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피곤한 중년의 아이콘’이라더라. (웃음)” <골든타임>(2012)에서 3일 밤낮으로 수술한 뒤 퇴근하다가 응급 환자가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고 다시 병원으로 차를 돌리는 의사 최인혁, <미생>(2014)에서 오로지 일만 하는 직장인 오상식 등 최근 드라마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인물들은 김광태 감독이 촌장 역할에 이성민을 떠올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골든타임>에서 빨갛게 충혈된 눈, 피곤에 전 푸석푸석한 피부 등 선배님의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촌장 집권 말기의 피곤한 마을 풍경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 출연을 부탁드렸다”는 게 김 감독의 설명.
촌장의 하루 일과는 마을 일에서 시작해 마을 일로 끝난다. 마을의 대소사는 전부 그에게 보고되고, 그의 결정을 따른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의 취침시간도 그가 종을 쳐서 알릴 정도다. “마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을 잘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리더라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이 몇 가지 진실만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웃음) 중요한 건 진실 몇 가지를 감추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진실을 알고도 침묵을 지키는 게 과연 옳을까. 그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촌장이 어떤 진실을 감추면서까지 간신히 질서를 유지하던 마을은 외지인인 우룡(류승룡)과 그의 아들 영남(구승현)이 들어오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겉과 속이 달라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에서 촌장은 <군도: 민란의 시대>(2014)에서 의적 떼를 이끌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저항했던 대호나 <미생>에서 영업3팀을 든든하게 지탱했던 오 과장 같은 전작에서 연기한 올바른 리더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리더인 셈이다. 그게 이성민이 <손님>의 촌장에 결정적으로 이끌린 이유다. “악역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 배우가 가진 천성, 얼굴이 있는데 나는 악역이 잘 안 된다. 그게 핸디캡이다. 사람은 얼굴이 악인이 아니라 행동이 악인이어야 진짜 악인이다. 그게 사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촌장은 양면성이 있어 해볼 만하겠더라.”
그가 촌장이라는 옷을 입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한 건 외양을 바꾸는 것이었다. 원래 촌장의 연령대는 60대였지만 김광태 감독과 이성민은 “50대인지, 60대인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보이게 하자”고 뜻을 모았다. 게다가 류승룡이 연기한 우룡보다도 나이가 들어 보여야 했다. 머리카락을 탈색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흰머리로 연출한 건 이번이 처음. “어땠냐고? 대단한 건 아닌데… 배우들은 한번씩 한다더라. 변신을 하니까. 염색도 잘 안 하는 터라 머리 색이 확 빠지니 신기하긴 했다. 촌장 느낌도 좀 들고.” 탈색이 촌장이라는 옷을 입혀줬다면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촌장의 내면을 형성하는 게 중요했다. “핵심이 그거였다. 아직 자세하게까지 말할 순 없지만, 촌장의 속내를 우룡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보여줄 것 같으면서, 또 안 보여줘야 화면 안팎에서 서스펜스가 구축된다. 그 선을 미묘하게 줄타기하기 위해 매 장면 고민이 많았다.” 촌장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단단하게 지탱하고는 인물이기에 이성민 같은 ‘연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에게나 맡기기 힘든 중책인 것이다.
최근 이성민은 <빅매치>(2014), 드라마 <미생>, <손님>, 드라마 <화정> 등 쉴 틈 없이 작업하고 있다. 매 작품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그이지만, 많은 시청자에게 사랑받은 <미생>은 그에게 의미가 크다. “흥행했다는 것보다 누군가를 힐링해줬다고 생각하니 자긍심과 뿌듯함이 생기더라. 쪽대본이 한번도 안 나올 정도로 제작진이 준비를 많이 했고. 영화 스탭이 촬영과 조명을 맡고, 굉장히 부지런하게 작업해서 기억이 많이 난다.” 그의 다음 작품은 <로봇, 소리>(감독 이호재)와 <검사외전>(감독 이일형)이다. <로봇, 소리>에서는 실종된 딸을 찾는 아버지 역을, <검사외전>에서는 황정민의 선배인 나쁜 차장 검사를 연기한다. 어쨌거나 이성민의 손님맞이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