 추동하는 힘을 묘사하는 그가 한국을 찾았다.

-<사과에 대한 고집>에 실린 글 중 가장 최근에 쓴 글은.

=2013년에 발표한 <미래의 아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들이다. <시간> <미래의 아이> 같은 작품들.

-최근에 쓴 시들은 청탁을 받고 쓰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2~3년 전까지는 전부 청탁을 받아 시를 써 발표했지만, 최근에는 청탁이 없어도 스스로 그저 시를 쓰고 싶어져서…. 발표한 적 없는 글을 모아 책으로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제 곧 일본에서 나올 책 중 한권이 그렇게 혼자 쓴 시를 모은 것이다. 청탁 받는 대신 혼자 쓰고 싶어서 쓴 글들.

-청탁을 받아 쓰는 것과 혼자 쓰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나.

=보통은 차이가 없지만 주문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지금 쓰는 글은 아이들을 위한 스위스의 나무장난감 카탈로그에 들어갈 것인데, 내가 평상시에는 장난감에 대해 생각할 일이 없으니 보통 쓰는 시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쓴다고 해야지. 또 다른 건 <데이즈 재팬>라는 보도사진 잡지에 쓰는 글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라든가 사회문제에 대한 사진을 모은 잡지인데, 거기에 실린 사진을 보고 글을 쓰는 경우로, 이런 글은 혼자 쓰는 글과는 다르다.

-글을 쓰는 스펙트럼이 넓다. 광고 카피도 있고 사진도 있고 가사도 있는. 산문과 시 혹은 글의 성격상 임하는 자세나 마음에 다른 점이 있나.

=완전히 다르다. 산문은 역시 의식으로 일한다. 시는 잠재의식으로 쓰는 쪽에 가깝다. 의식의 아래에 있는, 아직 아스라하고 어렴풋해서 말로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부터 단어를 빨아올리는 쪽에 가깝다. 산문은 완전히 이성으로 쓴다. 그래서 시를 쓸 때 예상치 못했던 단어가 떠오르는 게 재미있다.

-그런 무의식을 끌어올리기에 특별히 좋은 시간대가 따로 있나.

=특별한 시간대가 있지는 않지만 최근 몇년간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 안에서 꼬물거릴 때 재미있는 단어가 한두개 살포시 떠오르면 그것이 시의 모토가 되는 일이 있다.

-그러면 일어나기 전에 침대 안에서 시를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가.

=습관까지는 아니다. 가끔 그런 아침이 있다는 정도일까. 보통은 시를 써야지 하고 작정하고 책상 앞에 앉아 쓰는 게 대부분이다.

-<자기소개>라는 시를 보면 말들에 시달리며 살았다는 표현이 있다. 말로 평가받는 직업이라 괴롭다는 뜻도 되지만 또한 그런 일을 감수하고 살 만큼 좋아했다는 뜻으로도 읽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어느 쪽에 가까운 감정이 드나.

=시를 쓰는 것으로 말하자면 말 때문에 괴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일상생활 중에 말이라는 게 현실과 딱 이어지지 못하는 통에 괴롭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다. 나는 말이라는 것을 신용하지 않으니까.

-남들이 쓰지 않는 말, 새롭고 어려운 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시인들도 있는데 당신의 시는 오히려 일상 언어만으로 쓰였다.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고, 젊었을 때 가장 큰 고민이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였다.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 게 가장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독자에게 이해받지 못하면 돈이 되지 않으니(웃음) 현실적이었지. 그리고 추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할까. 철학자의 아들이었지만 철학적인 것은 생각지 않고 일단 현실적인 것을 다루며 살아가자고 줄곧 생각해왔다. 아마 시의 언어도 그런 연유로 일본인의 생활에 닿아 있는 것들을 쓰는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 같은 것이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본 철학자치고는 굉장히 쉬운 글을 쓰는 분이었다. 그런 것을 나 역시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생활적인 면에서는 다소 곤란한 양반이었다. 그런 면에서의 반발은 있었다.

-<사과에 대한 고집> 말미에 역자 요시카와 나시가 쓴 작가 소개가 있다. 이거 일본어로도 읽어봤나. 보통은 무슨 상을 언제 받고 이런 게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결혼 세번, 이혼 세번… (웃음)

=나는 상을 몇번 받고 이런 것보다 여성과의 관계가 훨씬, 으뜸으로 중요하다. (웃음)

-사랑에 대한 시도 많이 썼는데, 역시 사랑에 대한 시를 쓰는 것과 사랑을 잘하는 것은 별개인가.

=착실하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옆에 있던 이 책의 번역가 요시카와 나기가 말을 거든다. “확실히 세번 하셨죠.” (웃음)) 결국 그것도 세번 실패한 셈이 되었다. 할 때는 실패할 줄 전혀 모르고 했지만. 연애는 정말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지 않나. 증명할 수도 없고.

-시 쓰기와 시 읽기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가르칠 수 있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일본 교과서에서는 시를 전부 해석하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풀어주는 식.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하자) 그러면 시의 매력은 반감되어버린다. 시 암기는 시를 즐기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학교에서 좋아할 만한 시를 많이 소개하고 외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 있다. 단어의 뜻을 해석하고 의미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독자는 단 한명이라도 좋아하는 시인을 만들면 거기서부터 세계가 넓어져간다. 연애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산문에는 픽션과 논픽션이 있다. 시에도 있나.

=나의 경우는 거의 픽션이다. 내가 아기가 됐다가 여자가 됐다가 하는 것은 특히나 그렇다.

-63년간 시를 써왔다. 지금부터 이런 건 꼭 쓰고 싶다는 게 있나.

=없다. 시는 계획을 세우고 써본 적이 없다. 생각해본 적 없던 단어가 나에게 오는 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시를 쓰기 위한 마음이다.

<사과에 대한 고집>

<사과에 대한 고집>은 한국 독자들을 위해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표시와 산문을 엮은 책이다. 신경림 시인은 이 책을 추천하며 “순진무구한 생각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깊은 시가 있고, 말의 재미에 흠뻑 빠진 시가 있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도 있다”고 설명한다. 산문 중에는 그가 자주 받는 질문들에 대한 답과 삶과 죽음에 대한 해학 넘치는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있다. 노인이 되어 혼자 사는 일상에 대한 글(“일반적인 노인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지만 사람들은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시인은 안개를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지.”-<혼자 살기> 문고판 후기),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젊은 날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것들을 아들 방에 와 편지로 쓰던 나날에 대한 소회(“결혼 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배신당한 일이 몇번 있었던 것 같은데, 노망 든 후에도 그 기억이 어머니를 괴롭혔다.”-노망든 어머니의 편지)를 엿볼 수 있다. 표제작인 시 <사과에 대한 고집>은 사물을 바라보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조금은 장난기어린 시선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세잔이 그린 사과를 문장으로 풀어낸다면 이런 인상이 아닐까. “빨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색이 아니라 사과다. 동그라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양이 아니라 사과다. 신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맛이 아니라 사과다. 비싼 가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값이 아니라 사과다. 아름다움이라 말할 수는 없다. 미가 아니라 사과다. 분류할 수는 없다. 사물이 아니라, 사과니까.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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