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임상수] 어떤 ‘느낌’으로 기억되기를
2015-07-08
글 : 윤혜지
사진 : 백종헌
<나의 절친 악당들> 임상수 감독

임상수 감독의 신작 <나의 절친 악당들>에서 나미(고준희) 집을 방문한 지누(류승범)는 벽에 잔뜩 그려진 나미의 그림을 보고 이게 뭔가 싶은 눈으로 나미를 본다. 그 무언의 질문에 나미는 “묻지는 말고 그냥 보세요”라고 답한다. 임상수 감독은 관객이 영화를 그렇게 봐주길 바란다고 했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아도 좋다. 젊은 애들이 아무 생각 없이 와서 영화의 파고에 몸을 맡기고 110분을 그냥 ‘느낌’으로 즐겨줬으면 좋겠다.” <나의 절친 악당들>은 우연히 거액이 담긴 트렁크 세개를 손에 넣게 된 네 젊은이들의 대탈주를 그리는 블랙코미디다. 지누와 나미는 탐욕스러운 기성세대에 맞서 ‘악당’이 되기를 자처한다. 악당들은 자신들을 옥죄는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자유롭게 내달린다. 감독의 전작과 비교하면 색과 결이 무척 낯선 영화다. 임상수 감독에게 발칙하고 이상하지만, 흥미롭고 유쾌한 그 내달림의 과정에 대해 질문했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청년들이다.

=<눈물>(2000)을 찍고 <바람난 가족>(2003) 이후에 의식적으로 어른스러운 영화, 어른을 위한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젊은 청춘을 위한 영화를 하나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을 다룬 근작들이 대개 우울한 엔딩을 맞는 것과 비교하면 이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보일지언정 가고 싶은 데까지 간다.

=젊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몇편 봤는데 다 암울했다. 자기들 삶을 그대로 표현했을 테니까. 현실을 날것으로 그리는 영화는 <눈물> 때 해봤다. 내 전작을 본 폭스인터내셔널프로덕션 사장이 엔딩을 걱정하더라. 하지만 이 영화는 상업적인 장르영화니까 애초부터 해피엔딩으로 할 생각이었다.

-폭스는 다른 제작사, 배급사들과 어떤 차이가 있었나.

=우리나라에선 비즈니스하는 사람이 영화를 한다면, 거긴 영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다 쓰면 영어로 번역해서 폭스에 보냈고, 그러면 사장이 여기로 날아왔다. 편집본이 나왔을 때 부사장이 A4 용지 네장에 자기 의견을 빽빽하게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 의견을 모으는 동안은 사장, 부사장과 내가 삼자 통화를 했다. 편집에 관해 의견을 조율하는 건 감독 입장에선 간섭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연한 과정이다. 괴롭지만 언제든지 타협하고 조율해서 답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집본을 본 폭스 사장이 지누를 두고 “사랑스러운 괴짜”(lovable freak)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규직 제안을 포기하고 악당이 되길 선택한 것에 대해 보충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후시녹음으로 오프닝에 자기 처지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넣었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니까 정규직이 돼봤자 영혼에 상처입을 거라고 생각한 거다. 나미도 나중에 돈은 가졌지만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못 참겠다고 하잖나. 자기 영혼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서다.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힘들어도 영혼의 고결함은 지키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숱한 레퍼런스가 있었겠다.

=시나리오 쓰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와 <내일을 향해 쏴라>(1969)였다. 그런 영화들이 날 영화감독으로 만들었을 거다. <씨네21>적으로 말하자면, 울트라 보수들이 지배하는 1960년대의 암울한 현실 속 히피 반항아를 주인공으로 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영향이 어쩌고저쩌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냥 나의 심장을 움직인 어떤 장면들로 기억되는 영화다. 개념화된 언어로 말해지기 이전의 어떤 이미지, 어떤 느낌으로 기억되는 영화들. 내 영화도 그렇게 소비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하녀>(2010)와 <돈의 맛>(2012)의 ‘나미’가 불려온 대신 영화에 매번 등장하던 ‘주영작’이란 이름이 빠졌다.

=정말로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지누와 나미는 시나리오를 쓸 때 내가 제일 간단히 쓸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하고, 영어로 번역했을 때 알파벳 네자만으로 소화할 수 있는 이름이다. 주영작? 그거 언제까지 쓰겠나? (웃음)

-회장(김주혁)의 돈을 싣고 이동하다 차에 받혀 죽는 인물을 직접 연기했다.

=그 인물이 얼마 안 나오는데도 촬영 장소가 다섯 군데나 된다. 그 역을 해줄 수 있는 50대 배우가 없었다. 악당들이 기성세대 중장년 아저씨를 멸시하는 시각이 있는데 어차피 나도 딱 그 세대이고, 연출자라고 거기서 쏙 빠지기도 뭣해서. 옛날의 임상수는 죽었다?(웃음) 그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엔딩곡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뭘 그렇게 놀래>를 선택했다.

=아는 노래였는데 우연한 기회로 다시 듣다보니 가사가 지금껏 흘러온 우리 악당들의 얘기와 절묘하게 맞더라. 무릎을 쳤다. 장기하와 얼굴들에게 노래를 써도 되겠냐고 연락했더니 고맙게도 그 추운 날 모든 멤버가 와서 촬영을 도와줬다.

-지누와 나미는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돈을 펑펑 쓴다. 요즘 청년들을 두고 칠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을 포기한 세대)라고 하잖나. 퍽 현실반영적이다.

=영화에서 돈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도 트렁크에 있는 돈은 온전히 악당들에게 주고 싶었다. 돈이란 게 참 간단하지가 않다. 나미는 돈을 포기못한다며 질질 짜고, 지누도 돈이 있으니까 너랑 나랑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않냐고 말하고. 엄청 슬프다.

-‘악당들’은 자기들끼리는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 굳게 쌓은 신뢰라기보다 당연한 예의 같다는 인상이다.

=대중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선 내 스타일대로 가는 거다. 악당들에게 끝까지 존댓말을 쓰게 하고 싶었다. 말투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설정이 어떤 분위기를 느끼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호텔 벨보이, 청소부, 비서 등 서비스 직군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은 고객을 공손히 응대하면서도 경멸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보며 불평한다.

=걔네들도 사실 네명의 악당들과 같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찍었다. 창준(김형규)이 상관의 명령으로 지누의 목을 조를 때 짓는 표정도 진저리치도록 싫은 표정이잖나.

-지누와 나미를 ‘그것들’이란 자막으로 표현했다.

=내레이션도, 자막도, 고속촬영도 사실 영화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지만은 않은 요소들이다. 첫 편집본엔 자막도 ‘첫쨋날 밤, 둘쨋날 밤’으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그것들의 첫 번째 밤’이라고 고치고 싶어졌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냥 내 느낌이다. 왜 바꾸고 싶었는지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봤다. 지누와 나미가 처음 잘 때 관객이 그들의 성실함, 진지함을 의심했으면 좋겠더라.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게 아니란 걸 알 테니까 더 마음에 닿지 않을까. 짐짓 못된 척하는 수법이지.

-지누는 왜 자꾸 나미와 섹스한 횟수를 되풀이해 묻나.

=그냥 농담이다. “우리 여섯번 했죠? 수십번, 수백번 할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게 “우리가 백년해로할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유머러스하잖나. 지누는 여자에게 잘해주는 남자니까.

-드물게 여성에게 진짜 배려를 할 줄 아는 남성 캐릭터다.

=폭스 사장, 부사장도 너무 ‘주도하지 않는 남자’가 아니냐고 물었다. 미국영화의 히어로들은 항상 그렇잖나. 나는 그것과 다른 남자주인공을 발명한 거다. 남녀의 밀당이 나오는 한국영화 중 근래 본 것들은 남자주인공들이 다들 후지더라. 내가 여자라면 저런 남자랑은 밀당 안 한다. 그냥 차버리지. 더 좋은 남자가 필요하다는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캐스팅이 어려웠다. 주도하는 남자가 아니기 때문인 거지. 류승범쯤 되는 배우니까 ‘당신이 무슨 얘기 하는지 알겠다. 고준희를 내가 서포트해주겠다’ 할 수 있었던 거다.

-파리에 있는 류승범에게 메일로 출연 제의를 했을 때 류승범이 한 페이지를 꽉 채워서 답장을 보내왔다고.

=나는 모든 이메일을 딱 두줄로 쓰는 타입인데 답장이 한 페이지가 오더라. 시나리오에 대한 얘기, 연상되는 영화들 얘기, 파리에서의 자기 삶 얘기 뭐 그런 거였다. 타국에서 외로웠겠지. 글을 길게 쓰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걸 수도 있고.

-매번 여자배우가 인상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이번엔 고준희의 무엇이 당신을 매혹시켰나.

=여자배우들에겐 인기가 있어서 나미를 하겠다는 배우들이 좀 있었는데 고준희씨를 선택했다. 대신 고준희씨가 제대로 못하면 같이 망하겠구나 생각했다. (웃음) 만나서 얘길 나눠보니 준희씨가 자기를 증명해내고 싶은 욕망이 상당했다. 잘만 다듬어주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구나 싶었다. 욕심 있는 배우인데 점잖아서 그걸 질투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헝그리 정신이 살아 있더라.

-음부키를 연기한 양익준 감독은 어떻게 참여한 건가.

=<똥파리>(2009)를 보고 <가족의 나라>(2012)를 봤는데 양익준씨와는 언제 한번 같이 해야겠구나 싶었다. 특히 <가족의 나라>에선 몇컷 안 나오면서도 이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원래는 창준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똥파리>에 나오는 남자처럼 그릴 생각이었다. 양익준씨가 시나리오를 읽고 왔는데 굳이 시키겠다면 창준 역을 하겠지만 자기는 음부키를 하고 싶다더라. 저 사람이 뭘 보고 음부키를 하겠다는 건가 궁금했다. 그러더니 예산도 얼마 안 되는데 비싼 레게머리를 하겠다, 금니를 하겠다, 의상은 이렇게 하겠다 아주 수선을 피우는 거다. (웃음) 주유소 장면을 먼저 찍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음부키는 신경도 안 썼다. 막상 편집할 때 보니 아주 이상한 연기를 하더라고. 당혹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데서 폭발적인 게 나왔다. 감독이라고 영화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닌가보다. (웃음)

-음부키의 사무실은 동두천의 쇠락한 거리에 있다.

=동두천인 줄은 어떻게 알았나. (웃음) 제일 적절한 장소는 아마 안산 근처일 텐데 거긴 여전히 사람들이 장사하고 있는 데라 그렇게 막아놓고 찍을 수가 없었다. 폭력배가 있어서 어렵다고도 들었고. 동두천은 죽은 동네라 살짝 꾸며놓고 찍기가 편했다.

-7월부터 부산국제영화제 20주년을 기념하는 단편영화를 찍고, ‘부산국제영화제×Youku(요쿠) 아시아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로 가와세 나오미, 왕샤오솨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과 3년간 신인감독 4명의 멘토를 맡는다고.

=죄책감이 느껴진다. (웃음) 내가 대체 누구의 멘토를 하겠나. 일단 나는 영화제 전까지 프린트를 완성하는 게 최대 목표다. <뱀파이어는 우리 옆집에 산다>가 제목이고 오리지널 시나리오다. 15분에서 20분 사이의 단편인데 같은 뱀파이어영화지만 <사랑해, 리우>(2014)와는 전혀 다른 영화다. 7월 첫주부터 촬영을 시작해서 4회차로 끝낼 거다. 그것 말고도 주머니에 여러 프로젝트를 갖고 있는데 이번 영화의 결과를 보고 적당한 걸 꺼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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