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대수] 영원한, 최후의 히피
2015-05-20
글 : 송경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1집 발매 40주년 헌정 기념 앨범 낸 한대수

한국 포크록의 대부, 1990년대 인디밴드의 아버지,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영원히 자유로운 히피. 한대수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그러나 ‘한대수는 그저 한대수’라는 표현이 이만큼 어울리는 이도 찾기 힘들 것이다. 한대수는 유일하다. 다들 외국곡을 번안해서 부르던 1968년, 스무살의 청년이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고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음색과 스타일로 경색된 한국 대중음악에 충격을 선사했다. 1974년 한국 포크록의 첫 음반으로 알려진 데뷔 1집을 발표한 지 어느덧 40년, 그를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후배들에 의해 올해 4월 헌정 음반이 발표됐다. CBS 라디오 기획으로 시작되어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마련한, 진정한 의미의 헌정 음악이다. 전인권, 강산에, 윤도현, 이상은, 호란 등 후배가수들이 원곡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담아 재해석한 10곡은 근 몇년간 나온 어떤 포크 앨범보다 깊이가 있고, 한대수가 직접 부른 2곡의 신곡에도 여전한 싱그러움이 묻어 있다. 40년이 지났어도 아니, 40년 내내 그는 청춘이고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4월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북하우스 펴냄)이라는 책을 펴냈고, 4월25•26일에 서울 LG아트센터에서 <한대수 콘서트 Reverse/Rebirth>도 성황리에 마쳤다. 곧 공개될 독립영화 <유공자>에도 출연한다.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를 서울 신촌의 단골 커피숍에서 만났다. 포크록의 전설을 듣고자 찾아간 자리에서 인터뷰 후 딸의 어린이날 선물을 사러갈 생각에 함박웃음을 짓는, 인간 한대수를 만나고 왔다.

-1집 발매 40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음반이 나왔다. 40주년이라니 감히 짐작도 안 간다.

=음반 발매는 40주년이지만 음악은 1968년부터 시작했으니 데뷔로 치면 46년쯤 된다. 음반이 조금 늦게 나왔는데 내 음악이 당시 분위기에 비춰보면 워낙 이색적이라, 나보다 늦게 데뷔한 김민기가 앨범은 오히려 빨랐다. (웃음) 음반사에서 망설이는 통에 3년4개월 군대를 다녀온 후 1974년에야 음반이 나왔다. 하긴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분위기에서 그런 음악들로 앨범을 만든 건 기적 같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헌정 앨범도 기적이라 말하고 싶다. 음원 시장이 말라붙은 이 어려운 시기에 나 같은 할배 가수가 음반을 녹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그때도, 지금도 기적이다.

-제작방식이 범상치 않다. 음반 제작사에 의한 게 아니라 CBS 방송국의 이벤트로 출발해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모으고 후배가수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됐다. 진정한 의미의 헌정 앨범이라 할 만하다.

=손무현 프로듀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집 《무한대》 때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던 인연으로 이번에 적극적으로 나서줬다. 어떤 경제적인 이권이 걸린 것도 아닌데 선뜻 참여해준 동료가수들에게도 감사하다. 더 뿌듯한 건 그저 내 헌정 앨범이라서가 아니라 앨범의 완성도가 근 10년 사이에 견줄 앨범이 없을 만큼 좋기 때문이다. 강산에, 전인권, 조영남 등 참여가수 모두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불러줬다. 그냥 음악이 죽인다.

-여러 리메이크 중에서 좀더 인상적인 곡을 꼽자면.

=글쎄. 강산에의 <옥의 슬픔>은 기타 없이 피아노 솔로로 받쳐 감정을 잘 살렸다. 쓸쓸하고 아름다운 게 옥의 슬픔을 자신의 슬픈으로 승화시킨 것 같다. 선곡된 노래는 다들 자기들이 부르고 싶은 걸 고른 건데 전인권은 두번 생각하지도 않고 <자유의 길>을 골랐다. 고등학생 때 듣고 울었던 노래라고 하더라. ‘길가에 피어나는 꽃에 나는 웃었다’라는 가사가 딱 들국화를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4명의 기타리스트가 참여한 <Run baby run>도 환상이다. 이현도가 댄스 일렉트로닉으로 해석한 <물 좀 주소>도 참신하고. 아, 모르겠다. 다 좋다. (웃음)

-직접 부른 두 신곡 <I surrender>와 <My love>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준다면.

=헌정 음반이지만 신곡을 한 두곡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을 때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그게 그렇게 날짜에 맞춰 뚝딱 나오나. 노래를 만들자면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감동받기가 힘들다. 그래서 예전 노트를 뒤지다보니 젊은 시절 나를 좋아해주던 음악다방 DJ에 대한 마음을 담아놓은 게 있더라. ‘내 사랑은 꿈같이 내 옷 빨아주지요’라는 가사가 부끄럽고 유치해 당시에는 녹음을 안 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이제 이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다. (웃음) <I surrender>는 우리 세태에 대해 한마디 남긴 곡이다. 최근 세계적인 흐름은 갈등의 극단에 서 있다.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행동들이 반복되면서 이성을 잃은 것 같다. 간디도 말했다. “눈에는 눈으로 복수를 하다보면 전세계가 장님이 된다”고.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고 경쟁하면 우리 모두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솔직히 나는 선생님 세대가 아니다. 하지만 1집 앨범이 던진 충격은 익히 안다. 1990년대 인디밴드들이 한대수를 모델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때 이 땅을 떠나 80년대의 공백이 있던 가수가 90년대 한국 음악의 출발점이 됐다. 신기하다.

=1997년 일본 후쿠오카 공연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음악을 계속할 기회를 얻었다. 문화와 경제는 부부관계다. 60년대에는 내 음악이 파격을 선사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 간다는 건 우주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면 돌아오지 못할 곳. 그곳에서 이상한 놈이 하나 와서 폭탄을 떨어트리고 떠난 거다. 반면 90년대에 경제사정이 나아지고 문화적으로 색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고 그제야 내 작업들이 소화되고 이해된 것 같다. 문화적인 욕구가 폭발하는 시기, 무전여행도 다니면서 세계에 대한 이해도 넓어진 시기였기에 당시 60년대 히피문화를 한국적으로 녹여낸 내 작업도 낯설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한다. 90년대 인디밴드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낯선 걸 우리 것으로 소화하려는 갈망과 움직임이 있었다.

-앨범과 더불어 가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도 출판했다. 전 방위로 활동 중인데.

=사실 앨범은 앨범대로, 책은 책대로, 공연도 공연대로 따로 기획된 프로젝트들인데 우연찮게 시기가 겹쳤다. 기획된 건 아니지만 서로 시너지 효과를 받는 것 같아서 좋다. 물론 이걸 이용해서 인지도를 넓히거나 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책은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로서 기록을 남기는 게 어떻겠냐고 가사집을 한번 내보라는 싱어송라이터협회의 권유로 시작했다. 하다 보니 가사집은 좀 심심하고 가사가 어떤 심정과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 사연도 함께 적는 게 좋을 것 같더라. 무엇에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이 어떻게 가사로 바뀌는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고 싶었다. 사진 활동도 했으니 사진도 넣고, 기타를 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악보도 넣고. 그러다 보니 가사, 설명, 사진, 악보가 다 들어가 있는 음악교재처럼 나왔다. (웃음) 나름 품위 있게 잘 나온 듯해 고맙다.

4월25·26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한대수 트리뷰트 콘서트 Reverse/Rebirth>가 열렸다. 을 공연 중인 신대철, 김도균, 한대수, 김목경, 손무현(왼쪽부터), photographer 조상호.

-언제나 신념처럼 ‘평화’를 말한다. ‘영원한 히피’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그 말 좋아한다. 좀더 덧붙이자면 ‘영원한, 최후의 히피’라고 해달라. (웃음) 50, 60년대에도 돈이 최고였지만 그래도 그땐 인간의 존엄성, 인격에 대한 존중, 창의성에 대한 갈망 같은 게 있었다. 이제는 물질만능문화가 장악한 숫자의 시대다. 다들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획을 세워야 안심하고, 창의성보다 연봉이 중요한, 틀에 갇힌 삶으로 기꺼이 걸어들어간다. 돈이 군림하는 시대에 사는 목적에 대해 상기시키고 싶다. 평화, 창의성, 이해와 협동 등 분쟁과 갈등을 멈출 수 있는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리마인드시키고 싶다. 그래서 최후의 히피라 불리면, 자랑스럽다.

-영화와도 인연이 있다. 2001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한대수>를 재밌게 봤다.

=일본 공연을 끝내고 서울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을 즈음 스무살 남짓의 젊은 감독들(장지욱, 이천우 감독-편집자)이 찾아와 나를 찍고 싶다고 했다. 완전히 내 음악에 미쳐 있는 그들을 보고, 그럼 따라다니면서 내키는 대로 한번 찍어보라고 했다. 솔직히 학생 홈비디오 정도겠거니 생각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하고 초청도 받아서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서칭 포 슈가맨>(2012)을 재밌게 봤는데 이 다큐멘터리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찍을수록 빠져들더라. 나중에 DVD가 나와서 꽤 팔리기도 했다고 들었다.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인가.

=좋아하냐고? 감히 단언컨대 영화광이다. 로큰롤을 제대로 하고 싶다면 문화 전반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 하나만 파고들면 도리어 깊이가 없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본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는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로큰롤이 세상을 바꿔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에도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위대한 감독들의 면면을 떠올려보라. 나는 오시마 나기사를 사랑한다. <홍등>(1991)을 보고 장이모에 반했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아름다움을 기억한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최근엔 리들리 스콧까지, 그 시절의 영화들엔 철학과 품격이 있다.

-요즘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나.

=슬프지만 요즘 영화들은 지나치게 테크닉에 의존하는 것 같다. 스탠리 큐브릭의 위대한 순간들은 최첨단 기계로 재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위대한 감독들은 철학자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요즘 영화계엔 솔직히 불만이다. 지금 시대의 감독들은 과거보다 더 위대해질 수 있다. 이제는 음악마저 눈으로 봐야 하는 영상시대에 접어든 만큼 감독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그만큼 깊이와 철학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냉정히 말해 다들 그렇게 공부를 하진 않는 것 같다. 요즘 한국영화들은 지나치게 잔혹한 장면 묘사에만 매달리고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 기본으로 돌아가 인문학적인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리고 좋은 문화는 길을 잃은 젊은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아픔을 달래주고 희망을 심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이라면 그 영향력만큼 사회적 책임도 있다. 진지한 영화와 달달한 영화 사이 밸런스가 중요한데 요즘은 솜사탕 같거나 자극적인 영화뿐이다. 아쉽고 안타깝다.

-<모노폴리>(2006)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최근엔 박상훈 감독이 연출한 독립영화 <유공자>에도 출연했다고 들었다. 주변에서 요청이 오면 거절하지 않는 편인가.

=나를 찾아주면 거의 다 받아주는 편이다. 빨리 세상을 떠나는 록스타들을 보면서 요즘에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내게 지구를 걸어다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할 수도 있다. 반대로 누군가가 당신을 이용하는 이유는 당신이 그만큼 이용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내가 아직 가치 있는 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 주로 인디쪽에서 무상으로 도와달라고 하는데 나야 뭐 워낙 돈이랑 인연도 없고 지금 먹고살 만한데 무슨 걱정인가. (웃음) 돈, 있으면 물론 좋다. 하지만 짧은 인생사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나. 세계평화도 내 한 걸음부터다.

-이후로도 한대수의 음악을 기다릴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긴다면.

=여러분, 뭐든 나오면 고민하지 말고 일단 사서 들으세요. (웃음) 우리는 시간을 기다리지만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아요. 존 레넌 형님이 떠나간 후 남겨진 최후의 히피가 전합니다. 러브 & 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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