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연기로 캐릭터를 더 잘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생각만큼 잘 표현이 안 된 것 같아서….” 부끄럽다는 듯 두손으로 슬며시 얼굴을 가리며 윤계상이 아쉬움을 토로한다. 2년 전 촬영을 마친 <소수의견>이 비로소 관객과 만나는 데 대한 기쁨 못지않게 2년 전 자신의 연기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그는 ‘그렇다해도, 좋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럼에도, 아쉽다’고 콕콕 집어 말하는 편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런 집요한 구석이 배우 윤계상을 이끄는 원초적인 힘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끝까지 부딪혀가며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법정 드라마 <소수의견> 속 윤진원 변호사는 어떤 인물일까. “도전적인 작품”을 만나 그는 무엇을 맛보고 돌아온 것일까. <소수의견>을 마친 뒤, “여유와 용기”라는 단어를 자신의 마음에 품게 됐다는 배우 윤계상을 만났다.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이랄까. 뜻하지 않은 큰 행운이 찾아온 것 같다.” 2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소수의견>(2015)의 개봉(6월24일) 소식을 전하게 된 주연배우 윤계상의 이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얼굴의 세세한 잔근육을 모조리 움직여가며 만들어내는 윤계상 특유의 함박웃음에서는 기분 좋은 설렘과 묘한 긴장이 교차한다.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말 기분 좋더라. 그런데 좋은 건 10분도 못 가고 이내 ‘과연 2년 전의 내 연기를 지금 보면 좋을까?’라는 걱정부터 앞섰다.”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만이 꺼낼 수 있는 자문. 그만큼 그는 연기라는 “끝도 없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소수의견>에서 그가 연기한 윤진원은 윤계상이 “스타가 아닌 배우로 오래가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지던 시기에 찾아온 역할이라 더욱 애착이 갔다.
지방대 출신에 별 볼일 없는, 잘나가지도 못하는 국선 변호사 윤진원. 그런 그가 철거 반대 투쟁 현장에서 경찰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철거민 박재호(이경영)를 변호하게 된다. 이후 윤진원은 이 사건이 철거민과 경찰의 대립만이 아니라 검찰을 비롯한 더 큰 세력들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을 알게 되면서 되레 이 싸움에서 제대로 이겨보고 싶어진다. 그런 윤진원을 두고 윤계상은 “꼭 나 같았다”라고 말한다. “진원은 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는 주류 법조 사회에 울분이 있던 사람이다. 나 역시 배우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가수 출신 배우라는 데 대한) 편견과 오해를 받아야 했고 스스로도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런 내 안의 억울함과 진원의 그것이 비슷해 보여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놓을 수가 없었다. ‘윤계상이 법정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면 누가 기대하겠나. 그런데 진원을 통해서 보란 듯이 해 보이고 싶었다.”
자신의 들끓는 속내를 윤진원을 통해 풀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윤계상은 <소수의견>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그만큼 그는 단 한신도 쉽게 넘기지 않았고 그 가운데서도 마지막 법정 변론 장면은 가장 기운을 쏟은 신이다. “나에게는 이 장면이 승부처였다. 연극 무대에 올라 연기하듯 방청객과 배심원을 향해 변론을 보여줘야 했다. 가수로서 몇 천명의 팬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건 많이 해봐서 그런지 떨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만큼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힘들더라. 권해효, 김의성, 유해진, 이경영. 자타 공인 연기파 선배님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연기를 해야 했으니까.” 그런 그가 끝까지 자신의 속도로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엄청난 연습량과 더불어 함께한 선배들의 힘이 컸다. “(이)경영, (유)해진 선배가 그러시더라. ‘배우는 저마다의 계기로 훌륭한 연기를 펼칠 때가 분명히 있다. 다만 각자가 가는 속도가 다를 뿐이다. 그런데 너는 왜 그리 빨리만 가려고 하느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아, 내가 느리게 가고는 있지만 후퇴하고 있지는 않구나’라는 걸 정확히 알겠더라. 그 뒤부터 훨씬 여유가 생겼다. 사람이 밝아지고 용기도 나고. 내 연기 인생이 <소수의견>을 전후로 나뉘는 것 같을 만큼.” 보다 자신감을 갖고 촬영에 임하다보니 애드리브 연기도 술술 나왔다. “꾹꾹 감정을 억눌러오던 윤진원이 최후 법정에서 몰염치한 검사 홍재덕(김의성)을 향해 괴상한 표정을 짓는 게 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면 절대로 나오지 않았을 표정이다. 정말 홍재덕을 도발하고 싶은 마음이 확확 올라오더라. (웃음)”
<소수의견>을 촬영하며 자신의 현재를 바로 보고 스스로를 단련시킨 윤계상은 지난해에 보다 너른 품을 갖게 됐다. <레드카펫>(2014)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에로영화 감독 정우를 연기했고,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god 멤버로 다시 합류해 무대에 올랐다. “10년 동안 너무 연기, 연기 하면서 달려왔다. god로 활동했던 그때의 내 모습을 나조차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멤버들이 기억해주더라. 그걸 알게 되면서 확실히 행복해졌다.” 모든 게 서툴렀던 <발레교습소>(2004)의 민재에서 출발해 고집스레 자기 길을 가는 <소수의견>의 진원까지. 필모그래피 속 인물들과 더불어 배우 윤계상 역시 자신의 성장사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딱 내 나이에 맞는 역할들을 하며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그게 참 좋다. 7월에는 드라마 <라스트>를 통해 피 철철 흘리며 싸워나가는 역을, 하반기에는 영화 <극적인 하룻밤>을 통해 가장 리얼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일 것 같다. 해보니까 끊임없이 작품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더라. 또 그게 훌륭한 배우가 되는 길이기도 하고. 그러다 지독한 악역도 한번 해보고 싶다. 내 안에 악의 기운이 ‘쪼금’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어느 정도인지 한번 꺼내서 제대로 써보고 싶다. (웃음)” 당분간은 이렇게 계속 달릴 생각이라는 그에게서 야무지고 건강한 기운이 전해진다. 윤계상, 그가 내다보는 연기의 반경은 확실히 더 넓어지고 있는 중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