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Review] 써클
2002-03-12
시사실/써클

■ Story

테헤란 거리의 세 여자 나르게스(나르게스 마미자데)와 마에데, 어레주(마리암 파르빈 알마니)는 오늘 감옥에서 빠져나온 처지다. 마에데가 곧장 체포된 뒤 나르게스와 어레주는 나르게스의 고향 라질리크로 떠날 계획을 세우지만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꾼 어레주는 나르게스의 차비만 구해주고 테헤란에 남는다. 우여곡절 끝에 역시 버스에 오르지 못한 나르게스는 같은 날 출옥한 친구 파리(페레스테헤 사드르 오라파이)를 찾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빠에 의해 집에서 쫓겨난 파리는 처형당한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 출감 뒤 간호사가 된 친구 엘험을 찾아가 낙태를 부탁하지만 과거를 숨기고 결혼하려는 엘험은 도움을 거절한다. 다시 거리로 나온 파리는 가난 때문에 딸을 버리려는 여자 나예레와 마주친다. 딸을 버린 뒤 모르는 남자의 차에 올라탄 나예레는 매춘 단속에 걸렸다가 가까스로 도망치고 같은 장소에서 붙잡힌 매춘부 모즈간은 투옥된다. 그 감방에는 나르게스, 마에데, 어레주의 모습이 보인다.

■ Review “딸입니다.” 신탁을 기다리듯 초조하게 신생아의 성별을 묻는 산모 어머니의 귀에 답이 들려온다. <써클>은 이 간단명료한 한마디가 어째서 ‘악순환’의 첫번째 고리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90분의 설명이다. 손자를 고대한 사돈집의 분노를 근심하며 병원을 빠져나온 여인네는 길가에서 우왕좌왕하는 세 여자와 스친다. 임시 출감-혹은 탈옥-한 세 사람 중 마에데는 이내 다시 체포되고, 어레주는 세상 누구도 자기를 반겨주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에 무릎이 꺾인다. 간신히 버스터미널까지 간 나르게스는 학생증이나 동행이 없는 혼자 다니는 여자에게 표를 팔 수 없다는 규칙을 듣는다. 나르게스가 도움을 얻고자 찾아간 파리는 오빠들에게 매맞고 집에서 쫓겨난 다음 낙태할 방도를 찾아 헤맨다. 그런 파리가 찾아간 친구 엘험은 약혼자가 전과를 알까 두려워 차마 파리를 돕지 못한다.

<써클>은 절망을 바통처럼 넘겨받는 테헤란 여인들의 암울하고 슬픈 이어달리기다. 여인들의 굳은살 박인 발꿈치를 좇아 뒷골목을 헤매는 <써클>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전작 <하얀 풍선>과 마찬가지로 울적한 단조의 ‘도시 교향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써클>의 도시 테헤란은 어린이의 말간 눈망울과 색깔 고운 풍경이 어우러진 <하얀 풍선>의 그곳과 달리 주인공 여성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난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거리는 생활의 에너지로 약동하지만 여자들은 거기서 열외다. 파나히 감독은 그런 소외를 표현하는 데 극악무도한 남성 캐릭터가 굳이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감독은 남자들의 호의와 변덕에 매달려 건들거리는 여성의 불안한 운명을 보여준다. 선심을 써 차표를 팔거나 결혼을 해주면 천만다행이지만 매를 때려 내치면 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녀들이 기댈 곳은 자매애뿐이다. 감옥에서 만난 여자친구들은 헤어질 때마다 서로의 손을 쉽게 놓지 못하며, 4년 만에 출옥한 모니르는 아이들을 길러준 남편의 첩과 좋은 벗이 되어 정겹게 산다. 등장인물 각자의 암담한 에피소드를 미결로 내버려둔 채 자파르 파나히의 카메라는 펄쩍펄쩍 다른 여자의 어깨로 옮아간다. 그럼에도 <써클>은 단절이나 이물감을 주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써클>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담배를 피운다. 아니, 담배를 피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욕망은 줄곧 유예된다. 공공장소라서 불이 없어서 금연구역이라서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라는 이유로 온 세상이 합세한 듯 그녀들의 흡연을 금지한다(그중 한 여성은 담배를 씹어먹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 막바지에 감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모든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문 뒤에야 담배에 불을 댕긴 창녀 모즈간이 폐부로부터 끌어올린 한숨과 연기를 토할 때 관객은 덩달아 재갈이 풀린 듯한 잠깐의 해방감을 맛본다.

<써클>은 이란 스크린에 오르지 못한 채 이방을 유랑한 영화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한 여자가 두딸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영화를 구상했다. 그러나 감독은 <써클>을 통해 문제삼고 싶었던 것은 특정사회나 성(性)의 삶은 아니었다고 온건하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순환구조의 포로다. 우리의 투쟁은 그 순환고리의 지름을 조금이나마 늘리려는 싸움이다.” 2000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써클>은 일치된 시공 안에서 보편적인 모순을 다룸으로써 고전적인 형식미를 성취한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인’- 영화제 심사위원이 기꺼워할 만한- 영화다. 여성들을 창살 뒤에 닫혀지는 문 뒤에, 그리고 남자들의 등에 가려지게 배치하는 미장센이나 흡연에 대한 설정은 영화 전체를 하나의 추상적 은유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첫 장면에서 딸을 낳은 산모의 이름이 간수에게 호명되고, 분만실의 문에서 눈뜬 카메라가 감옥 문에서 눈꺼풀을 닫음으로써 <써클>은 고리를 닫는다. 제 꼬리를 문 뱀의 형상 같은 흉측한 순환의 고리를.

매춘부 모즈간이 들어간 감방을 카메라가 휘둘러보면 한쪽 구석에, 반나절 전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거리로 나섰던 세 여자가 보인다. 그러나 순간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는 것은 갇힌 여자들만이 아니다. 슬픔과 수치심으로 얼굴을 허물어뜨리고 차례차례 카메라 밖으로 황망히 사라져간 그녀들은, 파리와 나예레와 엘홈은 어디로 갔을까. 김혜리 vermeer@hani.co.kr

자파르 파나히 감독 인터뷰

“<하얀 풍선>의 아이들, 자라서도 순수할 수 있을까”

<써클>은 당신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강한 분노, 대담한 톤, 주제를 가진 영화다. 이란의 상황이나 개인적 상황에 변화가 있었나.

이번 영화에서 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거울>이나 <하얀 풍선>의 어린아이들이 자라서도 같은 종류의 순수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를 묻고 싶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사회는 그들을 일정한 순환의 고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궤도의 테두리를 벗어나려면 그들은 일정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분노한 것은 내가 아니다. 영화가 분노를 보여줄 뿐이다.

<써클>에 대한 이란 정부와 언론의 반응은.

이란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많지 않다. 본 사람들은 호의적이었지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특별한 근거도 들지 않고 반대했다. 이 영화를 찍기까지 2, 3년간 고통을 겪었다. 난산한 영화다. 이제 아기가 태어났으니 즐기고 싶을 뿐 다시 과거를 돌이키고 싶지는 않다.

인물을 하나씩 순서대로 뒤따르는 형식은, 사회에 만연된 닫힌 순환구조를 보여주려는 의도였나.

그렇다. 또한 <써클>은 그 순환을 깨고 탈주하려 애쓰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릴레이 경주와 같다. 그들 중 누군가 성공하면 모두가 탈출에 성공할 것이고 한 사람이 실패하면 모두가 실패하는 것이다.

극중에서 나르게스는 고흐의 풍경화를 가리키며 고향이 천국 같은 곳이라고 말하지만 어레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예술을 현실이 지향하는 이상으로 봤나.

영화에서 속속 등장하는 여자들은 점점 더 높은 수준의 경험과 삶을 보는 깊은 관점을 보여준다. 처음에 나오는 나르게스는 이상주의적이고 현실을 모른다. 나르게스는 그림 속 풍경을 그저 아름다운 장소라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좀더 경험이 있는 친구는 그 공간에도 나름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끝에 등장하는 모즈간이 완성된 인물인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캐릭터의 총합이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인물일 수 있다. 또는 아직도 ‘순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다른 캐릭터와 달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건 보는 시선에 달린 문제다.

(이상 인터뷰는 월드 소시알리스트 웹사이트 등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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