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사의 아수라장]
[곡사의 아수라장] 도축장과 지옥불
2015-07-17
글 : 김선 (영화감독)
공포영화 - 그 게임스러운 장르
<스크림>

덥다. 그래서 오랜만에 공포영화가 보고 싶었다. 슬래셔 고전 <스크림>이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장 “공포영화”스럽기 때문이리라. 인트로부터 범인은 게임을 걸어온다. 공포영화 <할로윈>의 살인마 이름을 맞혀보라는 것. 마이클 마이어스. 딩동댕. 그렇다면 <나이트메어>의 살인마는? 프레디 크루거. 딩동댕. 그럼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는? 제이슨. 땡! 틀렸음. 뭐라고? 하키마스크를 쓴 살인마 제이슨 맞는데?(정답은 영화를 다시 보면서 확인 바람.) 어쨌든 요런 영퀴를 내면서 <스크림>은 시작되고, 게임의 유쾌함을 시리즈 내내 유지하면서 슬래셔영화의 고전이 되었던 것이다.

슬래셔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그 가벼움과 유쾌함일 것이다. 피해자의 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낭자해도, 심지어 내 친구가 범인이었어도 관객은 팝콘을 먹으면서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하면 그만이다(이런 팝콘무비의 기원은 1970년대 드라이브 인 시어터 문화일 것이다) 스플래터영화들은 또 어떤가. 악마 들린 괴물들의 목이 댕강댕강 잘려나가거나 썩어가는 손에 전기톱을 부착해도(<이블 데드>)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잔디깎기 기계에 대량학살되어도(<데드 얼라이브>) 그 유쾌함은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 않는다. 저 유쾌함의 본질은 뭘까? 끔찍한 비주얼에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절박함에도 자꾸 웃음이 터지는 저 유쾌함은 어디서 온 걸까? 바로 게임이다.

반격 가능성, 가해자 시점숏, 반전의 공식

<스크림>의 인트로처럼 모든 공포영화는 게임에 가깝다. 슬래셔영화는 살인자가 어디 숨었나(WHO DUN IT 영화들은 더 노골적으로) 찾아내고/도망가는 숨바꼭질이고, 혼령물은 귀신이 어디 숨었나/이번엔 누구 몸에 빙의하나 찾아내고/풀어주는 얼음땡이고, 크리처물은 괴물의 공간 속에서 탈출하는 미로찾기놀이다. 이런 게임을 더 게임처럼 만드는 건 장르적인 패턴들일 것이다. 다 죽어도 주인공만은 살아남고, 살인마는 죽고 나서도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고, 괴물은 태어난 곳에서만 죽고, 또 무엇보다 살인마(혹은 귀신과 크리처조차) 역시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반격 가능하기도 하다.

<엑소시스트>

이중 “반격 가능성”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결구조를 만든다는 점에서 특히 게임적이라 할 만하다. <13일의 금요일2>에선 여주인공이 제이슨 앞에서 엄마 흉내를 내며 제이슨에게 키스로 반격하고(이런 엄마 흉내 반격은 슬래셔의 컨벤션이 되어버렸다는) <나이트메어>에선 몽마 프레디를 꿈에서 끌어내기 위해 집 안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하며, 심지어 “게임” 공포영화 <쏘우> 시리즈에선 악의 화신 직쏘를 “감히” 속이는 설정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반격을 실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관객을 게임 속으로 몰아넣고 있고, “나도 이길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영화를 즐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인마의 시점숏도 게임성을 드러내는 흔한 장치 중 하나이다. 관객은 피해자의 시점에 감정이입돼서 공포감을 느끼지만 어느새 가해자의 시점숏을 따라서 가해하고 공격하는 쾌감도 동시에 즐기게 되면서, 즉 가해와 피해의 이중적인 입장을 “번갈아” 받아들이면서 적군과 아군을 “번갈아” 플레이하게 된다. 이를테면 <할로윈>은 거의 모든 추격 장면이 살인마의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반격 장면의 약소함에도 불구하고(영화상에서 단 한번의 키스 반격!) 충분히 게임 같다(게다가 존 카펜터의 신시사이저 음악이 관객을 죄다 살인마-마이클 마이어스로 만들어버리고).

공포영화 역사상 가장 기발한 살인마 시점숏은 단연 <데스티네이션>이 아닐까. 죽음이 살인마라는 설정도 기발한데 (당연하게도) 더 기발한 건 죽음도 시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불길하게 넘치는 커피포트, 합선되는 콘센트,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도마와 칼들, 설상가상으로 풀어져서 목으로 감기는 와이어… 소품들과 상황들, 심지어는 공기와 물의 흐름마저 시점숏으로 이용하는 저 기발함은 슬래셔영화의 훌륭한 변주, 아니 위대한 재창조라 부를 만하다. Two Thumps Up!

어느새 공포/스릴러영화의 공식이 되어버린 반전 플롯도 게임 요소 중 하나다. “내가 사실은 귀신이지롱”(<식스 센스> <디 아더스>), “내가 사실은 살인자였지롱”(<유주얼 서스펙트> <스트레인저>), “모든 게 꿈이었지롱”(<아이덴티티> <어글리>), “마지막 피해자는 너였지롱”(<쎄븐>) 등등 언제 튀어날올 줄 모를 플롯의 역행(twist)은 공포와 텐션을 일순간에 게임으로 희화화시켜버린다. 영화 내내 꾸준하고 정교하게 계산된 반전은 허탈함이 아니라 오히려 장르적 충격감/쾌감으로 다가오며 “어이쿠, 내가 졌지만 재미지도다”라며 감탄사를 외치게 한다(그러고보니 반전영화도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요즘은 로맨스나 액션영화, 막장드라마에서조차 사용되는 트릭이니까).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하지만 가장 극악무도한 공포영화는 게임 같은 영화들이 아니라 오히려 게임을 포기한 영화들이다. 이를테면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은 그 흔한 반격 장면도, 가해자 시점숏도(다시 한번 봐라. 시점숏 한컷도 없다), 다시 살아나는 살인자의 장르적 패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그 공백들은 뭘로 채워져 있을까? 우리의 가련한 주인공들이 도망치고 도살되고 찢겨져서 발버둥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내내 주인공들의 발버둥- 도망치는 발버둥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반사적으로 떨리는 사후경직 발버둥 포함- 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은 게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도살장 안에 있다는 느낌적 느낌을 받게 된다. 게임과 도살은 엄연히 다르다. 게임은 질 수도 이길 수도 있지만 도살은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살인자가 전기톱을 들고 쫓아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휠체어를 탔기 때문이고, 연약한 여성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감독이 반격 장면을 시나리오에 써놓질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기가 빨리는 건 여주인공의 미친 듯한 비명 때문이 아니라 감독의 “반격을 스킵하는” 사악함 때문이라고 해야겠다(최근 리스트업된 “기 빨리는 영화”로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있다. 70살 감독한테 기 빨린다 기 빨려).

또 하나의 극악무도한 예시는 <엑소시스트>일 것이다. 사실 (혼령물은 당연하고) 오컬트영화들도 게임스러운 것이 많다. 악령이 누구의 몸에 빙의될 것인가도 게임 같지만, 이번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깜놀시킬 것인가도 게임스럽다. 무엇보다 게임스러운 건 악령의 대장사제를 찾아서 제거하면 악령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엑소시스트>는 다르다. 사제 따윈 키우지 않는다. 더구나 “얍삽하게” 이놈 몸에 갔다가 저놈 몸에 갔다가 하면서 싸돌아다니지도 않는다. 지독한 싸움꾼이 한놈만 패듯 이 지독한 악마는 한놈만, 그것도 연약한 소녀 한명만 잡아서 들었다 놨다 찢었다 갈랐다 한다. 때문에 영화 내내 소녀의 몸은 걸레짝이 된다. 그리하여 영화가 보여주는 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는 게임적 텐션이 아니라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처럼) 무기력함의 흔적들이다. 구부러지는 몸통, 구토해대는 녹색 분비물, 흐르는 오줌줄기, 찢어진 살갗들, 그리고 범해지는 처녀성(아흙 진짜 이 장면은 극악무도를 넘어서 신성모독에 가깝긔…).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이 관객을 도축을 기다리는 돼지로 만들어버렸다면, <엑소시스트>는 관객을 지옥불에 떨어진 살덩이로 만들어버린다.

한국의 공포영화는?

공포영화가 가장 게임스러운 장르임에 분명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모든 장르영화는 게임이다. 로맨틱 코미디는 남녀가 벌이는 밀당게임이고, 액션영화는 범인과 범죄자가 벌이는 경찰놀이고, 전쟁영화는 아군과 적군이 벌이는 전쟁놀이가 아니던가. 선과 악이 분명하고 게임의 규칙이 존재하며 심지어 내가 이길 거란 걸 알고 보는 장르영화들. 뻔한 게 아니라 약속이기 때문에 재미진, 그리고 그런 약속을 가끔 영화적으로 부숴주는 서프라이즈도 있기에 더 재미진 장르영화들. 요즘 한국에는 그런 장르영화가 많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특히 공포영화는 씨가 마른 듯 나오질 않는다. <엑소시스트>나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같은 극악무도한 영화는 바라지도 않는다(이런 영화들이 한국에서 나올 확률은 마이너스 100%). <스크림>처럼 컨벤션을 충실히 따르고 또 영화적으로 뛰어넘는 영화가 나오기를, 또 한편으론 <데스티네이션>처럼 막 나가는 상상력으로 새로운 컨벤션을 창조하는 영화가 나오기를 고대해볼까 하다가 고대는 많이 했으니 그만하기로 하고 오늘밤에는 진짜 극악무도한 공포영화 한편 보고 자련다. 뭘 볼까 흠흠. <오디션>? <더 플라이>? 아니면 <성스러운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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