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미시마
2015-07-07
글 : 박수민 (영화감독)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와 미시마 유키오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전 10권, 살림 펴냄, 1996)은 훌륭한 앤솔러지다. 과거 이문열에 대한 찬반 격론 중에도 이 단편선집의 우수성과 그가 선별해놓은 테마와 목록의 탁월함만큼은 인정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이 선집을 통해 귀중한 작가와 작품들을 만났고, 특히 2권 <죽음의 미학>과 7권 <사내들만의 미학>을 즐겁게 읽었다. 그런데 이 두권은 한권을 억지로 나눈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근사한 제목들에 비해 이들 테마에만 ‘미학’이란 알쏭달쏭한 말을 반복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남성=죽음’, ‘여성=생명’. 이런 식의 관념적 이분법을 좋아하는 내가 ‘미학’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남자(개)와 죽음(똥)의 개똥 같음을 생각할 때 꼭 떠올리는 작가와 작품이 있으니,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 1961)이다.

<우국>은 위의 책 2권 <죽음의 미학>의 첫 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다(최근 신경숙 표절 건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판본). 쇼와 11년(1936), 청년 장교들이 ‘천황 친정’(천황이 국가를 직접 다스림)을 부르짖으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패한 2•26 사건이 배경이다. 신혼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이 도모한 거사에서 제외되었던 다케야마 중위는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사살해야 하는 상황에 충정과 신의 사이에서 번민하다 할복을 결심한다. 아내 레이코 역시 남편을 따라 자결하기로 하고, 죽음의 의식에 기꺼이 동참한다. 두 사람이 보내는 마지막 밤에 대한 묘사가 주된 내용이다.

한 작가가 자신의 (이상한) 신념을 소설로 쓰고 그걸 직접 영화로 만드는 일이야 허다해도, 더 나아가 직접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드문데, 미시마 유키오는 그렇게 했다. 그는 직접 각색, 제작, 감독을 하고 주연까지 맡은 27분짜리 단편영화 <우국>(1966)에서 다케야마 중위로 분해 앞으로 4년 뒤에 자신이 벌일 할복자살을 리허설한다. 소설을 철저하게 따라가는 이 영화에서 미시마는 장교 정복을 입고 정모 챙으로 눈을 가린 채 (이게 묘하게 로보캅처럼 보인다. <로보캅>의 디자이너들은 공권력의 나르시시즘적 얼굴이 눈을 가린 채 견고한 입과 뺨과 턱을 드러내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근사하게 배를 가르고 피를 쏟아 창자를 꺼내놓는다. 소설의 아름다운 문장을 육체로 재연한 영상은 그야말로 죽음의 미학이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이 죽음이 현실에서도 과연 아름다웠을까?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이어서 1970년 11월25일 다테노카이(楯の會) 사건의 기록까지 확인하고 나면 정말이지 개똥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신검에서 폐병인 척 병역면제를 받았던 미시마는 애초에 군인이 아니었다. 대학생들을 모아 사제 군복을 맞춰 입고 옥상에서 열병식을 하며 한달짜리 자위대 캠프에 갔다 온들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영화에서는 단순미 넘치는 무언극으로 묘사되었던 죽음의 의식은 현실에서는 조롱과 야유 속에 소란스럽기만 했다. 소설과 영화에서 그렇게 멋지게 죽었던 미시마의 실제 할복은 엉망진창 피칠갑의 아수라장이었다. 가이샤쿠(介錯, 할복하는 사람의 목을 쳐주는 의식)는 거듭 실패해 몇번이나 칼을 맞고도 목은 붙어 있었고, 헬스로 가꾸어 사진집까지 냈던 근육질 몸은 고통에 속절없이 발버둥쳤다. 미시마는 그렇게 ‘겨우’ 죽었다.

<우국>

죽음은 죽도록 고통스럽고 처치 곤란한 시체만 남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끝내 일본인이라는 특수 인종으로, 천황의 군인이자 주군의 충직한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미시마의 망상은 결국, 투영할 대상이 없어 갈 곳을 잃은 자기애(혹은 자기혐오)였다. 나는 800명 도쿄대 전공투 앞에 홀로 서서 좌우를 초월한 우주적 관념을 토론하던 ‘근대 고릴라’(전공투 학생들이 미시마를 풍자했던 캐리커처의 제목)와, <가면의 고백>(1949)에서 자신의 병을 절절히 고백했던 영민한 소년을 알았기에 그 개똥 같은 죽음이 더욱 아쉬웠다.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그림 앞에서 그만 발기하고 사정했던 소년은 남성 육체의 초인적 죽음에서만 아름다움을 보았다. 이 아름다움을 아는 이 자신뿐이기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대상을 인간이면서 신이었던 유일의 존재, 천황으로 삼았다. 이처럼 극도로 작위적인 한 유미주의자의 선택은 완벽해진 자기 자신과 섹스하고픈 욕망이었다. 그의 일생을 건 퍼포먼스는 결국 거대한 자위행위였고, 나는 답답했다. 이 죽음의 초강력한 무의미함, 무지막지한 우스꽝스러움에 대하여 어떤 답을 갈구했다.

마침내 대답을 해준 작품이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1983)였다. 이 영화에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분한 요노이 대위는 명백히 미시마 유키오를 연상시킨다. 목숨을 천황에게 바친 군인으로서 사는 것이 치욕이고 죽는 것이 명예인 그는 전장에서 매일 아침 부하와 진검으로 대련하며 죽음을 흉내낸다. 그러나 사실 죽음에 대한 동경은 공포에 가면을 씌운 것이다. 이런 요노이 앞에 나타난 데이비드 보위―셀리어스 소령은 죽음에 대한 거절을 주장하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나날의 생(生)으로 삼켜버린 남자다. 그는 제 발로 처형장을 향해 걸어가며, 자신을 겨눈 총구 앞에서 눈가리개를 거부한다. 죽기 위해 사는 남자와 살기 위해 죽는 남자의 만남. 죽음의 규율 앞에 대항한 생의 파격. 진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셀리어스의 존재는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요노이는 이 아름다운 남자를 베어버리려고 하지만, 이 남자는 대신 그의 뺨에 입을 맞춘다. 생의 키스에 가면이 벗겨진 요노이는 셀리어스를 베지 못한다. 죽음 대신 오직 살아 있는 것만이 당신의 뺨에 키스를 해줄 수 있다.

죽음에 생으로 맞선 셀리어스의 의지엔 그가 배신한 곱추 동생에 대한 죄의식이 스며 있다. 꽃을 가꾸며 미성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곧잘 부르던 동생은 학교에서 집단 린치를 당한다. 군대 이전에 학교에서부터 학습되기 시작한 남성 권력과 집단의 폭력은 남자이기 이전에 소년이었던, 아직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은 중성의 존재를 발가벗겨 시궁창에 처박는다. 셀리어스는 이 폭력을 방관한다. 동생의 중성적 아름다움은 곧 셀리어스 내면의 연약함이었고, 동생에 대한 배신은 곧 자기 내면에 먼저 자리하고 있던 아름다움에서 눈 돌린 비겁함이었다. 우리가 ‘여성성’이라 곡해하는 이 연약한 아름다움은 남성 집단에서 숨겨야 할 추함이 되고 만다. 미친 제국에서 살았던 미시마의 병이 마냥 혼자만의 것이었을까? 나는 영화에서 곱추 소년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처음엔 가면을 고백할 줄 알았던 어린 미시마가 떠올라 서글프다.

미시마가 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달 뒤 크리스마스를 맞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했다면, 아름다움을 보는 그 눈으로 죽음 대신 생을 응시했다면, 크리스마스엔 그가 사랑한 남자든 여자든 누구건 그의 뺨에 입맞춰주었을 텐데. 그럼 대체 천황이니 대의니 개똥 같은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우국> 따위의 배나 가르는 징그러운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적어도 50여년 후 누군가의 우둔한 도둑질이 들키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누군가의 재능 낭비는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낭패다. 어쨌거나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아쉬움. 미시마의 개똥 같은 죽음 앞에 나는 최대한의 선의로 인사할 뿐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미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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