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다녔던 회사는 사옥을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수십장의 통유리가 빛나는 사옥, 그래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던 지옥의 사옥. 하지만 그 건물엔 그것 말고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으니, 화장실 세면대가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1970년대에 태어난 한국 여성의 평균 신장 160㎝를 자랑하는 데다 다리가 매우 짧은 나도 그걸 쓰다 보니 허리가 아팠다. 유명한 외국 건축가씨, 동양 여성의 키를 너무 낮잡아 봤어. 하지만 진짜 이유는 외국이 아닌 한국에 있었다. “아, 그거? 사장님 키에 맞춘 거라 그래. 한번 써봤더니 너무 높더래.” “… 여긴 여자 화장실인데?” “사옥을 많이 사랑하시거든.” 그날 이후 나는 야근을 하다 화장실에 갈 때면 사옥과 사랑에 빠진 사장이 거의 바닥에 붙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다행히 사장은 웬만해선 사옥에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것은 암벽등반. 나는 평일에도 실내 암벽등반장에 처박혀있던 그의 모습을 입사 이후 다시 볼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사장은 등산을 좋아한다 했던가. 내가 다닌 직장들만큼이나 많았던 사장들한테 끌려가 산을 탈 때마다 그토록 지겨웠던 등산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세상 모든 사장은 산으로 가니까 이 땅에 산은 많을수록 좋겠다.
그렇다면 사장들은 왜 그토록 산을 좋아하는 것일까. 사장이 직접 쓴 책 <사장의 본심>에 따르면 등산은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주기에 사장은 그 리더가 되어 하나된 무리를 이끈다는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등산은 정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주는가, 그럴 리가 없다. 한국의 산들에는(특히 북한산!) 골짜기마다 주말을 강탈당하고는 이를 갈았던 사원들의 원한이 메아리치고 있을걸.
그건 프로 등산가들도 마찬가지다. 해발 8000m가 넘는 K2를 정복하겠다며 나선 영화 <버티칼 리미트>(2000)를 보자. 아무 대가 없는 모험에 목숨을 건 산악인들의 아무 대가 없는 우정이 꽃피기는커녕 너 죽고 나 살자는 악다구니가 설원을 물들이고, 제발로 올라간 생면부지 등반대를 내가 왜 구하러 가느냐며, 누가 올라가라고 했느냐며, 몸 사리는 산악인들의 하소연이 베이스캠프를 뒤흔든다. 그러니 모두가 하나 되는 등산이란 허황된 꿈에 불과한 것. 주말에 북한산에 한번 가봐라, 산에 가면 영혼이 맑아지긴, 세상 진상은 몽땅 거기 모여 있을 거다.
너처럼 영혼이 혼탁한 사람은 저 높은 산의 맑은 정기를 호흡해야 한다는 회사 선배의 꾐과 북한산 정도는 산책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산에 가는 사람이 어찌 그리 많겠느냐는 또 다른 선배의 사기에 넘어가 북한산에 오른 적이 있다. 산책이라…. 술과 담배를 삼가며 알뜰하게 제 몸을 챙기는 한국 중년의 체력은 무섭고도 어마어마했다. 대충 사는 20대였던 나는 결국 중간에 낙오돼 자연을 벗삼아 경건하게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자꾸 캔맥주와 쥐포를 먹이처럼 흔들어대며 낚으려고 해서 무서웠다. (그래도 쥐포는 받아먹었다. 김밥을 선배들이 가져갔거든.)
이상하게 등산복은, 마치 예비군복처럼, 사람을 용감무쌍하고 후안무치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알프스 아이거 북벽에 도전하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거기서 내려오는 영화였던 <노스페이스>(2008)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남이 만든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모자라 얌전하게 안 가고 돌멩이 떨어뜨린다고 불평하는 진상들, 결국 앞서가던 사람들 발목을 잡고 말지. 에베레스트 등반의 추악한 이면을 파헤친 르포 <에베레스트의 진실>은 이렇게 말한다. “산의 높이가 9000m건 9m건 상관없이 일부 사람들은 등반 자체보다는 야만적인 힘과 무자비함이 연민과 예의와 페어플레이 정신을 지배하는 곳에서 노는 것에 더 큰 흥미를 느낀다.” 한마디로 산에선 깡패가 되기 쉽다.
제목에 ‘하이’가 들어가서 등산영화라고 착각했지만 알고 보니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2003) 짝퉁이었던 <하이레인>(2009)도 그렇다. 산 밑에선 멀쩡했던 젊은이들이 산위로 가니 눈빛 돌변, 치정 살인을 불사하는 무뢰한으로 변신 완료, <버티칼 리미트>처럼 너 죽고 나 살자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이런 살인은 이따금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도 한다. <에베레스트의 진실>에는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고의로, 혹은 실수로, 사람을 죽게 만든 산악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데, 그걸 읽으면 세상 살기가 싫어질 정도다. 산소가 없으면 죽는 해발 8000m에서 산소통 훔쳐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세상이 무서워서.
그리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절대 오르막길은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그래서인지 20년째 인생이 내리막길이다) 그런 내게도 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가 생기고야 말았다. 눈먼 등산복 하나가 굴러들어왔던 것이다. 햇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빛나는 반짝이 꽃분홍색 등산복, 나도 이제 어엿한 아줌마. 등산복으로 광채를 뿜어대며 비틀거리는 다리로 해발 193m에 달하는 파주 심학산 정상에 오르던 순간, 나는 생각했다, 산이 거기 있으면 그냥 흐뭇하게 바라보면 되지 왜 구태여 고생을 자처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인생 고달픈데. 이 번쩍이는 등산복은 한밤중 호수공원에서나 입을 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려오는 길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K2>(1991)를 봐도, <버티칼 리미트>를 봐도, <노스페이스>를 봐도, 산은 오르는 것만큼이나 내려오기도 힘들던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답은 간단했다. 193m만 올라갔으니 쉽게 내려왔지 1930m를 올라갔으면 내려오는 길도 천릿길이었을 거야.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숱한 등반가들이 하산하다가 사망한다. 너무 높이 올라가지 않았다면 내려오면서 함정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내려가기 싫어서, 내려갈 수가 없어서, 내리막이 오르막보다도 험해서, 오늘도 많은 이가 발을 헛디딘다.
등산복은 왜 원색인가요?
지상에서 고공으로 향하는 등산가들이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두세 가지 것들
돈
20년 전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최고급 등반대에 참여하는 비용은 6만5천달러였다.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꾸역꾸역 K2를 올라간 <버티칼 리미트>의 억만장자 본이 하산길에 크레바스에 갇혔을 때도 그의 회사 중역이 내민 카드는 수표. 엉덩이 무거운 산악인들이 한가하게 모닥불 쬐며 구하러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그는 일단 구조대에 참여만 하면 5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래 봤자 여섯명 모았지만, 그리고 그중 한명은 본을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며 칼을 갈고 있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장비
해발 193m의 심학산을 오르기 전까지는 나도 깨닫지 못했다, 어찌하여 한국의 중년은 1km 밖에서도 눈에 띄는 등산복을 애호하는지를. 입어보니 편해, 가벼워, 신축성 좋아, 바람 잘 통해, 다리 굵기가 80% 수준으로 떨어지는 착시효과까지. 어쨌든 장비는 중요하다. 1990년대 영화 <K2>를 보다가 1930년대가 배경인 <노스페이스>를 보면 후배들에 비해 노숙자 수준으로 초라한 장비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칙칙한 옷을 입은 1930년대 독일 등반대는 절벽에 묻혀 보이지도 않으니, 빨강과 초록 원색으로 차려입어 설원에서도 눈에 확 띄는 <K2>를 보면, 역시 등산복은 원색에 광택이 최고다.
선크림
<노스페이스>를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산에서 반생을 보낸 것 같은 얼굴의 이 남자들이 산악부대에서 갓 제대한 청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을 해가 뜨기 전에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이라고 하던데, 흐린 날에도 자외선의 70%는 구름을 통과하기 마련이니, 선크림을 바르자. 정상에 올라가면 사진도 찍을 거잖아. 그거 평생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