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보고]
[현지보고] 제68회 칸국제영화제 개막
2015-05-20
글·사진 : 김성훈
취재지원 : 최현정 (파리 통신원)
피에르 레스퀴르 새 집행위원장의 영화제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금빛 칸 백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68회 칸국제영화제가 5월13일 개막했다. 메인 상영관인 팔레 드 페스티벌 지붕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잉그리드 버그먼 포스터를 걸어놓은 올해 영화제는 새 시대를 열었다. 질 자코브 전임 집행위원장이 은퇴하고, 피에르 레스퀴르 새 집행위원장이 합류해 티에리 프레모 예술감독과 함께 투톱 체제를 이뤘다. <카이에 뒤 시네마> 장 미셸 프로동 전 편집장은 “피에르 레스퀴르는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이었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측근이라 정치적인 수완이 좋다. 그의 프로페셔널하고 정치적인 관계가 영화제에 큰 힘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누벨 옵제바퇴르>는 “올해 라인업 발표 장면은 눈에 띄게 달랐다. 질 자코브가 사용했던, 소르본대학의 강의실 탁자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딱딱한 가구를 치우고, 영화제 로고를 새롭게 입힌 새 책상에 앉아 경쟁부문 라인업을 발표하는 레스퀴르와 프레모는 TV 속 우스꽝스러운 인형 같았다”며 “어쨌거나 경쟁부문 19편 중 9편이 처음 선정된 감독들의 작품이다. 이것은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자 하는 쇄신과 노력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새로운 출발을 염두에 둔 까닭일까. 올해 경쟁부문 라인업은 그 어느 때보다 고심의 흔적이 엿보이는 동시에 선정 결과를 둘러싼 말들이 많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영화의 초강세와 아시아영화의 약진이다. 유럽과 영미권이 적절하게 양분해오다가 지난해부터 무게중심이 유럽쪽으로 살짝 기운 경쟁부문은 올해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경쟁부문 총 19편(미셸 프랑코의 <크로닉>과 귀욤 니클로스의 <더 밸리 오브 러브>가 뒤늦게 추가됐다.-편집자) 중 무려 5작품(<디판> <시장의 규칙> <마그리트 & 줄리앙> <나의 왕> 등)이 프랑스영화다.

<더 랍스터>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누벨 옵제바퇴르>는 “프랑스 영화의 새바람이 불었다. 지속적으로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아르노 데스플레생 대신 발레리 도난젤리와 스테판 브리제, 마이웬 르 베스코 같은 신선한 얼굴이 들어간 것도 인상적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장 미셸 프로동과 <텔레라마>는 “칸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제가 되려면 왜 다양한 나라에서 온 훌륭한 영화들을 소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영화제 심사위원들과 프랑스 영화산업이 너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영화제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티에리 프레모는 <텔레라마>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제는 절대로 작품을 국적으로 분류해서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영화가 많긴 한데, 경쟁부문에 이탈리아영화 역시 세편이나 있다. 과거 미국영화가 5편이나 포진한 사례도 있어 큰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티에리 프레모의 말처럼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초청받은 나라는 이탈리아다. 매년 이탈리아영화 지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도 칸은 난니 모레티의 <내 어머니>, 파올로 소렌티노의 <유스>, 마테오 가로네의 <테일 오브 테일즈> 등 세편을 선택했다. 이밖에도 2009년 <송곳니>로 주목할 만한 부문 대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더 랍스터>를 들고, 2011년 <오슬로, 8월31일>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노르웨이의 요아킴 트리에는 <라우더 댄 밤즈>를 가지고 다시 칸을 찾았다.

<섭은낭>

아시아 거장들도 칸을 찾았다. 지난해 칸에서 상영될 거라는 소문만 무성했다가 불발됐던 허우샤오시엔의 첫 무협영화 <섭은낭>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낼 예정이다. 장편 연출은 2007년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상영됐던 전작 <빨간풍선> 이후 8년 만이며, 감독의 2005년작 <쓰리타임즈>의 두 주인공이었던 서기와 장첸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매 작품 꾸준하게 이름을 올린 중국의 지아장커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각각 <산허구런>과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공개할 예정이다. 한국영화는 <무뢰한>과 <마돈나> 두편이 주목할 만한 시선에, <차이나타운>은 비평가주간에, <오피스>가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받았다.

차고 넘치는 유럽영화와 달리 영미권 영화는 단 두편이다. 토드 헤인즈가 <밀드레드 피어스>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캐롤>과 2003년 <엘리펀트>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구스 반 산트의 신작 <씨 오브 트리스>가 그것이다. 모두 미국 감독 작품인데, 고작 두편이라고 해서 칸에서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더 랍스터>에 콜린 파렐, 레이첼 바이스, 벤 위쇼가, <라우더 댄 밤즈>에 가브리엘 번과 제시 아이젠버그가 출연한 것을 보면 할리우드가 유럽예술영화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영국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칸 경쟁부문에 선정될 거라고 기대를 모았던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선셋 송>과 벤 웨틀리 감독의 <하이-라이즈> 모두 후반작업을 끝내지 못해 불발됐다”고 아쉬워했다. 티에리 프레모 역시 “칸은 준비된 영화만 선정한다”면서 앞의 두편을 제외한 이유를 설명했다.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는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파올로 소렌티노의 <유스>, 토드 헤인즈의 <캐롤> 등 4편이 영국 제작사 필름9으로부터 투자받은 작품”이라며 어떻게 해서든 칸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디판>

“나는 이 업계에 성차별이 내재한다고 본다. 칸영화제 출품작 1800여편 중 여성감독의 작품은 오직 7%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성적인 관점을 좀더 알아야 한다.” 지난해 심사위원장이었던 제인 캠피온의 충고를 귀담아들으려는 의도일까. 올해 각 부문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여성감독들의 작품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에마뉘엘 베르코가 연출한 개막작 <라 테트 오트>는 1987년 이후 첫 여성감독 개막작이다. 경쟁부문에는 발레리 돈젤리, 마이웬 르 베스코 등 2명의 여성감독들이 포진해 있다. 주목할 만한 시선 개막작으로 선정된 가와세 나오미 역시 여성이다. 경쟁부문을 제외한 주요 부문 심사위원장 역시 여성들의 차지다. 주목할 만한 시선의 이자벨라 로셀리니, 황금카메라상의 사빈 아제마, 비평가 주간의 로니 엘카베츠, 퀴어 종려상의 데지레 아크하반이 그들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시상식에서 여성감독의 수상 가능성이 좀더 높아지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점쳐볼 만하다.

올해 작품 경향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원작이 있는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다. 마테오 가로네의 <테일 오브 테일즈>는 17세기 잠 바티스타바실레의 동화모음집이 원작이며,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프라이스 오브 솔트>를 각색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키미의 동명 만화를 각색했고 저스틴 커젤 감독의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정치, 사회적 소재가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이 다소 줄었다. 5월12일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스리랑카 타밀 반군 출신 경비원의 사연을 다룬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과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대인의 시체를 태우는 유대인을 그린 라즐로 네메즈의 <사울의 아들> 정도만 있다. 특히, <텔레라마>는 “벨라 타르의 조감독 출신인 라즐로 네메즈가 논쟁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영화에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심사위원단 사이에서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고 밝혔다.

<라 테트 오트>

개막작 <라 테트 오트> 리뷰

<문라이즈 킹덤>(2012), <위대한 개츠비>(2013),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2014) 등 최근 칸영화제 개막작에 비하면 화려한 영화는 아니다. 화려함보다 내실과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였다면 올해 칸의 선택은 현명했다. <라 테트 오트>의 주인공 말로니(로드 파라돗)는 소년 법원을 들락날락거리는 청소년이다. 6살 때 엄마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공격적인 성향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회의 문턱은 높지만, 소년 법원 판사(카트린 드뇌브)는 말로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그를 처벌하는 대신 기회를 준다. 엄격한 교육센터로 보내진 말로니는 그곳에서 또래 여자아이 테스와 사랑에 빠진다.

<라 테트 오트>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삐뚤어진 청소년의 반항을 그렸다는 점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연작을 떠올리게 한다. 말로니를 맡은 로드 파라돗은 히스테리컬하고, 불안한 심리를 가진 청소년을 실감나게 연기해 얄미우면서도 마음이 간다. 에마뉘엘 베르코 감독은 말로니뿐만 아니라 그를 도우려는 주변인들까지도 애정을 듬뿍 담아 묘사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말로니를 지켜보는 판사를 연기한 카트린 드뇌브는 명성에 비하면 아주 작은 역할이지만, 극의 무게중심을 잘 잡아준다.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극에 무리 없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드라마다.

피에르 레스퀴르

새 집행위원장 피에르 레스퀴르는 누구?

언론인이자 전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 피에르 레스퀴르는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라디오 <RTL>, <RMC>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1972년 텔레비전 방송국 <ORTF>로 옮겨 뉴스를 진행했다. 기자로서 그가 칸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77년이었다. 당시 그는 채널 <Europe1>에서 장 클로드 브리아리, 에디 미첵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화를 본 뒤 중요한 게스트를 초대해 얘기를 나누는 방송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영화를 봤다”는 게 그의 회상.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 시절이던 1996년쯤, 그는 질 자코브로부터 “카날플뤼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칸영화제와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다. 당시 카날플뤼스는 칸영화제를 보도하고 있었지만 마켓에 관여하진 않았다. “그래서 질 자코브도, 나도 처음에는 겁을 냈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 영화제의 균형을 파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날플뤼스와 칸의 관계는 빨리 자리를 잡았다. 카날플뤼스는 영화제 작품들을 TV에 방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영화들은 성공적으로 브라운관에 방영됐다.”

피에르 레스퀴르는 2014년 1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최근 영화잡지 <프리미어>가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레스퀴르는 “집행위원장으로서 임무를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신중했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아직 영화제를 치른 경험이 없다. 그래서 할 말도 없다. 올해 영화제가 끝나야 재미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안다. “칸이 경제적으로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이다. 질 자코브가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젊은 시절 영화평론가였던 질 자코브와 저널리스트였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여러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누가 어떻게 만났고, 여러 재능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하길 좋아한다. 문학, 음악, 연극도 좋아한다. 어쨌거나 내 이야기는 영화제가 개막하는 5월13일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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