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유준상)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위를 질주한다. 화가 곁에는 그에게 심적으로 많은 부분을 의지하는 택시 드라이버(문종원)가 있다. 이 두사람은 지금 막 한 남자의 장기를 적출하려 한다. 화가와 드라이버 앞에서 죽음을 맞게 된 남자는 길 가던 여자를 납치한 죄를 저질렀다. 납치범은 자신이 납치한 여자 앞에서, 생전 처음 보는 화가와 드라이버에게 죽음을 맞는다. 두 남자가 처리해야 할 사내 중에는 그들의 이웃집 남자도 있다. 마약에 절어 있으면서 하는 짓이라고는 생계를 위해 클럽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아내를 윽박지르고 손찌검까지 하는 사내다. 마약 밀매를 하며 이주노동자들을 사고파는, 게다가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남자도 화가와 드라이버의 처리 대상이다. 드라이버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에스토니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이자 스트리퍼인 엘베(나탈리아 불니아) 역시 그런 우악스러운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성난 화가>는 화가와 드라이버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악행과 맞서는 이야기다. 그 악의 대상은 여성을 극악스럽게 대하는 남성들이다. 두 남자는 마치 신의 대리자처럼 이 악한 남성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장기를 꺼낸다. 그리고 장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건네 새 생명을 얻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난 화가>는 메시지가 확실하다. 화가와 드라이버의 역할도 분명하게 부여돼 있다. 화가는 자신이 하는 이 일이 마치 자신의 소명인 것처럼 흔들림 없이 해나간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더럽혀진 마음을 속죄하듯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다잡는다. 한편 드라이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남자에게 무참히 당하는 걸 보며 내적 갈등을 겪는다. 제3의 피해자 여성이 아닌 자신의 애인이 피해자가 된 상황은 그에게 전혀 다른 국면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가와 드라이버의 행동의 명분은 그럴듯한데 이들이 무슨 감정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잘 읽히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과도하게 생략된 두 사람의 대화 혹은 대사, 그리고 그들의 전사 때문일 것이다. 간간이 선문답처럼 주고받는 두 남자의 말만으로는 폭력적 남성들을 처단하기 전후의 이들의 감정의 변화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두 남자는 단죄로 어떤 환기를 겪고 있는가. 그걸 판단할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다보니 관객은 어떠한 감정도 만들지 못한 채 애매한 상태로 오직 화면만을 좇아가게 된다. 충분히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미장센이 과부하처럼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