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두 주체의 욕망과 계급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질 때 그것은 달달한 동화가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전쟁 같은 현실이 된다. 가령 ‘백설공주’가 왕자님 대신 일곱 난쟁이들 가운데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그 이야기는 동화가 끝나는 그 지점- 결혼 혹은 결혼의 약속- 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 단순히 낭만적 감정이 아니라 권력 싸움이며,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성적•사회적 욕망이 충족되길 갈구한다는 사실은 어른이 되면 받아들여야 할 진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대체로 인간이 갖춘 자질들은 정확하게 수치로 환산되지 않고, 때로는 사회적 규약을 위반하는 데서 비롯되는 쾌감이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기 때문에 계산은 뒤틀리고 욕망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늘 부유한다.
계급차이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희곡 <미스 줄리>는 두 남녀의 ‘사랑’을 신분상의 격차와 젠더와 섹스 사이의 갈등이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투과하여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와 권력 투쟁’을 분석한 홍재웅의 글에 의하면, 스트린드베리는 1888년 여성작가 빅토리아 베네딕트손이 코펜하겐의 한 호텔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한 사건을 접하고 영감을 받아 <미스 줄리>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에른스트 알그렌이라는 남성 필명으로 활동해야 했던 베네딕트손의 사건뿐 아니라 여권 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점차 높아가던 19세기 말 북유럽의 정신사적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하녀의 아들이었으면서 귀족 출신 배우였던 첫 부인과 결혼했던 스트린드베리 자신의 자전적 경험도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 스트린드베리가 여주인공인 줄리를 ‘반여성’(半-女性)이라고 지칭한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전통적인 성역할을 상당히 파격적으로 전복했고, 계급차를 넘어선 정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발표된 지 16년이 지난 후에야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이 작품은 스트린드베리의 작품 중 가장 빈번하게 상연되는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의 세팅은 매우 단순하다. 시간적 배경은 하지절 전야에서 아침까지이고, 공간적 배경은 줄리의 아버지인 백작 저택의 부엌, 등장인물은 줄리, 하인인 장 그리고 하인인 장의 약혼녀이자 백작의 요리사인 크리스틴, 이렇게 셋이다. 단순한 세팅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 인물의 권력관계와 욕망의 추이가 수시로 엎치락뒤치락하기 때문이다. 단 한마디의 대사도 무심히 흘려보낼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곡선이 요동친다. 아직은 감독보다 잉마르 베리만의 여주인공으로 더 익숙한, 리브 울만은 이 스웨덴 희곡의 배경을 아일랜드로 옮겨 스크린 위에 담았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바뀐 데는, 미국 출신인 제시카 채스테인(줄리 역)과 아일랜드 출신인 콜린 파렐(존 역)에게 언어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 외에는 큰 뜻이 없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국가와 같은 지역적, 정치적 경계는 작품의 주된 갈등과 별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요 갈등은 줄리와 존(원작의 장)의 불평등한 지위에 기인한다. 줄리는 백작의 딸인 귀족이지만 여성이고, 존은 하인의 아들이자 자신도 하인이지만 남성이다. 줄리는 신분적 지위에서 계급적인 우위에, 존은 젠더적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다. 약혼자와 파혼한 줄리는 자신의 넘치는 욕망을 해결할 대상이 없어 돌발적인 행동을 벌인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적 지위를 이용해 하지날 전야에 존을 밤새도록 옆에 둔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존이 오로지 주인에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그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존으로 하여금 자신을 흠모해왔음을 고백하도록 강요한다. 존은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줄리를 흠모해왔지만 그러한 감정의 근간에는 신분으로 인한 금기가 작동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계급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줄리는 그가 도달하고 싶은 부와 계급의 상징이었다. 줄리는 여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존에 대한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존은 신분에 갇혀 그녀의 은밀한 제안을 해독하지 못하는 척한다. 하지만 그 둘의 관계를 의심하며 조롱하는 주변의 시선과 목소리가 아이러니하게 그 둘에게 존의 방으로 도망가게 하고 둘은 그제야 자기 욕망에 솔직해져 정사를 나눈다.
리브 울만이 없앤 것과 더한 것
정사 이후 둘 사이의 권력은 존에게 기운다. ‘훼손된’ 여성이 된 줄리는 전전긍긍하고, 정사를 사랑으로 포장하려 한다. 존은 그녀의 음란함을 비난하면서 주도권을 쥐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가할 응징이 두려워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성 밖으로 몰아내려 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환상적인 진술을 통해 줄리를 유혹하고, 그녀가 가출을 감행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이때 캐서린(원작의 크리스틴)이 등장한다. 그녀 앞에서 줄리와 존은 잠시 공범이 된다. 캐서린은 종교와 도덕률로 둘을 비난하고, 마부에게 언질을 줌으로써 그들의 탈출 계획을 무산시킨다. 퇴로가 없어진 존은 줄리가 자살을 감행하도록 면도칼을 쥐어주고 설득한다. 줄리는 그가 준 면도칼을 들고 자살한다.
리브 울만이 변형을 가한 것은 국적만이 아니다. 그녀는 원작에 존재했던 줄리 어머니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대신 프롤로그를 통해 줄리의 어린 시절을 삽입했다. 원작에서 줄리의 어머니는 결혼을 거부하는 평민 여성이었다. 그녀는 여성에게 부과된 모든 의무를 거부했다. 그녀를 사랑했던 줄리의 아버지는 그녀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었고 백작 집안 내부에서는 모든 성역할이 전복되었다. 하지만 남들의 비난에 질린 백작은 그녀와 강제로 결혼식을 올렸고, 모든 것을 원위치시켰다. 그것에 분노한 줄리의 어머니는 집에 불을 질렀고, 빈털터리가 된 백작에게 자신의 애인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빌려줌으로써 남편에게 복수했다. 전통적인 안주인의 역할에 숨 막혔던 줄리의 어머니는 결국 자살을 택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줄리의 어머니는 아름답지만 어머니가 되는 것을 거부했던, 냉정한 엄마이자 남성혐오주의자 정도로 압축되어 묘사되었다. 어린 줄리가 어머니와 자신이 함께 찍은 사진을 숄로 덮어버리고, 어머니의 침대에서 ‘엄마’를 부르며 흐느끼는 프롤로그의 시퀀스 역시 어머니에 대한 단순한 애증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리브 울만은 더이상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성역할과 그것을 거부하는 여성의 자아분열이 매력적인 모티브가 되기 어렵다고 파악한 것일까? 줄리 어머니의 역사가 소거된 덕분에 줄리의 자살은 어머니의 죽음과 짝패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원작에서 줄리의 죽음은 아버지를 동정했지만 어머니에게 공감했던 줄리가 아버지- 로 상징되는 세계- 에게 할 수 있는 저항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신분, 계급, 성역할이라는 사회적 규범으로 억압함으로써 어머니를 자살로 몰고 간 아버지에게 대항해 신분질서를 거역한 정사를 벌인 뒤 자살함으로써 어머니의 궤적을 따를 뿐 아니라 아버지가 준수하고자 한 규범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원작에서 그 저항 과정이 일사불란한 것도, 의식적인 것도 아니다. 자신의 유전적 형질과 본능 그리고 ‘남자에게 절대 복종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법을 혼란스럽게 따르는 과정에서 그런 종착역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과정은 한편으로는 반(反)여성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탈(脫)여성적이다.
다시 앞의 백설공주 이야기를 환기하면, 희곡 속 줄리의 어머니는 백설공주의 새어머니- 마녀를 연상케 한다. 그들은 강하고 폭력적이며 반규범적이다. 사실 그것은 그들만의 공통점이 아니라 ‘강한 어머니’들에 대한 전형적 묘사이다. 그들은 자기애를 완성하기 위해 자식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동화 속 마녀는 자기애를 유지하기 위해 어린 딸의 미모를 시기하고 그것을 파멸시키는 방식으로 실현한 반면 줄리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여성성을 강요하는 세계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분노를 딸에게 물려주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 둘의 차이는 ‘강한 어머니’에 대한 시대적 해석의 차이이기도 하다. 강력한 힘을 가진 어머니는 절대적 권위를 휘두르는 아버지만큼 두렵고 위협적인 존재다. 리브 울만의 <미스 줄리>에는 어머니의 공포스러운 힘이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줄리가 죽은 어머니에게 느끼는 아브젝시옹(abjection: 규범과 이성을 위협하는 더러운 존재에 대한 역겨움)은 단순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형상화되었다.
<미스 줄리>와 <미스 줄리>
리브 울만의 <미스 줄리>에서 줄리와 존 사이의 ‘젠더’ 투쟁 역시 상당히 약화되었다. 리브 울만은 원작의 젠더 대결 대신 줄리의 우울과 자살 충동에 집중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백작의 저택은 외부인이 얼씬도 안 하는, 정적과 고독으로 둘러싸인 감옥처럼 보인다. 마이크 피기스의 <미스 줄리>(1999)와 비교해보면 이것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제시카 채스테인의 줄리는 마이크 피기스의 <미스 줄리> 속 세프론 버로우스보다 훨씬 더 신경증적이고 성적으로는 불감증에 가까워 보인다. 일부러 그녀의 처녀성을 강조하는 장면을 집어넣은 데에서도 감독의 그런 의도가 읽힌다. 마찬가지로 콜린 파렐의 존 역시 마이크 피기스 작품에서 마이클 뮬란이 연기한 능수능란하고 관록 있는 중년의 존에 비해 서툴고 어리숙한 다혈질의 풋내기처럼 보인다.
마이크 피기스 작품에서 두 남녀의 대화가 정념과 욕망으로 이글대고, 농염하면서도 도발적이었다면 리브 울만의 작품에서 그들의 대화는 서툴고 어색하며, 신경증적이고, 발작적이며, 변덕스럽다. 그로 인해 이 작품에서 둘의 대화는 태생적 기질과 신분적 한계로 인해 고독감의 한계에 이른 줄리가 자신의 자살을 합리화하기 위해 어수룩한 존을 도발하여 자기 죽음의 정당성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녀의 죽음은 현실 도피나 권력 투쟁의 실패가 아니라 일종의 해방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자살하기 위해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성문을 열고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나 자신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시냇물과 하나가 되는 마지막 장면은 비감보다 위안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