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샤를리즈 테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2015-06-09
글 : 윤혜지
샤를리즈 테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가장 핫한 리버럴 아이콘을 꼽으라면 단연 샤를리즈 테론이다. 테론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하 <분노의 도로>)와 관련해 페미니스트로서 적극 발언 중이다. 테론이 젠더 이슈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온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며 젠더 이슈에만 목소리를 보태온 것도 물론 아니다. “쉽사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렴.” 샤를리즈 테론의 어머니는 항상 그에게 당부했다. 아마도 그는 그 말을 깊이 새기고 살았을 것이다. 2007년 테론은 CTAOP(The Charlize Theron Africa Outreach Project)를 창설해 오스카 위너이자 유엔 친선대사라는 명예를 에이즈와 싸우는 아프리카의 청소년을 돕는 데 썼다. 폭력과 무관심에 갇힌 아동을 위해 기꺼이 광고에 출연했고, 동물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모피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성 소수자의 결혼권을 지지하며 “미국 땅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기 전까지 나 역시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현재 테론은 숀 펜과 약혼한 상태다). 테론은 언제나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싸우길 마다하지 않은 전사였다.

테론이 처음부터 전사가 되길 자처한 건 아니었다. 완벽하게 균형잡힌 미모와 큰 키 덕에 테론은 14살 때부터 유럽 전역을 돌며 모델과 무용수로 일했다. 얼마 안 가 다리를 다쳐 발레를 할 수 없게 된 테론에게 어머니는 배우가 되길 권유했다. 운 좋게도 그는 LA로 이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전트의 눈에 띄어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예쁘긴 하지만 말 없는 배역들로 테론의 초기 필모그래피가 채워져갔다. 미모가 무기가 아닌 족쇄가 되어 슬슬 발목을 붙잡으려던 차에 만난 작품이 <데블스 에드버킷>(1997)이었다. 분열증을 앓는 아내 마리앤을 성실하게 연기해낸 테론은 알 파치노와 키아누 리브스 사이에서 충분히 자기 몫을 해내며 연기에 대한 감각을 인정받았다. 테론은 ‘말하는’ 배역을 골라서 맡을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예쁜 데다 연기도 나쁘지 않아 꾸준하게 작품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다였다. 테론에겐 변화가 필요했다. 그 무렵 패티 젠킨스 감독은 테론에게 <몬스터>의 주연을 맡아주길 제안했다. <몬스터>는 테론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아일린 워노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몬스터>에서 테론은 아일린 워노스, 리를 연기하기 위해 14kg을 찌우고 렌즈와 틀니를 착용하는 등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오랫동안 꿈꿔온 대로 제작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모든 길을 가보려 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그녀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몬스터>는 아일린 워노스를 괴물로 그리지 않는다. 테론 역시도 “아일린은 괴물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감정을 허세로 숨기는 순진한 여자로 리를 표현했다. 기회와 관심이 주어졌다면 충분히 선량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보통의 인간, 유일하게 자신을 아름답다고 칭해준 소녀 셀비(크리스티나 리치)에게 헌신하는 연인으로 아일린을 다시 그려낸 것이다. 끔찍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안고 살았던 테론에게 리는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에게 ‘어머니의 땅’이 그랬던 것처럼)“구원”이 되어주었다. 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부랑자 노인 토마스를 연기한 원로배우 브루스 던은 베티 데이비스, 연극배우 제랄딘 페이지와 비교하며 테론을 상찬했다. “처음 세트장에 가서 샤를리즈를 보았을 땐 그저 강아지에게 먹이 주는 걸 즐거워하는 미모의 배우라고 생각했다. 촬영이 시작된 뒤 샤를리즈는 세트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곳엔 단지 아일린 워노스만이 있었다.”

이듬해 열린 오스카 등 굵직한 어워드의 여우주연상을 모조리 거머쥐는 영예를 안은 건 부차적인 일로 여겨질 만큼 테론에게 있어 <몬스터>의 성취는 대단한 것이었다. <몬스터> 이후 테론은 본격적으로 전사로서의 길을 걷는다. 이후 작품들은 <노스 컨츄리>(2005), <배틀 인 시애틀>(2007)처럼 사회성이 짙거나 <이온 플럭스>(2005), <밀리언 웨이즈>(2014), <분노의 도로>처럼 본래 가진 아름다움 대신 강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영화였다. 또는 적어도 <영 어덜트>(2011),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2012), <프로메테우스>(2012)처럼 고투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테론이 연기한 배역 중 가장 ‘괴물’ 같은 아일린 워노스와 가장 연약한 인물로 보이는 <영 어덜트>의 메이비스가 서로 무척 닮았다는 사실이다. 메이비스는 소녀 시절 자신이 누렸던 것들을 잊지 못하고 겉으로만 성장한다. 아일린이 욕설과 과장된 행동으로 그러했듯 메이비스는 값비싼 장신구와 거만한 태도로 자신을 방어한다. 특히 아일린과 메이비스가 감춰둔 속내를 터뜨리며 울 때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안타깝게도 후보 지명에 그쳤지만 <노스 컨츄리>는 테론을 다시금 오스카로 불러낸 영화다. 미국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사건에서 승소한 여성 노동자 조시의 자립을 그렸다. 1980년대 미네소타 북부, 폐쇄적인 광산 회사 피어슨의 남성 광부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까봐 여성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대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그들의 폭력을 묵인하는 것을 자신들의 생존 방편으로 여긴다. 남편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온 조시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광산에 취직하지만 점점 더해가는 성희롱과 폭력에 지쳐간다. 테론은 <노스 컨츄리>에서 한층 원숙한 연기를 보여준다. 조시는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이고, 남편의 폭력과 가족들의 무관심에 방치돼온 여자다. 테론은 푸석하고 핼쑥한 맨 얼굴로 조시의 중압감과 피로감, 고립된 상황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조시는 리와 다르게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캐릭터다. 리를 연기하기 위해 아일린이 남긴 일기를 읽고 또 읽으며 아일린에게로 침잠했던 테론은 조시의 삶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미네소타로 갔다. “호텔 방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읽는 것만으로 캐릭터를 찾아내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곳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집에 가서 같이 바비큐를 해먹거나 그들의 아이들, 그들의 가족들과 교류하는 것이 최고의 리허설이었다. 그럼으로써 나는 그 세계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프로메테우스호의 완고한 책임자 메러디스(<프로메테우스>),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이블 퀸(<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을 거쳐 만난 <분노의 도로>의 사령관 퓨리오사는 테론의 전투력을 정점까지 끌어올린 캐릭터다. 강력한 권력자 임모탄(휴 키스 번)이 지배하는 남성들의 사막에서 퓨리오사는 삭발을 하고 자동차 기름으로 얼굴을 문질러 여성성을 지운 채 그저 ‘사령관’으로서 움직인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구원”을 찾아 자신이 태어난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퓨리오사가 ‘여성’인 것은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어떤 배우가 강력한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반드시 성별의 구분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테론은 훌륭하게 증명해낸다. 퓨리오사는 남성주인공 맥스(톰 하디)와 어떤 로맨스도 만들지 않고, 같은 여성인 임모탄의 다섯 아내들과 필요 이상의 연대를 하지도 않는다. 인간 대 인간으로 형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분노의 도로>는 퓨리오사를 중심으로 오버하지 않고 애쓰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영화임을 드러낸다. 얼마 전 폐막한 제68회 칸국제영화제 프리미어를 비롯해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테론이 이에 대한 질문 폭격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테론은 예의 그 쿨한 말투로 “조지 밀러는 여성도 남성만큼 복합적이고 흥미로운 존재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일축했을 따름이다.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는 이 경탄스러운 영화와, 그 중심에서 활약한 퓨리오사 이후 분명 테론은 또 하나의 고지를 돌파했다. 영화 속 여성 전사들의 역사까지도 새로 썼음에 틀림없다.

<몬스터>

Magic hour

정상적인 삶을 향한 미소

<몬스터>의 리는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채 괴물이 되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완전히 망가져버리기 전, 리는 셀비에 대한 책임감과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로 애써 죄책감을 짓누르고 새 출발을 결심한다. 아마도 이전엔 걸쳐본 적이 없었을 각진 재킷, 스키니진 대신 선택한 단정한 스커트를 입은 채로 리는 ‘사무직’ 면접을 기다린다. 구두가 없기에 의상과 어울리지 않는 웨스턴부츠를 신었지만 리는 다른 대기자들을 흉내내 주섬주섬 손에 읽을 거리를 챙기며 열심히 면접용 미소도 연습해본다. 관객의 눈엔 결과가 빤히 보이는 기다림이지만 리는 진심으로 자신이 붙을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 같다. 벅참과 설렘을 감추지 못한 그 순진한 웃음은 셀비와의 첫 데이트를 준비하던 날, 리가 공중화장실에서 도둑 샤워를 하며 짓던 그 미소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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