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브>(2003)의 백운학 감독이 돌아왔다. 그가 12년 만에 연출한 두 번째 장편 <악의 연대기>는 승진을 앞둔 시점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만 형사반장 최창식(손현주)의 심리적 궤적을 따라가는 영화다. 은폐하려던 사건을 누군가가 최창식 반장의 면전에 던져놓는다. 최창식 반장은 자신의 손으로 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경찰들은 살인사건의 진범을 찾아서, 최창식 반장은 자신을 수렁으로 몰아넣은 누군가를 찾아서 각기 수사망을 좁혀간다. 최창식 반장의 곁엔 그를 수족처럼 따르는 후배 오 형사(마동석), 차동재 형사(박서준)가 있고 그들 앞에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김진규(최다니엘)가 제 발로 나타난다. 12년 만의 연출이라 과욕 혹은 독기가 엿보이지 않을까 짐작했으나 오히려 백운학 감독은 여전히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연하의 배우를 존중하는 마음에 그를 형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고, 후배인 제작자에게 쓴소리를 들을 때조차 그 진심에 고마워할 줄 아는 미더운 영화인이었다.
-개봉 12일차인 어제(5월25일)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그게 제일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하는 영화라 나도, 우리 제작자 장원석 대표도, 투자팀도 다들 마음 졸였을 거다. 아주 시원하다.
-12년 만에 연출작을 내놓은 소감이 어떤가.
=내가 <튜브> 땐 참 철모르고 영화를 했구나 싶더라. 스탭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도 오랜만에 하는 연출이니 제작사나 CJ엔터테인먼트에서 터치를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시나리오 단계에서 일정 부분 합의를 하고 나니 별반 개입하는 게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쪽에 이래도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어떻게 달랐나.
=예전과 크게 다를 줄 알았다. 스탭들도 다들 젊은 친구들이라 의견차도 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프로덕션 시작 전에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려움을 느껴도 그냥 즐겨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이렇게 순탄하게 흘러가게 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스탭들이 전부 이 시나리오 안에서 자기 일을 즐기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어쩜 그렇게 다들 예뻐 보이던지. 내가 참 운이 터졌다. 소박하게 손익분기점만 넘기고 다음 영화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큼까지 와서 정말 마음이 편하고 다행스럽다.
-공백 기간 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나.
=마냥 논 건 아니었다. 싸이더스에서 준비하다 엎어지고, 모 대표님하고 또 하나 준비하다 엎어지고. 그렇게 네편쯤 엎어지니 마음도 조급해졌다. 어떤 때는 시나리오까지 다 썼는데 투자 결정 직전에 연출 공백이 너무 기니 이번 작품은 시나리오만 쓰는 걸로 하고 연출은 다음에 하자는 얘길 듣기도 했다. 투자사에서 나한테 직접 얘기하기가 뭣하니 제작사 대표 통해서 그 말을 전하는 걸 듣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하더라. 단적으로 말하면 시나리오는 괜찮은데 감독을 못 믿겠으니 빠지란 말이잖나. 그런 얘길 듣고 집으로 돌아온 날은…. 그렇게 일년이 가고 또 일년이 가면 이런 일이 더 많아질 텐데 어떡해야 하나, 그래서 더더욱 주류에서 영화하는 사람들이랑 어울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주연배우인 박서준의 데뷔가 오래지 않은 걸 생각하면 캐스팅 직후부터 촬영, 개봉까지는 무탈하게 진행된 모양이다.
=<악의 연대기> 들어가기 전엔 상암동 디렉터스존에 있었다. 거기 있는 감독들끼리 서로 시나리오 쓰면 돌려 읽고 그랬다. 그러던 중 불현듯 잘나가는 수사반장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을 자기가 수사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줄 정리해서 돌려 읽혀봤는데 반응이 괜찮기에 25장짜리 트리트먼트를 써서 영화진흥위원회 기획개발프로그램에 응모했다 당선됐다. 그걸로 두달간 초고를 써서 냈는데 그것도 당선이 됐다. 자신감을 얻고 장원석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앙대 선후배 사이인 장원석 대표와는 전부터 알고 지냈나.
=전혀 몰랐다. 주변에 요즘 제일 잘나가는 제작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두 사람을 알려줬는데 그중 한 사람이 장원석 대표였다. 바로 장원석 대표한테 전화해서 “제가 오래전 <튜브>라는 영화를 만든 백운학이란 사람입니다. 시나리오 드리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했다. 한 3초간 침묵하다 “운학이 형, 제가 학교 후배입니다”라는데 엄청 쪽팔린 거다. (웃음) “내가 나이가 있어 불편하겠지만 절대 불편하지 않게 할 테니 솔직하게 잘 봐줘” 하고는 시나리오를 줬다. 일주일 있다 다시 만났는데 아주 신랄하게 평가하더라. (웃음) 내 재기작으로 하기에 이런 이유에서 적절치 않다 하기에 “오케이 다른 거 써올게” 하고 한 3개월쯤 뒤 다른 걸 써서 줬다. 그것도 역시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 하기에 또 알겠다고 하고 세 번째로 가져간 게 <악의 연대기>였다. 장원석 대표는 타고난 감각의 비즈니스맨이다. 처음 알게 된 순간엔 정말 창피했는데 잘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현장에서 무엇보다 뚜렷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대본을 쓸 때부터 최 반장에게 동일시하고 썼다. 최 반장의 감정만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감정만큼은 끝까지 간 것 같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손현주 선배의 연기 덕분이다. 몸이 아닌 눈으로 얘기해달라고 했는데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편집할 때 그 연기를 들어내자니 아까워죽겠더라. 그만한 배우를 만난 것도 내 복인 것 같다. 최 반장이 자기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김진규의 정체를 추적해가는 신은 얼굴 부분만 카메라로 잡아서 천천히 찍었다. 궁금증, 놀라움, 분노, 당혹감까지 모든 게 그 눈에 다 있었다. 나는 원래 그 장면을 통으로 넣으려고 했다. 다음날 떼로 몰려와 만류해서 모니터와 얼굴을 교차편집해 넣었지만. (웃음)
-캐스팅 완료 후 손현주가 갑작스레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게 됐다. 한달쯤 촬영이 연기됐었다고.
=영화라는 게 혼자 아등바등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나. 되려면 되고, 안 되려면 안 된다. 캐스팅 마치고 신나게 촬영 준비 중이었는데 어느 날 손현주 선배가 오더니 손을 붙잡고 회의실로 데려갔다.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뭐가 있어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이 영화는 여기까지구나 싶었다. 받아들이자, 마음 끓이지 말자 했는데 선배가 ‘한달만 기다려라, 한달 뒤면 촬영할 수 있다’고 하시는 거다. 우리 나이엔 병원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 말이 되게 무겁게 온다.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게 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나 책임감이지 않았겠나.
-영화에는 처음 출연한 박서준에게서도 좋은 얼굴을 봤다.
=동재 역에 많은 배우를 검토했다. (박)서준이 첫인상이 일단 똑똑해 보였다. 서준이가 하기로 한 뒤 출연한 드라마를 다 봤다. 상대배우인 현주 선배가 워낙 공력이 대단한데 서준이가 거기 맞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촬영 시작 후에도 한동안은 서준이가 연기할 부분이 적었는데 한컷을 찍더라도 촬영장에서 내내 싫은 내색 없이 기다리더라. 늘 현장에 와서 현주 선배가 연기하는 걸 모니터하며 공부했다. 드라마에선 톱배우이고, 젊은 나이에 꽤 이름이 알려진 편인데도 굉장히 성실했다. 얜 뭘 해도 하겠구나 싶었다. 중요한 장면에서도 기대 이상으로 표현해줘서 고마웠다.
-형사 선후배로 출연하는 마동석과 박서준의 합이 좋다. 애드리브처럼 보이는 장면도 종종 있다.
=(마)동석 형을 만난 것도 내 복인 것 같다. 어느 날은 대본에 뭔가를 깨알같이 써왔더라. 동석 형이 아는 형사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대사를 더 입에 붙는 말로 고쳐온 거다. 배우의 노력이 정말 고마웠다. 애드리브도 많았다. 동료 형사 배우들과도 일주일에 세번 이상 술자리 갖고 가깝게 지내달라고 했는데 그 말대로 자기들끼리 서열 정하고, 매일 어울려다니면서 꼬박꼬박 인증숏을 보내왔다.
-왜 형이라고 부르나.
=나이는 내가 많긴 한데 그만한 배우에게 여러 사람 앞에서 ‘야자’ 하는 것도 거시기해서 그냥 형이라고 부른다. (웃음)
-재즈 블루스, <Miss Li의 I Can’t Get You Off My Mind>가 김진규 등장 장면, 주요 플래시백 장면에 메인 테마로 사용됐다. 가사도 잘 어울리지만 빠른 템포로 편집된 장면에 끈적한 정서를 불어넣는다.
=몽타주로 설명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 장면을 어떻게 뻔하지 않게 만들까를 생각했다. 황상준 음악감독이 어느 날 작업실에 놀러오라 하더라. 목소리를 들으면 뭔가 느낌이 있는데 그날 뭐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기 전에 음악을 편집해서 그 몽타주 신에 딱 얹어놓고 가자마자 틀어줬다. 듣자마자 이거 더이상 손대지 말고 그대로 가자고 했다. 나는 그 곡을 엔딩 신에도 넣자고 계속 주장했는데 그날도 역시 떼로 몰려와서는. (웃음) 사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는데 하도 강력하고 간곡하게 빼자고 말을 하기에 엔딩엔 다른 곡을 넣었다. 지금도 아쉽긴 하다.
-엔딩에 그 곡을 넣었다면 그 장면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됐을 것 같다.
=만류한 사람들도 똑같은 얘길 하더라. (웃음)
-대사가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역시 더 쳐냈어야 한다. 관객이 나보다 똑똑할 텐데. (웃음) 일종의 불안감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게 한계였던 것 같다. 대사가 구구절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마저도 난 많이 뺀 거지만.
-영화를 다 본 관객은 특정 인물의 리액션을 복기하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가령 그 인물이 최창식 반장을 대하는 태도나 몇몇 장면에서 그 인물의 표정은 뒤에 생각하면 몹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말한 대로다.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고 생각한다. 표정과 감정을 얼마나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이후의 반전효과를 떨어뜨릴까봐 배우와 수없이 얘기를 나눴다. 촬영도 여러 버전으로 했는데 편집본을 보고 엔딩 즈음 승부를 봐야겠다는 부담이 있었다. 영화의 전체 만듦새가 올라가려면 그 지점이 정확했어야 하는데…. 돌이켜보니 아쉽고 미진하다.
-퀴어 요소를 굳이 넣어야 했던 까닭은.
=다른 관계였다면 그만한 동기가 될까 싶었다. 약하다고 봤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이원기 교수’의 이름은 어디서 빌려왔나.
=현주 선배랑 나만 아는 거다. (웃음) 실제 우리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성함이다(손현주, 백운학 감독, 장원석 대표는 모두 중앙대학교 선후배 사이다.-편집자). 교수님이 영화는 보셨는지, 내가 존경한다는 걸 그분이 아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웃음)
-<튜브>에서 인경(배두나)은 “인생이 뭐 별건가. 달콤한 기억 하나 갖고 있으면 그만이지”라고 말한다. <악의 연대기>에서 김진규를 움직이게 하는 건 “사랑”이다. 수차례 부침을 겪고도 오랜 시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그런 낭만에서 오나보다.
=대체 얼마 만에 듣는 대사인지 모르겠다, 아이고. (웃음)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자고 하는 건 너무 쉬운 말인 것 같다. 현실이 영화보다 힘들고 드라마틱하지 않나. 다만 무엇이라 단정할 순 없어도 누구에게나 오늘을 살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있는 것 같다. 몇편 더 하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게 있지 않을까.
-차기작 계획은.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는 하고 있다. 그동안 써둔 것도 있고. 한달쯤 구체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중요한 건 영화와 관계된 모든 이들과 흔쾌한 합의가 되는 것이다. 주변에선 좀 쉬고 시작하라 하는데 난 충분히 오래 쉬었다. 다음엔 덜 씹히는 영화를 해야 할 텐데. (웃음)
-금방 또 만나게 되겠다.
=나도 그러길 바란다. VIP시사 끝나고 같이 술 마시면서 동석 형이 일년에 한편씩 영화하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웃음) 배우들도, 스탭들도, 투자팀도, 그 밖의 지인들도 모두가 내가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많이 걱정해주는 걸 알았다. 정말 기분이 좋다.
인터뷰 바로 전날 <악의 연대기>가 손익분기점(170만명)을 넘겼다. 다음날 만난 백운학 감독은 한짐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벼워 보였다. 12년 만에 연출한 영화가 행여 누군가에게 누가 될까, 손익분기점을 넘기 전까지 전전긍긍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는 시나리오의 미진한 부분을 짚을 때조차 입가에서 미소를 내려놓지 않았고, 오히려 꼼꼼하게 봐줘 고맙다며 품 넓은 답을 돌려줬다. 그러고는 모든 대답의 끝을 “아쉽다,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우리 역시도 그의 지난 공백이 아쉽고, 그의 귀환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