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하시모토 아이] <리틀 포레스트> 시리즈
2015-05-19
글 : 김보연 (객원기자)
하시모토 아이
<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

올해 만 19살의 하시모토 아이는 이미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하시모토 아이를 검색해보면 영화, 드라마, 광고 등에서 그리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숙한 소녀의 이미지. 사진들 속의 하시모토 아이는 대부분 무표정으로 (또는 미소만 살짝 지은 채) 어딘가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는데, 그 알 수 없는 표정은 사색적인 분위기마저 전달한다. 그녀의 개인 블로그에서는 장난기 넘치는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건 미디어가 지금까지 하시모토 아이에게 바라왔던 이미지는 아니다. 그렇게 그녀는 차분하고 속 깊은 소녀의 모습으로, 어딘지 신비롭기까지 한 분위기를 띤 채 우리 앞에 있다. 여기엔 그녀의 생김새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위로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에 더해, 이 인상을 좀더 예리하게 만들어주는 얇은 쌍꺼풀. 또한 그녀의 미세하게 굽은 콧등은 날카로운 개성을 심어주는 동시에 전형적인 미인의 이미지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한다. 마지막으로 강인한 인상을 더하는 각진 턱과 왼쪽 입술 밑의 작은 점까지 더하면 하시모토 아이의 얼굴은 또래 배우 중에서도 독보적인 분위기를 발한다.

이런 그녀를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는 ‘성숙’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실제보다 좀더 나이든 것처럼 보인다. 이미 16살에, 어느 인터뷰에서 “스무살 친구와 함께 있어도 내가 더 나이 들어 보인다”며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고민처럼 털어놓은 적이 있을 정도다. 물론 이는 신체의 노화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녀가 갖고 있는, 또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분위기의 문제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발산하지 않고 특유의 무표정을 통해 드러낼 때 만들어지는 분위기 말이다. 약간의 오해를 감수하면 이를 그냥 ‘어른다운’ 분위기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하시모토 아이의 첫인상이다.

그녀의 초기 경력은 자연스럽게 이 첫인상에서부터 출발했다(그녀의 최초 미디어 데뷔는 세살 무렵에 출연했던 <울트라맨> 시리즈이지만 그건 제외하자). 2008년, 화보 모델로 처음 연예계에 발을 내딛은 그녀는 2009년에 출연한 <기브 앤 고>(감독 모리 히데토)를 통해 정식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그녀가 맡은 역할은 흥미롭게도 청각장애를 가진 농구부 소녀였다. 말없이 표정으로만 대부분의 의미를 전달한 이 영화에서 그녀의 모든 연기가 자연스러웠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앙다문 입술과 신경질적인 눈빛, 그리고 혼자 농구를 연습할 때 드러낸 외롭고 지친 표정은 이때부터 거의 ‘하시모토 아이’의 완성형에 가까웠다. 아직 키도 다 자라지 않은 나이에 어른의 표정과 눈빛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런 그녀의 성숙한 분위기가 십대 중반의 몸과 만나 만들어지는 위태로운 불협화음은 일찌감치 그녀의 연기에 고유한 색깔을 입혔다.

이 영화로 인상적인 데뷔를 마친 하시모토 아이는 이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으며 성실하게 자신의 연기를 펼쳐갔다. <고백>(감독 나카시마 데쓰야, 2010)에서는 이면에 깊은 어둠을 숨긴 모범생 반장 역을 맡았고, <관제탑>(감독 미키 다카히로, 2011)에서는 음악을 좋아하는 전학생을 연기하며 밝은 모습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다음에는 그녀가 가진 이미지 중 하나를 게으르게 가져다 쓴 <어나더>(감독 후루사와 다케시, 2011)와 <사다코 3D: 죽음의 동영상>(감독 하나부사 쓰토무, 2012)을 통해 공포-스릴러 장르에 도전했지만 그 결과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 당시를 떠올리며 하시모토 아이는 “(연기를) 언제 그만두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직접 원해서 들어간 세계가 아닐”뿐더러 “자신의 연기에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2년에 개봉한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감독 요시다 다이하치)는 그녀의 생각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녀는 함께 연기한 또래 동료들의 진지한 자세를 보고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굳이 의식적으로 이미지를 바꾸려 하지 않은 채 예의 속 깊고 현명한 여고생을 연기한 그녀는 ‘<키네마준보> 베스트10’과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신인여우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그 후 그녀는 “여전히 (연기에 대해) 불안하기 때문에 단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할 계획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본격적으로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며 연기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본래의 성숙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되 감정의 진폭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으로 드라마 주연을 맡은 <하드 너트!>(2013)에서는 빈틈 많은 웃음을 짓고 다니는 수학 천재를 연기했고, <갈증>(감독 나카시마 데쓰야, 2014)에서는 거칠고 반항기 넘치는 소녀 역을 맡아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기생수>(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2014)의 배려심 넘치는 사랑스러운 여고생 사토미를 연기하며 드라마의 주요 감정선 중 하나를 묵묵하게 책임졌다. 이러한 최근 출연작 목록은 그녀가 더이상 자신의 대표적 이미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최신작인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감독 모리 준이치)에 이르면 그녀가 더이상 ‘주목해야 할 신인’이나 ‘십대 배우’의 범주를 넘어선 한명의 독립적인 배우로서 자신의 몫을 책임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영화에서 4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혼자 책임지는 하시모토 아이는 조용한 일상 속에 숨은 기쁨과 슬픔, 무기력과 희망, 외로움과 그리움의 감정을 세밀하게 조율해낸다. 이때 ‘하얀 피부의 농사꾼’이라는 언뜻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서도 그녀가 연기한 이치코의 복잡한 감정만큼은 오롯이 구체적인 사실감을 획득한다. 하시모토 아이는 그렇게 성숙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점점 발전하는 연기를 선보인다.

물론 연기의 기술적 측면에서 그녀가 아직 특별히 뛰어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특히 ‘훌륭한 연기’의 기준으로 쉽게 여겨지는 감정을 터트리는 장면에서 그녀는 어색한 모습을 종종 보여주곤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모든 배우가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목에 핏대를 세워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는 것도 피곤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무표정만으로도 관객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 하시모토 아이의 연기를 좀더 지켜보는 건 어떨까. 그녀는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성실히 여러 배역을 하나씩 소화하고 있다. 게다가 우린 아직 이십대의 그녀가 어떤 연기를 펼칠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가 더 많은 경험들을 쌓은 뒤 그 누구도 쉽게 짐작하기 힘든 내면을 연기할 때 하시모토 아이는 또 한번 자신의 껍질을 벗을 것이다.

<사다코 3D: 죽음의 동영상>

Magic hour

사다코의 정신

<사다코 3D: 죽음의 동영상>은 굳이 일부러 찾아볼 가치가 없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거론하는 유일한 이유는 하시모토 아이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기존 사다코의 이미지마저 처참히 망가뜨리는 이 헛웃음 나오는 영화에서 하시모토 아이는 과감하게 인간이 아닌 존재인 사다코를 연기했다. 물론 귀뚜라미 같은 모습의 CG 버전 사다코가 아니라 그녀의 ‘정신’을 연기한 것인데,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하시모토 아이는 등장과 동시에 출연자 중 가장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다. 죽어서도 잊지 못한 원한을 간직한 여인을 연기하기에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날카로운 눈매는 말 그대로 최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그녀가 제대로 된 공포영화에 다시 귀신으로 출연하는 날, 우리는 가장 무섭고 사연 있는 귀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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