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people] 끝끝내 세상 속으로 향하는 굳센 사랑의 서약
2015-07-09
글 : 김현수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파스카> 안선경 감독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수상했던 안선경 감독의 <파스카>는 40대 여인 가을과 10대 소년 요셉의 험난한 러브 스토리를 다룬다. 영화는 단지 격정 멜로에 주목하기보다 삶과 죽음을 감싸 안으며 용기 있는 삶의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을 담아낸다. 그들의 단단한 발걸음이 마음을 울린다. 개봉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할 안선경 감독을 만나 영화의 이모저모를 캐물었다.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개봉까지 꽤 오래 걸렸다.

=<파스카>를 개봉하기까지가 나로서는 수난의 기간이었다. 예전 배급사와의 갈등 등 여러 가지문제로 인해 개봉이 늦춰졌다. 영진위 지원을 받은 터라 제한기간이 있어 7월에는 반드시 개봉을 해야 했다. 현재 1인 에이전시인 무브먼트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데 예고편도 직접 만들고 예산 관리도 하다 보니 독립영화 배급의 현실을 선명하게 깨닫는 계기가 됐다.

-영화가 시작하면 ‘궁금단영화’라는 아기자기한 이름의 영화사 로고가 눈에 띈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3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그중 ‘금단이’라는 고양이가 유난히 호기심이 많다. 그 이름을 따와서 만들어봤다. 다소 밝은 분위기의 이름이면 좋을 것 같아 지어봤는데 아기자기하다니 잘 지은 것 같다.

-주인공인 연상 연하 커플 가을과 요셉의 험난한 연애사에 고양이의 죽음이란 일상의 사건이 끼어들면서 갈등이 불거진다.

=키우던 고양이 ‘하늘이’가 죽고 나서 바로 장례를 치르지 못해 안달복달했던 며칠간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가을과 요셉의 이야기를 쓰게 됐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대처할 수 없었던 수많은 죽음 앞에서의 난처한 상황을 상상하며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죽음을 수습할 수 없는 일상에 관해 쓰다 보니 자연스레 가을의 낙태 이야기도 등장하게 됐다.

-‘파스카’라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제목이 붙으니 영화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누구는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고도 하더라. ‘파스카’가 가톨릭에서 축제나 제의 등의 의미로쓰인다는 것을 시나리오상에서 설명해주려다가 지웠다. 종교적인 의도라기보다 마음의 염원처럼 지니고 있던 화두를 뜻하는 의미로 썼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가 이걸 쓰는 동안 답을 찾을 수 있겠지, 라는 염원을 갖고 파스카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올렸다. 파스카는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좋은 체험이다. 역사적 의미는 잘 몰라도 단어 자체에서 신비로운 느낌을 받게 되더라.

-그런 의미에서 극중 가을이 골목을 돌며 길고양이의 밥을 챙겨주는 행위가 마치 고해성사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밥을 먹는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의 행위인데 가을에게는 천대받는 생명인 길고양이가 마음의 짐으로 다가온다. 가을은 그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은 거다. 현실에서 그렇게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다가는 안 좋은 일도 많이 당한다. 그 장면이 곧 내 삶의 체험이고 인물의 고민이기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또 고양이가 인물의 갈등이나 사건의 중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애초 사건 전개에 고양이를 많이 등장시키려 했다. 그들이 영화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어줄 거라 생각했으나 싹 빼고 인물 위주의 이야기로 간추렸다. 영화 전체의 방향과 맞지 않았다. 물론 찍기도 쉽지 않았고.

-카메라의 움직임도 거의 없다. 대부분 고정되어 있고 롱테이크가 많다.

=개인적인 연출 취향인데 어릴 때 할리우드영화를 보면서도 배우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현란하게 컷을 분할해서 클로즈업 등의 기법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배우들이 연기할 때 뿜어내는 감정과 공기의 흐름을 좋아해서 컷을 많이 안 나누는 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화가 우아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척박한 현실을 우아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다.

-영화가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고정되어 있지만 장면이 바뀔 때마다 시간 점프가 급격하게 이뤄진다.

=컷과 컷 사이에는 긴장이 있어야 한다.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올지 모르는 긴장. 그리고 충돌이나 상징을 결합함으로써 느껴지는 효과 같은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실제 사건도 순서대로 다가오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침범해온다. 내가 생각하는 삶은 늘 그렇게 평온하지 않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후반부의 급격한 연출상의 변화는 그런 의미에서다.

-가을과 요셉은 나이뿐만 아니라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실제 경력도 차이가 크다.

=가을 역의 배우 김소희는 연희단 거리패 선배다. 그녀가 1기, 나는 3기 출신이다. 거리패를 나온뒤 십년 넘게 흘러 갑자기 생각나서 뒤늦게 연락을 드렸다. 요셉 역의 성호준은 현장에서 프로듀서 역할도 했다. 현장에서 돈 계산을 하면서 연기를 해야 했다. 나 역시 조감독 없이 10명 내외의 최소한의 스탭들과 작업했다. 두 배우의 연기 호흡은 당연하게도 김소희가 이끌다시피 했다. 요셉 캐릭터의 상당 부분은 실제 호준을 보며 참고했다.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파스카>가 낙태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는 아니지만, 산부인과 장면은 꽤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영화제 때도 그 장면 이후 충격에 휩싸였다는 관객의 반응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초고 시나리오에서부터 당연히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낙태는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낙태 경험을 갖고 있다. 낙태 찬반 의견을 떠나 수술 처리 방식에 대해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보여줘야 했다. 그것이 바로 가을의 아픔이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가을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그 장면을 넣은 것이다.

-짧게 쓰인 음악도 영화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든다.

=오프닝과 엔딩 두 군데에서 첼로 연주음악이 등장한다. 음악감독에게 큰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느낌으로 연주해달라고 했다. 무키무키만만수의 이민휘씨가 이 영화를 통해 극영화 장편 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 성호준의 소개로 만났는데 시나리오를 좋아했다. 음악 색이 맞을까 고민했는데 바로 감을 잡더라. 이후에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소개시켜줘서 작업했고 지금은 뉴욕으로 영화음악을 전공하러 유학을 떠났다.

-결말에 이르면 카메라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톤이 달라진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이미 이 커플이 잘 버티고 버텨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스테디캠을 이용해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컨셉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원래는 부감숏으로 찍고 싶었으나 장비를 쓸 수 없게 되어 지금의 엔딩이 됐다.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암담한 느낌이 든다고?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차기작은 어떤 영화가 될까.

=<한국요리전문점사랑방>이라고 일본에 불법으로 거주하면서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한국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트리트먼트를 썼는데 지원을 못 받아서 묵히고 있다. 그보다 현실 가능한 소재는 <나의 영화연기 워크숍>이라고 배우가 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직접 배우들을 모집해서 워크숍을 운영 중인데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영화의 아이디어를 개인적 경험에서 찾는 편인가.

=개인적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다기보다 그냥 쓰다 보면 저절로 나오더라. 거기서 끌려나오는 허구의 이야기를 뒤섞는 식인 거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모습을 최대한 포장하지 않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내 삶의 숙제를 풀듯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에게도 수많은 고통의 문제들이 존재하는데 굳이 다른 데 가서 소재를 찾을 필요가 있나.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영화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헛되이 이야기를 수습하거나 함부로 희망이 있는 척 굴고 싶지 않다. 그건 내 고집이다. <파스카>는 어떤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영화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이라 생각하고 담담하게 편견 없이 봐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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